성령세례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고린도전서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방면으로 행하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즉 성령의 세례를 말합니다.
둘째, 우리가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 즉 성령의 내주하심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방면 즉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여 행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로부터 흘러나서 생수의 강을 이루며 흐르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령의 충만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즉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내주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는 성령의 충만과는 서로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세례>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 '담그다' 또는 '적시다'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즉 물 세례가 우리의 온 몸이 물속에 들어가 잠긴(덮인) 경우라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어서 성령께서 나를 덮는 경우와 같습니다.
성령세례는 마치 우리가 옷을 입는 것이나 버스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버스를 타면 버스 안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어디론가 가려고 한다면 그저 버스 안에 있게 됩니다. 그 상태에 있기만 하면 버스의 힘이 우리를 원하는 곳으로 옮겨 줍니다. 성령세례는 또한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원하는 곳까지 올려 줍니다. 또한 에스컬레이터를 탄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세례는 우리에게 능령을 줍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행1:8)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행11:15-16)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눅24:49)
사도행전에는, "성령과 권능으로 기름 부음을 받다", "성령이 임하시다", "성령을 받는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다", "성령을 (물붓듯) 부으시다" 등으로, 누가복음에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다"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모두 다 같은 의미입니다. 즉 이는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1. 성령세례의 목적
이미 언급하였듯이, 성령세례의 목적은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것입니다. 나 자신의 신앙생활을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되면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의 삶이 수동적, 이기적이 되어서 오히려 은혜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는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증인된 삶을 살 때 비로소 더욱 큰 은혜가 있게 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목적을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또는 성령의 세례의 목적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서 은혜를 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 활기를 잃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영적인 삶을 회복하려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과정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성령의 세례를 받는 목적을 명확하게 알고 간절히 구하고,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면 적극적으로 헌신된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후에 권능을 입고 복음 전파의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성령의 세례와 권능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셨습니다.
(눅 4:14-19)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처럼 누구든지 복음 전파의 삶을 살고자 성령세례를 구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은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작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주의 뜻을 따라 예수님처럼 복음을 위한 공생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공생애의 삶이란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든, 가르치든, 가정에 있든 관계없이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나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2. 성령세례의 결과
성령세례의 결과로 큰 변화가 따라옵니다. 누가복음 24:49에서,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으로 표현하듯이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20에,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에서,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의 결과로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고 하심을 보았습니다.
즉 이는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것으로, 성령의 세례를 가리키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 다이나믹한 삶, 힘있는 삶, 변화를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행전 1:8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덮으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증인이 되리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24:49의 ,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의 말씀이 응답된 삶입니다.
마치 우리가 버스 안에 들어가면 버스가 힘이 있어 우리를 싣고 가듯이, 또한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면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올려 주듯이,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이같은 능력은 우리 안에 잠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진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은사'(선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성령의 아홉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고전 12:7-11)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멸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사도 베드로의 경우
사도 베드로의 삶을 예로 보면,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기 이전과 이후의 그의 삶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모두가 주를 버리고 도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그는 끝까지 주를 따르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닭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오순절 이후에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앉아 있는 산헤드린에서도 담대하게 주를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할 때에도 이를 영광으로 여기며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또한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능력 있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성품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서 이전에는 경쟁심과 비교의식을 가졌었으나, 이후에는 겸손과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령세례 받기 전@@
-제자의 삶(마4:18)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함
-거듭난 삶(마 16:16-17)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
-열정적인 삶(마26:31-35)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회개하는 삶(마26:69-75
세 번 부인하고 나가서 심히 통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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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의식, 서로 높아지려함, 두려움, 실패와 좌절, 열정은 있으나 연약함, 사람의 일을 생각함(마16:23), 중요한 기도 시간에 잠을 잠(마26:36-45)
@@오순절에 성령이 임함(행2:1-4)@@
@@성령세례 받은 후@@
-성령의 충만함, 방언 말함(행2:4)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 믿게 됨
앉은뱅이가 걷게 됨(행3:6-10)
그 결과 남자만 오천 명이 믿게 됨
-공회 앞에서 담대히 증거함(행4:8-12)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행5:6-10)
-애니아의 중풍병을 낫게 함(행9:33-34)
-죽은 다비다를 살림(행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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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의 삶에 전적인 변화가 일어남
: 이적과 기사, 담대함과 큰 확신, 겸손과 자기 희생, 주를 끝까지 따름, 승리의 삶
(행2,3,4,5,10,12장)
이같은 변화는 오순절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성령세례는 이처럼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성령세례의 기록은, 오순절에 120명 가량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 임하심(행2:1-4), 빌립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사마리아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성령받게 함(행8:14-17), 회개하는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어 성령으로 충만케 함(행9:17-20),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 고넬로의 집에 성령이 임함(행10:44-46), 사도 바울을 통해 에베소에 성령이 임함(행19:1-7) 등 다섯 군데에 걸쳐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과 19장의 에베소에서의 성령세례 사이에는 30년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 성령의 역사가 단지 다섯 번만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이 있었을 테지만 성령께서 대표적인 몇 가지 사건만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후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1)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최초의 사건이므로 안수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는 듣는 사람들 가운데 임할 때 아무도 안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후에 이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셨습니다. 안수를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 안수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빌립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 안수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어떤 현상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17에, "두 사도가 성령을 받기 위해 안수기도를 하였다"고 하지 않고,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강력하고도 단호한 표현입니다. 즉 누군가가 성령의 세례를 받는 장면을 잭과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기록되었습니다. 더구나 마술쟁이였던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행9:18-19)라고 한 것을 보아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이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다섯 번 언급된 성령세례의 장면을 종합해 볼 때, 가장 흔히 나타나는 현상은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이 아나니아를 통해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눈의 치유가 일어난 것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방언 기도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방언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4:18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한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일반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귀한 선물을 주시는 것을 사모하여 구하는 것은 지극히 신앙적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령세례를 위해 안수기도를 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