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것을 허물어야 영의 것이 세워집니다
예수님을 고소하는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였다”라고 말입니다(마 26:61). 마가복음에는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 하였습니다.”(막 14:5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손으로 만든 성전 곧 육체적인 것을 허물면 손으로 짖지 않은 거룩한 성전 곧 영의 처소를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조건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육신의 것들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으로 만든 신령한 영적 구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거듭난 사람에게 이 육체의 것들을 허물도록 촉구하며 그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경우 강제적으로 허무는 일을 하십니다. 모든 영적인 일에 있어서 반드시 육체적 구성을 허무는 일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영적 지식과 경험들을 쌓아가는 일에도 역시 이 원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고 그 육체를 의지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육체의 것들을 허물지 않고서는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갈 수 없다는 이율배반적인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오묘한 비밀을 깨달아야 하고 그에 따르는 방법들을 알아가야 합니다.
다니엘이 고레스 왕 3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심한 고생 끝에 겨우 그 해석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세 이레 동안 고생하였고 좋은 음식을 삼가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도 대지 않았고 몸에 기름도 전혀 바르지 않았습니다(단 10:1~2). 그는 그때 환상을 받기 위해서 많은 고통을 당하였고 여러 사람이 함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겁이 나고 두려워 그 자리를 피하여 숨었다고 합니다(7~8절). 그는 이 환상을 보기 위해서 고통을 당했고 볼 때는 졸도해버렸습니다. 여러분, 졸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아십니까? 숨이 막혀 죽는 것 같고 이러다가는 정녕 죽는 것이구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오면서 그만 숨이 멈추어지고 쓰러져 그야 말로 죽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깨워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일어날 수 없는 죽음의 깊음 속에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 직전까지 겪는 정신적 두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땅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다니엘을 한 손이 어루만지면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천사가 전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다니엘이 천사장이 들려주는 주의 말씀을 듣게 되기까지 거치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육신을 허무는 작용이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선지자들이 경험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이후에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육신을 허물지 않으면 손으로 짖지 않은 주님의 성전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주님과 친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신약은 모든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하는 예언자이며 선지자(그리스도의 증인)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받아야 하는 일이 먼저이며 그러기 위해서 불가불 육체의 것들을 허무는 아픈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 과정이 사람들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공통적인 것은 고통이 따른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다른 표현을 빌리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고통스런 문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계기를 만납니다. 육체의 것들이 허물어져야 손으로 짖지 않은 하나님의 것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것이란 능력과 비전입니다. 이것은 손으로 지은 것에는 담을 수 없는 것이기에 부득불 육체의 것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요셉은 하나님의 것을 담기 위해서 이집트로 팔려가고 그곳에서 말할 수 없는 역경을 거치게 됩니다. 다윗 역시 사울의 핍박을 받으면서 광야를 헤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떠나 이기적인 삼촌 밑에서 고생을 합니다. 바울은 제사장의 꿈을 접고 아라비아로 떠납니다. 성전 제사장의 신분인 이사야는 정신병자처럼 행동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당시의 사람들 눈에는 한낱 실패한 자의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며, 스스로도 그렇게 여겨질 만큼 암담하고 두려운 세월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를 허무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갔습니다.
우리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육체가 무너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제가 20여년전 청소년선교회에서 상담사역을 할 때 비행에 빠진 자녀 때문에 찾아온 분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 애가 이런 일을 저지를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에게는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막상 그런 불행한 일이 닥치면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때로는 하나님의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납니까?”라고 항변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헌신하였던 일들을 들어 지금의 일이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에는 받아들이지만 그런 불행한 일들이 계속 되면 견디지 못하고 항의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순복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때는 그런 지식은 소용이 없습니다. 고통 앞에 사람들은 원초적으로 항의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의 육신의 것들을 허물고 하나님의 것으로 지어져 가는 과정임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다니엘과 함께 한 사람들이 무서워 달아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지요.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에게 피해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해 오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선하시며 승리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행이나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오는 것으로 여기고 피하려고 합니다.
물론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는 있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쳐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요. 그런데 이 본성은 철저히 육체를 따라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의 약점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가혹한 시험과 고통을 당할 수 있으며, 또한 겪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히브리기자는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사생자라고까지 정의합니다(히 12:8). 육체의 고통을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웃이 보이며, 고난당하는 ‘작은 자들’이 보입니다. 선지자와 예언자는 자신을 버려 자신 속에 하나님의 증거가 들어나도록 고난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통해서 그 시대의 징조를 보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호세아는 폐역한 시대를 지적하기 위해서 창녀와 결혼하고 그 자녀의 이름을 저주스럽게 짓습니다. 그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여야 했고 한번도 따스한 사랑을 자녀에게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가정은 항상 불안했고 가출을 밥 먹듯 하는 아내 때문에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피폐해졌습니다. 단란한 가정이란 그의 삶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당하는 그런 개인적 불행은 바로 그 시대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의 삶’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삶을 주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일들은 일부 선택된 사람들이 사는 것이지 우리 평범한 성도들이야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성경 말씀의 본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엘리야는 고통의 삶을 사는 사람이고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엘리야와 다르게 생각하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우리도 엘리야처럼 그런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니엘 곁에서 두려워 달아나 숨어버린 이름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손으로 지은 것을 허물면 손으로 짖지 않은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이 우리 안에 세워진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과 질고가 닥칠 때 온전히 즐거워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주님의 거처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의 육체의 것들을 허무시기 위함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