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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능력을 개발하고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몫2024-07-22 22:46
작성자 Level 10

 능력을 개발하고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몫

 

  한국교회는 90% 이상이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사역자가 이끄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능력이란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라고 강조한 그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병을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권세를 주었던 그 권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능력과 권세는 은사와 같은 것이면서도 또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이런 권세가 있어서 “뱀을 만져도 해를 입지 않으며, 독을 마셔도 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으로 주의 백성들을 진리와 능력 가운데로 인도할 책임을 진 사역자에게 있어서 능력은 곧 생명입니다.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그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그것은 균형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심하면 극단에 치우치게 됩니다. 능력 없는 말씀은 헛된 경건을 만들며, 말씀 없는 능력은 오만을 만들어냅니다. 주님은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오직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은 자는 결국에는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때 귀신도 쫓고 병든 사람도 치유했지만 결국에는 말씀만이 남더라. 그러므로 오직 말씀만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한 때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였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능력이 사라졌거나 심하게 약화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그들에게서 죽은 자가 살아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예언이 주어지는 등의 놀라운 일들이 지금도 빈번히 나타나서 그것으로 인해서 어려운 고통의 질고에 갇혔던 사람들이 자유함을 얻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한다면 과연 능력은 별 의미가 없고 오직 말씀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할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저는 사역의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해서 울부짖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그것을 외면하는 많은 목회자들을 보아왔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면밀히 연구하면, 사도들이 그런 태도를 취한 곳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더 말할 나위가 없구요. 사도들에게 나타나던 능력이 세월이 지나면서 소멸되었다는 말씀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능력과 신비한 영적 현상들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대부분은 능력과 기적의 연속이었고 복음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기록하는데 모든 지면을 사용하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남다르게 능력을 더 사모하거나 신비한 일에 더 흥미가 많아서 일까요? 그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요. 성경은 복음전파와 능력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 왜 절대 다수의 목회자들이 능력을 부인하거나 소홀히 하고 말씀에만 목을 메는 걸까요?

말씀을 배우는 일은 신학교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가능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이 제대로 자질을 갖추지 않은 신학교가 난무하는 현실에서는 일정 기간만 지나면 누구든지 목사가 됩니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말씀을 제대로 배울 시간도 없이 목사가 되어 목회의 일선에 나섭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오직 말씀이라는 말씀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능력은 이런 제도와 시간 속에 머물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개방된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기본적인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 성경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이 기본으로 말미암아 더 큰 능력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하는 것과 찾는 것입니다.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깊은 말씀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을 내어서 배워야 하고 피나는 노력으로 묵상하고, 적용하고, 익혀야 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전문가 밑에서 배우고 그리고 자신의 끈질긴 노력이 있어야 말씀에 바로 설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지만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말씀이 깊어질 수도 있고 수박 겉핥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기록된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들이는 노력이 처절하고 간절한데 그 다른 면인 능력을 위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능력은 거저 주는 것이라는 안일한 거짓말에 속아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희생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요. 목회자들이 성경을 날마다 배우고 적용하는 것 못치 않게 능력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일에 그런 깊은 관심을 쏟아보기나 하였습니까? 말씀 공부를 하는 것 만큼이나 시간과 물질을 들여 능력을 개발하고 그것을 향상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했습니까? 아직 능력이 수면 위로 들어나지 않은 다수의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그것이 싹터서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열정을 쏟아 부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존 윔버가 능력을 받게 된 계기와 과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날 자고 일어나니까 없던 능력이 갑자기 생겼습니까? 능력은 거저 받는 것이니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아직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주어진 소명을 위해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마귀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이 시험을 이기고 난 후 갈릴리로 돌아와 처음 행하신 일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유명한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입니다. 말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아시는 예수님이 처음 행하신 일이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일은 너무도 힘듭니다. 그런데 유감스럽지만 말씀을 가르칠 때에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가르칩니까? 아니면 대충 합니까? 너무나도 많은 목회자가 어설픈 성경지식으로 어설프게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에 대한 판단이 현실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능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있고 없고가 바로 나타납니다. 수준 미달의 말씀이라도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고 목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는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수가 능력을 부인하는 자리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도 병든 사람을 위해서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고, 문제를 만난 사람을 위해서 지식의 말씀을 구하고, 귀신 들린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일을 시행하지 않고는 능력이 드러나지 않으며, 성장하지도 않습니다. 내게 능력이 없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런 사람들을 피하고 치유 사역을 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요. 한 두 번 해 보아도 안 된다고 쉽게 포기했지요. 한 두 번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기도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독백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능력이 수면에 드러나기까지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목숨과도 바꿀 그런 의지와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이는 온전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지도자를 만나면 그 능력을 제대로 이끌어내어 표면에 나타나게 되지요. 그래서 지도자가 필요한 데 우리의 현실에 이런 지도자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무 능력도 없었던 걸로 여겼던 사람이 지도자를 만남으로써 주어진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개발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다수가 행하면 그것이 올바르다는 다수주의에 깊이 젖어서 삽니다. 민주주의와 다수주의는 같은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중심에 있는 신본주의이며, 소수의 선택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주의입니다. 소수에 들어가기를 애쓰고 힘써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사람들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열려 있고 값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피나는 노력이 없이는 절대로 얻어질 수 없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아는 여러분들이 왜 하나님의 능력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그냥 얻으려고 합니까? 그냥 드러나기만을 맥 놓고 기다리기만 합니까? 능력은 계시를 만나야 비로서 들어납니다. 그럴려면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소리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나타나게 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얻던지 못얻던지 나타나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사모하여 배우고 개발하려는 노력을 했습니까? 말씀을 배우기를 힘쓰고 열심을 낸다고 다 신학자가 되고, 말씀에 통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능력을 구한다고 모두 능력 사역자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배우고 있는 지금 그저 그럭저럭 남들 하는 만큼이나 하면 되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배웁니까? 그렇지 않지요. 깊이 있는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고 배우고 묵상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말씀에 통달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능력을 구하고 적용하기를 힘쓴다 해도 차별이 생기게 되어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구하기를 포기하거나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그럴 가능성마저도 버리는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배울 때 신학교에서 여러 해 동안 배우고 익혔지만 그것은 초석을 다지는 일이었을 뿐이고 계속되는 노력과 묵상으로 어느날 비로서 눈이 열려 말씀을 깊이 있게 깨닫고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해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었지요. 그런 말씀의 능력을 얻게 되자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말씀으로 인해 변화를 받지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말씀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말씀만 필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수많은 상처와 고통을 가지고 교회로 찾아오고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아픈 지체들이 찾아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마음은 썩고 고통이 살을 애는 데 그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외면하면서 오직 말씀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아픔을 치유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강단에서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유쾌한 목사가 유쾌하게 전하는 말씀 아래는 무너지는 고통과 처절한 갈등과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는 주의 백성이 내뿜는 긴 한숨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도대체 누구에게 오라는 것입니까? 여기서 “나”는 주님을 대신하여 그 일을 하도록 위임 받은 주의 종들이 아닙니까? 쉼터가 되고 해결사가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 못지 않게 소중한 능력을 그 종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곧 능력이요, 능력은 곧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능력 역시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능력은 같은 곳에서 온 것이며, 들어나는 모습만 다를 뿐 곧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능력을 자주 인격으로 표현합니다. 능력은 무생물이나 어떤 힘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능력이나 권세가 하나님의 발 앞에 굴복하고 경배합니다. 그것은 생명체입니다. 말씀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듯이 능력 역시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키우고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생명의 씨앗으로 우리 가운데 뿌려진 말씀과 능력이 자라도록 물주고 돌보아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말씀만 필요한 사람만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능력이 필요한 사람도 모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능력에 따라서 달란트를 나누어 주고, 오랜 뒤에 그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결산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종들 가운데 주인이 달란트를 나누어준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어리석은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에 대해서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자에게서 달란트를 빼앗아서 가진 자에게 주어라. 그리고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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