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우리의 적(귀신)
앞에서는 원수의 두목(boss)라고 할 수 있는 사단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이제 그 부하들인 귀신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성경에서 사단은 단수인 반면에 귀신은 복수다. 또한 사단은 무소부재하지는 못하지만 전 세계에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그 졸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한다.
귀신의 기원은 어디서부터 생겨났는가?
귀신들은 어디서부터 생겨났는가? 그 기원이 어디인가? 무엇을 귀신들이라고 하는가? 네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 견해, 아담 이전 육체를 가지지 않은 인간의 영
첫 번째 기원은 아담 이전에 인류로부터 온 육체를 가지지 않은 영을 귀신이라고 하는 견해다. 일부에서는 창세기 1장 아담의 창조를 맨 처음의 창조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아담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피조물이 타락해서 그들을 다 멸하시고 새롭게 시작하셨는데, 그래서 그 당시 어두음이 있었고, 그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창조하셨듯이 새롭게 시작한 것이 아담이고, 그 전에 있던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멸하셨는데, 그들은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영만 있는데 그들이 바로 귀신이다. 라고 하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신약과 구약과 사이를 중간사 시대라고 하는데 이 중간사 시대로부터 이러한 견해가 나왔다. 우선 하나 이 견해는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귀신들이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약이건 구약이건 귀신에 대해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구절은 있지만 귀신들의 기원은 이렇다, 라고 단정적으로 설명한 구절은 없다.
두 번째 견해, 예수를 안 믿고 죽은 영
두 번째 견해는 예수님을 안 믿고 죽은 사람들의 영이라는 견해다. 유대 역사가였던 요셉푸스도 그렇게 생각했고, 오늘날 한국에서는 베뢰아를 가르치는 김기동 목사의 견해가 이와 똑같은 견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안믿고 사람들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이렇게 말한다.
세 번째 견해, 창세기 6장의 네피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2-4)
세 번째 견해는 천사들과 인간들의 딸이 결합해서 생긴 거인 즉, 네피림이 귀신의 기원이다 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문서는 외경인(성경의 정경 선정 과정에서 제외된 문서들. 외전(外典)·경외경(經外經)이라고도 한다.) 에녹전서 등을 보면 나온다. 그래서 귀신의 기원이 노아 홍수 전에 천사들과 인간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네피림이 곧 귀신이라고 말하는 견해다.
네 번째 견해, 타락한 천사
요한계시록 12장 7절에 보면 사단의 얘기가 나온다. 사단이 용으로 비유되어 있는데 진짜 용은 아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계12:1-4)
사단은 우리 인간에 비하면 매우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사단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단의 차이는 사단과 인간의 차이와 비교도 안될 만큼 차이가 더 크며, 사단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잠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제한되게 허락할 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단을 묶여진 개라고도 한다.
사단이 인간에 비해서 매우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과는 상대가 안된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무서워하기보다 사단을 더 무서워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하셨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12:7-9)
다른 구절들을 보아도 귀신은 사단과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견해가 네 번째 견해다. 나도 이 네 번째 견해를 지지하고, 많은 분들이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 성경적으로 타당하다고 본다.
귀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귀신들은 무엇보다 자기가 거할 곳을 찾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때로는 귀신들이 동물에게 들어갈 수도 있다.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마8:31-32)
그리고 귀신은 동물이나 식물, 무생물, 사물에도 거할 수 있다. 특별히 우상숭배하는 집이나 나무, 돌, 특별히 무속신앙으로 쓰이는 곳에는 귀신이 거하기 쉽다. 그러나 귀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무엇보다 사람이다.
귀신들이 사람에게 거하면 나타나는 현상들
영어 성경을 보면 귀신들을 표현하기를 사악한 영, 더러운 영, 부정한 영, 악한 영, 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표현을 보면 귀신들이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결단코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 하셨다. 여기에 도적은 사단의 세력을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만큼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더욱 넘치게 된다. 반면에 사단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단(세상)의 방법과 길을 따르는 만큼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유업을 빼앗기게 된다.
이와 같이 귀신들이 사람들 속에 들어가거나 혹은 그만한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미치면 여러 가지 나쁜 영향력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때로는 병을 가져오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한 행동들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동성연애, 집단 성행위, 혹은 마약이나 술 중독, 폭력, 살인, 강도, 도둑질 등, 죄로 사람들을 온갖 나쁜 행동을 하게 한다. 그래서 귀신들의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업과 반대되는 영향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럼 좀더 구체적으로 귀신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점들을 살펴본다.
1. 귀신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귀신들도 인격(personality)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귀신들이 점잖다, 인품이 좋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인격을 가지고 있고 지성을 가지고 있듯이 귀신들도 지성과 인격을 가지고 있는 한 인격체라는 말이다.
오랫동안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사역을 하신 분이 경험을 통해서 한 말이다. 그분이 축사사역을 통해서 수백 수천의 귀신을 쫓아내고 난 결론이 귀신들이 인격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귀신들은 아주 미련하고 별로 영리하지 못하다고 한다. 물론 아주 사악하고 치사하고, 변덕부리는 등의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은 귀신은 지적인 수준이 아주 낮다고 한다. 한번은 그분이 두 세 시간동안 여러 귀신을 쫓아냈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속에 귀신이 좀 더 있는 것 같고 뭔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서 ‘속에 귀신이 더 있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말하라’ 그랬더니 귀신이 하는 말이 ‘여기 아무 귀신도 없어요.’ 그래서 ‘거기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귀신이 몇 명이냐?’ 그랬더니 ‘셋이요’ 그랬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면 ‘왜 나만 쫓아내려고 해요. 제 누구누구 귀신도 있는데요’ 그래서 서로 들춰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귀신들은 이렇게 지성이 낮다. 그런데 반면에 어떤 귀신들은 매우 사악하고, 영리한 귀신도 있다. 어떤 귀신은 일곱 개의 외국어를 유창하게 한다. 전혀 외국어를 배운 경험이 없는 사람이 일곱 개 외국어를 자국어처럼 유창하게 하는 것이다. 특별히 사고와 관련된 귀신들은 매우 영리하다. 그 속에 속임수로 가득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대적할 이론들이 쫙 정립되어 있는데, 이런 경우는 매우 영리하고 사악하며 때로는 지성도 높은데 그러한 귀신들의 활동들을 여러분들도 가끔씩 보았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권세와 정사는 천사의 계급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사단의 세력들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것은 추측인데 계급이 높고 능력과 권세가 높은 귀신들일수록 더 간교한 것 같다.
2. 귀신은 그 사악함의 정도가 다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11:24-26)
어떤 귀신들은 더 사악하고 더 악하다. 여기에도 보면 그 중에 더 악한 귀신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유함을 얻는 것이 중요한데, 그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자유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번 나갔던 귀신이 다시 들어오되 자기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면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더 나쁘게 되는 것은 뻔하다. 어떤 사람에게서 귀신의 영향력이 떠나면 우리는 항상 예수님으로 채워지도록 가르치고 지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매일 음란잡지를 구독하다가 귀신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사역시간에 나와서 기도 받는 중에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귀신의 영향력을 끊어주셔서 자유함을 얻고 집에 돌아가서 그것들을 다 태워버렸다. 그런데 얼마못가서 또 그런 잡지를 다시 구독하면 어떻게 될까? 더 심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더 사악한 자들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지속적으로 채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11장 24절-26절은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에게 한 말씀이다. 그런데 똑같은 말씀을 마태복음에서는 끝에 이 악한 세대가 또한 그러하리라고 하셨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이 악한 세대가 그러하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개인에게도 해당되지만, 국가에도 해당된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유대나라는 엄청난 억압 가운데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억압 가운데 있었고, 영적으로는 사단의 억압 가운데 있었다. 그야말로 흑암 가운데 있었다. 종교적인 모양은 있지만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걷힌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의 임재는 걷힌 가운데 있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지난 400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이 끊겨서 얼마나 갈급했던지 침례요한이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을 외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전국에서 몰려왔다. 그만큼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셔서 하신 여러 가지 치유나 사건을 성경은 표적이라고 했다. 표적이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하시는 일들을 육신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서 영적인 억압을 깨뜨려주심으로 자유함을 주시고, 치유를 주시는 사랑의 행동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증거이기도 했다. 또한 주님께서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증거인 것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안받아들였다. 왜냐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자기들의 기준에 안맞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러분의 직분이 무엇이든지 여러분의 기준만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 자세를 가지고는 보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에서 겸손한 심령을 보신다. 반드시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주 앞에 나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계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마음을 보시는 방법이 뭐냐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상반되는 관점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비춰질 때 여러분이 그것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 자세를 보신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때때로 여러분의 생각(mind)을 거슬리신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중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눅2:34)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이다. 왜냐면 앞으로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의 중심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을 찾으신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보시기 원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 기억할 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가지고 나가면 절대로 하나님 못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저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지 않으면 저는 모릅니다.’ 이렇게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엎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나올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 자세가 없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 ‘이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한 개인에게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 나라 전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저들이 돌이키지 않았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시점부터 정확하게 한 세대인 40년 후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예수님께서 예언한 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처참하게 무너지고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노예로 팔려가고, 본 나라에서 이방나라로 쫓겨났다. 유대인은 단 한사람도 자기 땅에 남지 못하고 1948년 5월 14일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에서 독립할 때까지 2천년 가까이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나라를 잃고 방황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방문하신다면 그것은 대단히 감사할 일이고 축복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방문을 환영하고 겸손하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이 엎드려야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면 차라리 하나님이 방문하지 아니함만 못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문은 항상 축복과 심판이 같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악한 세대가 그러하리라”라는 말씀은 이것을 말한다. 역사가 증거 한다.
3. 귀신은 거짓말하고, 미혹하고, 고소한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12:10-12)
오늘날 여러분을 가장 크게 대적하는 사단의 방법 중에 하나가 고소다. ‘야! 네가 목사라고 할 수 있어! 네 아내하고 싸우고 와서 성도들에게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라고 설교할 수 있어! 이 외식하는 놈아,’ 이렇게 고소한다. 여러분들이 지은 죄를 다 들추어낸다. 구역장이 성경공부하려고 했더니 ‘네가 성도들에게 그런 자격이 있어. 그런 죄를 지어놓고서, 그러고도 네 입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그럴 수 있어! 어떻게 한입을 가지고 욕하고, 남편에게 대들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가르치냐!’ 그렇게 대적한다. 어떤 분이 영국의 상원의원 15명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들켰습니다. 의원님, 튀세요.’ 하고 써서 보냈더니 그 주간에 12명이 해외에 나가있더라는 우스운 얘기가 있다.
우리가 사단의 고소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누구라도 자기의 의를 의지하면 다 넘어진다. 아무리 신앙생활 잘해도 여러분의 의를 의지하면 넘어진다. ‘그래 나는 안돼, 나는 자격이 없어.’ 이것도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빨리 인정하라. 여러분의 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라는 말이다. 성경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여러분 다 죄인이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는 아무 선한 것도 없어요.’ 이렇게 여러분의 의를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보혈의 공로만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사단을 이길 뿐만 아니고 여러분이 넘어지는 것도 훨씬 안넘어진다. 내가 안넘어지려고 아등바등 힘쓰면 힘쓸수록 더 넘어지는 것을 알 것이다. 잘 모르면 아직 안넘어지려고 노력을 안해봐서 모르는 것이다.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있다. 그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안넘어지려고 하는 여러분의 노력까지도 포기해야 한다. 우리 속에는 원래 선한 것이 없다. 만약 여러분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여러분 자신에게서는 선한 것이 조금도 나올 것이 없다. 원래가 아무것도 없는데 안넘어지려고 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내 노력으로 선한 일, 혹은 선한 삶을 살고자하는 노력까지도 포기하고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나를 지키시는 주님, 나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주님, 나의 죄를 씻으시는 주님, 회개하는 나에게 십자가의 보혈로 씻으시고 용서하신 주님, 그분만을 의지하면 사단의 권세는 파괴된다.
사단은 거짓말쟁이다.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았는데, 자꾸 용서받지 못했다고 그런다. 그러면서 회개한 죄를 가지고 자꾸만 여러분에게 가책을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고 하셨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죄를 씻으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라. 그분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만큼 승리한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지 않다. 아무리 잘해도 바리새인처럼 버림받는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노력을 포기하고 주님을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만큼 승리한다.
4. 귀신은 사람을 파멸하고 괴롭힌다.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14-29)
제자들이 귀신을 처음 쫓아본 것이 아니다. 과거에 많은 승리를 경험해본 자들이다. 그런데 그날은 한마디로 죽을 쑤고 대단히 힘든 날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꾸짖으셨다. 귀신들린 아이나 부모를 꾸짖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그러니 이것을 보면 우리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다.
왜 꾸짖으셨는가? 그들이 준비가 안돼 있어서 그랬다. 어떤 귀신은 쫓아내기가 힘들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런 유’ 특별한 경우였던 것 같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변화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시는 길이었다. 나머지 아홉 제자는 서로 토론하고 있었다. 우리가 토론도 중요하지만 토론가지고 안되는 것 같다. 기도원 같은데 가면 토론하기 좋아하는데, 그것이 사단의 방법인 것 같다. 아니 기도원에 갔으면 기도해야지 매일 모여서 토론한 결과가 뭐냐?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고 결국 나중에는 흉만 본다. 그래서 은혜 받으러 갔다가 오히려 시험만 들고 온다. 토론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항상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되고, 하나님께 민감해야 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세상의 오락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도, 우리가 세상의 오락과 세상적인 삶, 세상 일로 바쁘고 여러 가지 바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적인 군사로써 주의 일하려고 하면 잘 안된다. 주님 안에 거하면서 주와 동행하고, 기도하며 성령께 민감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위치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깨닫고 그 위에 서게 될 때 승리할 것이다.
5. 귀신은 거짓 가르침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약3:15)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4:1)
지혜도 마귀가 주는 지혜가 있다. 특별히 신앙적인 지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내가 전에 특별히 성령의 은사를 따라 사역하는 분들은 반드시 두 구절은 이마에 써가지고 다니든지, 손에다 붙여가지고 다니든지, 부엌에 붙여놓고, 침대에 붙여놓고, 천정에 붙여놓고, 눈만 뜨면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두 구절이 있다고 했다. 첫째가 고린도전서 13장이고, 둘째는 야고보서 3장 15절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소위 말하는 사랑장이 아니고 은사의 길에 대해서 말해주는 내용이다. 왜냐면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장 마지막 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는데, 여기에 제일 좋은 길은 사랑에 대한 것이고, 14장 1절에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 했는데 여기에 더 큰 은사는 예언을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13)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은 은사가 있는 자들이 행할 길이다. 은사를 행하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은사를 행하면서 온유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섬겨야 한다. 이 자세를 잃으면 다 잃는다. 사도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쓰임 받고 나중에 버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될 수 있다. 쓰임 받고 버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크게 쓰임 받을수록 두려워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고백하기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3장은 여러분이 항상 볼 수 있도록 눈에 띄는 곳에 써 붙여 놓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고,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 이 지혜는 그냥 단순한 세상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을 말씀하실 때는 이것이 마귀에게서 나온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약3:14-15)
독한 시기, 곧 자기의 개인적인 야망이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계시가 올바로 오지 않는다. 예언하는 사람이 자기의 의제가 있어서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야망이 안내려지면 절대로 계시가 올바로 안온다. 그러니까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빙자해서 헌금하게 하고, 자기 종 만들려고 한다. 어떤 분은 전국에 다니면서 소위 영성사역 한다고 그러는데 옛날의 은사주의보다 더 타락했고 아주 심각하다. 그런데도 예언해준다고 하면서 좋은 말만 하니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좇아다닌다. 왜냐면 그 예언이 이루어지려면 그 사람을 좇아다녀야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야망 때문에 그런 것이다. 독한 시기, 곧 개인적인 야망이 있으면 그 지혜는 하나님께 온 것이 아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3:16-17) 여기 ‘거짓이 없나니’는 ‘외식이 없나니’란 말이다. 이것이 위로부터 나온 지혜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성령의 은사는 임했는데 이 부분이 안되니까 은사 때문에 교회가 분란이 일어나서 싸움이 나고, 시기하고, 서로 중상모략하고, 비방하고, 나누어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많다. 은사는 덕을 세우기 위해 있는데, 이렇게 되면 사단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거짓 가르침을 만들어낼 수 있다.
디모데전서 4장 1절,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이 말은 귀신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 귀신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 말씀은 귀신들이 만들어낸 거짓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귀신에 대해서 배우면 잘못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매가 뜨면 꿩이 고개를 처박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여기에 말은 귀신들이 가르치는 왜곡된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6. 귀신은 때로는 매우 강할 수 있다.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눅8:26-30)
거라사인의 경우처럼 귀신은 매우 강할 수 있다. 영화에서 본 ‘헐크’ 같이 힘이 엄청나게 강하다. 사역을 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여자이고 몸도 바싹 말랐는데, 건장한 일곱 장정들이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귀신은 힘이 매우 강하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 귀신은 우리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사단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비교도 안되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만큼 크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어떤 지역에 가면 많이 위축되는 분들이 있다. 그래서 많이 억압되는 분들이 있다. 왜 그러냐면, 주님을 안보고 환경을 보기 때문이다. 전에 알던 한 자매는 그 어머니가 예수님을 안믿을 뿐만 아니라 거의 보살이나 똑같아서 절간을 밥 먹듯이 드나들고, 집안은 온갖 부적으로 붙여 놓아서 그 자매가 집에만 가면 눌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매가 대학생 선교회에서 배운대로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그러면서 대적하는데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자매에게 그렇게 하면 지는 거라고 했다. 왜 지느냐면 그 자매의 눈이 환경에 가 있기 때문에 지는 것이다. 이기는 길은 환경에서 눈을 떼서 주님을 봐야 된다.
마태복음 12장 22절이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어떤 사람들은 모든 병이 다 귀신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감기만 걸려도 귀신아 물러가라. 길가다가 걸려 넘어져도 귀신아 물러가라’고 말한다.
모든 병이 귀신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반대로 과학적인 사고는 귀신은 무슨 귀신이야 그러면서 귀신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예수님 시대에 보면 모든 병이 다 귀신들려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 된 것이 분명히 귀신의 영향 때문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눅13:11) 그 경우 귀신이 쫓겨나니까 정상적으로 일어서게 되었다.
어떤 분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치유한 모든 사건을 연구한 통계에 의하면, 예수님이 치유하신 병중에 삼분의 일이 귀신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모든 병이 다 귀신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 시대에 그랬다면 오늘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정신병이 귀신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병은 귀신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7. 귀신의 멸망은 정해졌다.
어떤 분 표현에 의하면 귀신은 목잘린 닭이라고 말한다. 예전에 시골에서 닭을 잡을 때 보니까 사람마다 참 다양한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닭을 잡을 때, 닭 목을 비틀어서 잡고, 어떤 사람은 목을 도마에 올려놓고 칼로 쳐서 잡고, 어떤 사람은 닭 머리를 돌절구 밑에 집어넣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나무에 매달아 잡기도 한다. 그런데 살아있는 닭의 목을 칼로 쳐도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지지 않고 목이 떨어졌어도 한참을 피를 흘리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런데 그분이 그 광경을 보고 하는 말이 사단(귀신)도 목이 잘린 닭이라고 한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 머리가 깨뜨려졌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까지 목이 잘린 채로 돌아다니느냐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다. 목이 잘린 닭이 발악은 할지 몰라도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보면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은 영원한 불 못 가운데 던져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단의 심판은 이미 확정 판결이 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승리해 놓은 싸움을 싸워가고 있을 뿐이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가다가 어려움도 있을 수 있고,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고, 때로는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승리가 확정되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신나는가.
지금 세계는 영적으로 매우 어둡다. 앞으로 세상은 더 어두워질 것이라고 성경에 예언하고 있다. 내가 언젠가 요한계시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쭉 읽어보니까, 두 가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는 뒤로 갈수록 악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도 점점 강해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악은 악대로 강해질 것이고, 하나님이 교회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은 영광대로 강해질 것이다. 정확하게 오늘날 그대로 되고 있다. 앞으로도 그대로 될 것이다. 세상은 점점 악이 심해져 간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 유럽 같은 경우는 post Christian Europe 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후 기독교 시대, 기독교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다. 그만큼 악이 성행하고 있다. 유럽의 대부분이 인구의 2% 이하만 주일날 교회에 나간다고 한다. 우리가 알기는 그 나라들이 공식적으로는 기독교 국가라는 나라들이다. 최근에 어떤 나라는 그 나라의 국교가 루터교인 것을 취소했다.
내가 80년대 독일의 뮌헨에 5개월 정도 있었던 적이 있다. 거기에도 주일날 놀러가는 사람은 많은데, 성경책 들고 교회 가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어쩌다 한명 볼까 말까할 정도였다. 뮌헨은 독일에서 두세 번째 가는 큰 도시인데도 주일날 성경책 들고 교회 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폴란드는 열명 중에 세 명은 공식적으로 사술을 행한다고 한다. 그냥 가끔 찾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사술을 행하는 자들이다. 덴마크는 얼마나 세속화되었느냐면 음란서적의 천국이 덴마크라고 한다. 거기에 온갖 사술이 그야말로 팽배해 있다. 그래서 유럽 같은 경우, 후 기독교시대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영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데, 요즘 영국 국민의 10%가 주일날 교회에 간다. 그만큼 심각하다.
영국에서 어떤 분이 친구하고 밤중에 집회를 가는데 도로에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쫙 나와 있어서 저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어보니까 지금 자기의 신들에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사단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 저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왔냐고 하니까. 그들은 특별히 어디 멀리서 온 사람들이 아니고 다 자기 동네에 사는 아는 이웃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점점 퇴락하고 있는 반면에 악은 점점 강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멀지 않았다. 교회나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데, 우리가 언제까지 목사는 양복을 입어야 한다 안입어도 된다 하는 것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지 안타깝다. 우리가 이제는 좀 눈을 떠야 된다. 언제까지 종교적인 모양에 신경을 쓰고 있을 것인가. 강대상은 뭘로 하고, 의자 색깔은 무슨 색깔로 하고, 가운은 무슨 색깔로 입어야 되고, 강단 위에 십자가는 달아야 되나 안달아야 되나 하는 것에 신경을 써야 되는지. 이런 것들은 다 유럽에서 시작해서 우리에게 왔는데, 지금 유럽의 기독교가 다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님 시대에는 지금 문제 삼는 것들이 있지도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본질이 중요하다.
피터 왜그너 박사가 쓴 책 내용 중에 있는 얘기다. 한번은 그분이 비행기를 탔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기도를 하길래 너무나 기뻐서 예수 믿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무슨 기도를 했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사단교회에 다니는 사람인데 그 지역에 있는 목사들에게 사단이 역사해서 그 가정들이 파탄되기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했다. 정말 장난이 아니다. 이런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좀 깨어나길 바라고, 그리고 깨어있으시기 바란다. 지금은 깰 때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전례없이 강한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교회 가운데 부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방문하시고,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시겠다고, 이사야 60장과 요한계시록에 말씀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 방문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우리 중심이 하나님의 올바른 관점위에 서서 주님을 섬기게 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그러한 삶의 자리로 여러분을 초청하신 것이다. 그리고 영적전쟁의 승리는 어떤 장소나 방법에 있지 않고,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있고,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