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
1.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곧 회개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사데와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색만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명색만 가진 까닭에 그리스도로부터 책망과 버리시겠다는 경고를 받았다.(계 3:14-16) 오늘날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 죄에서 떠나지 않는(딤후 2:19),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하는(딛 1:16)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참으로 회개한 사람들로 인정하시지 않는다. 여전히 죄 안에서 살면서 회개했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도 행악자들로 판단받아 배척되는 것을 본다.(마 7:22-23)
2. 세례라는 그리스도의 뺏지를 다는 것이 곧 회개는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마술사 시몬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았다. 만일 회개나 중생이 세례와 동일한 것이라면, 이것은 마태복음 7:13-14절이나 그 외의 많은 말씀들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여”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청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다”는 말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마 22:14) 이 주장이 옳다면 제자들처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하는 대신에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이까?”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세례만 받으면 간음을 한 사람이든, 욕하는 사람이든, 시기하는 사람이든, 주정뱅이든,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지 않겠는가!(고전 5:11, 6:9-10)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무엇을 받았든지 혹은 받은 체 했든지 간에 그 뒤로 경건의 능력이 없어 무지하거나 세속적이거나 형식적일 경우에는 ‘반드시 거듭나야 하고’(요 3:7)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한마디로 거룩하고, 엄격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히 12:14)
3. 회개는 도덕적 의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런 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를 뛰어넘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마 5:20)
4. 회개는 겉으로 경건의 규율을 지킨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경건의 능력 없이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딤후 3:5),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다.(마 6:5) 자주 금식할 수 있다(눅 18:12).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을 낼 수 있다.(사 1:11) 그러면서도 회개와는 무관할 수 있는 것이다. 위선자들도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을 할 수 있다.(고전 13:3)
5. 회개는 조명을 받거나 깨닫거나 혹은 피상적인 변화나 부분적인 개혁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조명을 받은 사람이라도 배도할 수 있다.(히 6:4-6), 벨릭스도 깨닫고 두려워했다.(행 24:25) 헤롯도 이러한 반응을 많이 보였다.(막 6:20) 깨달음으로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것과 회개의 은혜로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죄문제로 양심의 고통을 겪는다. 그런 까닭에 자기 죄를 깨닫는 것을 회개한 것으로 오해하고서 자기들의 상태에 안심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방종하던 생활을 청산했기 때문에, 악한 세상 친구들이 정욕을 끊어버리고서 정신차리고 살기 때문에 이제는 참으로 회개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거룩하게 되는 것과 점잖아지는 것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잊고 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다가 결국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그리스도교에 거의 도달했다가 결국 이르지 못한 사실을 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채찍이 무섭게 후려칠 때에는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읽고 죄짓기를 두려워하지만, 양심의 사자가 잠들면 바로 다시 죄를 짓는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때의 유대인들보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고난이 그치자 하나님을 잊었다. 여러분도 고통스런 죄를 버리고, 세상의 난잡한 행위들을 피한 후일지라도 육체의 본성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살려면 제 말을 들으시오. 왜 스스로를 속이는가? 왜 모래 위에 희망을 쌓으려고 하는가? 그 희망을 산산이 부수는 어려운 일이 여러분 앞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친 채 죽어 지옥에 들어가기보다는 차라리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배우고, 여러분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 희망을 버리는 편이 낫지 않은가? 만일 내가 앞에서 말한 것보다 더 나은 터 위에 희망을 두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양심의 소리를 들으라.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이 회개했음을 변호하겠는가? 성직자 의복을 입은 것으로 변호하겠는가? 교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해다는 것으로 변호하겠는가? 성경의 내용을 안다는 것으로 변호하겠는가? 교양이 있고, 종교적 의무를 잘 이행하며, 사람들과 정직한 거래를 하고,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으로 변호하겠는가? 나는 주님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다. 그런 변호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들이지만, 여러분이 회개했음을 증명해 주지는 못하며, 따라서 여러분이 구원을 얻는 데에도 충분하지 못하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지체하지 말고 철저히 돌아서기로 결단하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살피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사역을 마치실 때까지 쉬지 마시오. 여러분은 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버려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죄 짓기를 그만두고 회개하고 돌아서시오. 그리스도께 돌아가 용서와 새롭게 되는 은혜를 구하시오. 여러분을 그분께 드리고 그분과 함께 거룩한 생활을 하시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을 뵐 길이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경고를 귀담아 들으시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시오. 근신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사시오. 여러분의 손을 씻으시오. 둘로 갈라진 여러분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오. 행악을 버리고 선행을 배우시오.(잠 1:23, 9:6, 사 1:16-17, 딛 2:12, 약 4:8) 그러나 이전의 생활을 계속하면 여러분은 반드시 죽을 것이오.
(조셉 얼라인의 "회개의 참된 의미"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