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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주여 , 주여" 하면서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2024-11-16 23:48
작성자 Level 10

"주여 , 주여" 하면서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 -존 비비어

 

우리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롬6:22)를 보고 참된 신자인지 아닌지 안다. 예수님도 그 점을 분명히 하셨다. "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0-21) 이것을 요즘 말로 풀어 쓰면 이렇게 된다.

 

" 너희는 누가 신자이고 누가 아닌지 그의 고백을 보아서가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에 대한 복종을 보아 알 것이다. "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이 내 주님이시다' 라고 말한다고 해서 누구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만 들어간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셨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이 말로 요즘 말로 바꿔 보면 이렇다. "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주로 고백하며 영접 기도를 드릴 것이다.

 

그중에는 스스로 '복음'으로 자처할 자들도 많다. 그렇다, 심지어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낸 자들도 그날 실상을 깨닫고 경악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줄 알겠지만 나한테 이 말밖에 듣지 못할 것이다.

 

' 내 아버지의 뜻에 순종치 않는 너희여, 내게서 떠나가라."

 

이것은 내 설명이나 내 말이 아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천국 입성을 거부당한다고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그렇다,  그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 자들도 거부당할 것이다 !

 

일부 주석가들은, 여기서 예수님이 가리키는 자들은 그분을 영접한 적이 없는 자들일 것이라는 이론을 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해석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고백한 적이 없는 자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초자연적 일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도했던 자들에 대한 기사가 사도행전에 나온다.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악귀 들린 자들을 향해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 속에 들어 있던 악귀가 대답했다.  "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행19:15-16)

  

1980년대 말, 나는 기도 중에 섬뜩한 영적 환상을 받았다.

너무 많아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허다한 무리가 보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큰 무리였다.

그들은 천국 문 앞에 모여 "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 는 주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입성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들려온 주님의 말씀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였다.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 예수께서 그들을 도부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들은 어떻게 그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할 수 있었는가? 대답은,  이 사람들이 단지 구원의 이득을 위해 예수님 편에 섰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처럼 그들도 구원받으려고 그분을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데는 이르지 못한다.  그분의 공급을 받는 선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그분을 구한다.

그들의 섬김의 동기는 사랑이 아니라 사욕이다.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 안다' 는 단어는 헬라어로 기노스코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남녀간의 육체 관계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는데(마1:25)  친밀함을 대변하는 말이다.  예수님 말씀은 사실상 이런 것이다.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친밀하게 알지 못하니. "  모세는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았으나 이스라엘은 자기들 삶 속에 행하신 기적으로만 그분을 알았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다.

 

고린도전서 8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여기서도 '안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기노스코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자들을 친밀하게 아신다.  그들은 그분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다(요15"13)  그렇게 하는 자들만 그분 말씀을 지킬 수 있다.  예수님도 그 진리를 지적하신다.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요14:24)

 

예수님을 사랑하는 참 증거는 말이 아니라 삶이다.

 

요한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미혹된 자요]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아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3-5)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쫓았고 그분을 사랑하는 듯 보였다.

유다는 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곁에 남았고, 다른 제자들이 떠날 때도 떠나지 않았다.  (요6:66)그는 귀신을 쫓아냈고 병자를 고쳤고 복음을 전파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돼 있다.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눅9:1-2)  .열한 제자라고 하지 않았다. 유다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유다의 동기는 처음부터 옳지 않았다. 그는 이기적 삶을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 내가 ...[여차여차히 할 테니 내게]얼마나 주려느냐" (마26:15) 는 말에 그의 성품이 잘 나타난다.

그는 이득을 얻으려고 거짓말하였고 (마25:25), 예수님 사역을 위한 돈 궤에서 돈을 꺼내 착복했다. (요12: 4-6) 불명예스런 일은 그 외에도 많다.  그는 3년 반을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서도 그분을 전혀 몰랐다!  오늘날에도 유다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사역을 위해 희생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성령의 은사에 따라 봉사하지만 그분을 친밀히 알지 못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는 이기적 동기에서 싹튼 것이다.

 

예수님은 물으신다.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눅6:46)  여기 '주'라는 말은 헬라어 쿠리오스 에서 기원한 것이다.

 

스트롱 헬라어 사전에는 이 말이 "권세 높은 자 또는 상전" 으로 풀이돼 있다.

예수님 말씀은, 많은 이들이 자신을 '주'라 고백하지만 사실상 자신은 그들의 최고 권세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의 삶이 그 고백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 마음의 욕심과 상충되지 않을 때만 순종한다. 하나님의 뜻이 자기 욕심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면 그들은 자기 길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

 

사역의 성공을 순전히 숫자로 측정할 때가 많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 제단을 '회심자' 로 채우고 교회를 '교인' 으로 채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만 전하고 주님으로는 전하지 않는다.  그 밑바닥에 깔린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예수께 와 구원과 평안과 사랑과 기쁨과 형통과 성공과 건강과 그 이상을 얻으라!"  물론 예수님은 이 모든 약속의 성취다.  그러나 혜택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순전한 복음은 급한 인생 문제의 해답과 그 뒤의 천국 보장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이런 식의 설교는 죄인들을 홀린 뿐이다.  그들은 회개 없이 하나님께 나오라는 메시지를 듣는다.

"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라. 그분이 당신에게 사랑과 평안과 기쁨을 주실 것이다.!  그렇게 '회심자'를 얻기 위해 우리는 회개를 뒷전으로 밀어 놓는다.  회심자들이 교회에 들어오지만 그들은 어떤 부류인가?

 

예수님은 당대의 사역자들에게 도전하셨다.

 

"너희는 교인[회심자]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회심자를 만들기는 쉽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쫓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인가, 약속인가?  우리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의 차이을 이미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구원하기 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4-35)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원하기만' 해도 잃는다.  그러나 그분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기 원하면"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내 목숨을 잃기 '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님은 선한 의도를 보시지 않는다.

어느 부자 청년은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 그 앞에 무릎 끊고 앉아 영생을 갈구했다.  그러나 감정적 갈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님은 그에게 "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라고 말씀하셨다.(막10:17-22참조) .

 

부자 청년은 십자가의 대가를 깨닫고는 떠나갔다.  적어도 그의 정직은 높이 살 만하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도 제 삶을 제 맘대로 주관할수만 있다면 기꺼이 구원의 혜택을 받아들일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많은 교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정직하다. 대가를 치를 마음이 없는 것이다. 반면 , 미혹된 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주님' 이라 부르며 그분의 주재권에 복종한다고 고백하지만 실살은 복종하지 않는다.

 

당신도 이제 예수님이 정하시는 은혜와 우리가 믿어 온 은혜의 차이를 보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은혜 메시지는 이렇게 예찬할 때가 많다.  " 예수를 믿고 영접 기도를 드리고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라.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  자아와 세상을 부인하라는 얘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그렇게 해서 일단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거룩한 삶을 위해 은혜가 가져다 주는 능력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회심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 아무리 불순종하고 거룩하지 않게 살아도 하나님의 백지 은혜로 다 덮어질 줄로 생각한다.  우리 교회들에 하나님의 불과 능력이 없는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을까?

 

당신이 이 메시지를 전달자의 마음 그대로 들었으면 좋겠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며, 그들의 영혼이 잘됨같이 그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

 

따라서 나는 그분의 진리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교육과 교리가 개인의 신념과 삶을 형성한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의 불이 없어 미지근한 상태에 젖어 든 수많은 교인들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미어진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4:16) 고 명했다.  우리는 이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왜곡된 진리가 옳은 것 같고 심지어 우리 이성의 감각에 와 닿을 수도 있으나 실은 우리를 미혹으로 이끈다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는 우리를 먹이고 세운다.

바른 생각과 틀린 생각을 분별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  왜곡된 진리를 따르면 우리는 실격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에 착념하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다.그래야 말씀을 바로 다룰 수 있다.

 

 

  존 비비어의 거룩한 열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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