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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신앙고백을 하는데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2025-09-05 00:56
작성자 Level 10

신앙고백을 하는데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원인

 

질문 :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유사 그리스도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답 : 그 결정적인 이유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신의 신실한 상태를 스스로 속이기 때문

그들은 자신의 상태를 잘못 판단합니다. 사실은 악하고 위태로운데도 선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진노의 그릇으로 생각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9:22)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받은 은혜보다는 자신의 죄를 더 바라보고, 자신의 믿음보다는 자신의 타락을 더 바라보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보다는 내재하는 정욕을 더욱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매우 선한데도 매우 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신부는 “저는 검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는,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자신의 죄보다는 자신의 행위로 생명책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장부에는 무뢰한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자신을 속이는 일은 아주 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는 이방인에 불과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얻게 될 이익만 생각하며 자신을 높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8:23) 라는 말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잠13:7)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계3:17)라고 말씀 한 것처럼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도다’라고 한 말씀처럼 자신의 상태가 좋은 줄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얼마나 악한지를 그들은 자신들을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들이 가련하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실수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1) 거짓된 마음으로 스스로를 기만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자연인의 마음의 절망적인 기만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렘17:9) 라고 했는데, 여기서 ‘거짓되다’의 히브리어는 야곱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속인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에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 하나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 이니 이다”(창27:36)

 

여러분은 혀의 기만에 대해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富)의 속이는 것과 미(美)의 속이는 것과 친구의 속이는 것에 대해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마음이 더욱 거짓됩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기만에 대해서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사탄보다 더 거짓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사탄은 결코 사람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상태가 좋다고 가정하는 것은 거짓된 마음의 기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의 선함을 얼마나 자랑하는 지요! “하나님 다른 사람들처럼 가식과 허례를 행하지 않고 최상의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솔로몬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 니라”(잠28:26)

지혜로운 사람이 돈을 찢어진 지갑에 두겠습니까? 그가 속임수를 신뢰하겠습니까? 여기에 훌륭한 규칙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속고 말았습니다.

 

2) 교만한 마음으로 스스로 의로운 줄 압니다.

이런 실수는 자만심에서 옵니다. 자만심은 모든 자연인에게도 있고, 아담이 죄를 범할 때도 있었고, 모든 아담의 후손에게도 있습니다. 자만심은 근본적인 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적인 사람들은 지나치게 의롭습니다.

이를 두고 오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자의 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식자의 교만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모든 육적인 사람은 지나치게 의롭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의, 즉 그리스도의 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의가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추함보다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보되 얼룩은 보지 않습니다. 가식적인 의를 보되 자신의 비참은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은혜의 작용입니다.’ 교만한 눈은 위를 보지만 겸손한 눈은 아래를 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신자의 모토(motto)입니다. “나는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죄인 중에 큰 자라.” 그러나 육적인 사람의 모토는 이렇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3) 일반 은혜를 특별 은혜로 착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 대신 일반 은총으로 자신을 속입니다. 둘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위조화폐를 진짜 화폐로 착각하는 것처럼, 마치 위조지폐와 같습니다. 일반 은혜를 구원하는 은혜로 오해합니다.

 

사울은 귀신이 사무엘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신을 사무엘로 착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이 일반 은총이 구원의 은혜를 닮았기 때문에 일반 은총을 택합니다.

 

사람이 초자연적인 역사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구원의 은혜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일반 은혜는 본성을 부추기지만 특별 은혜는 본성을 새롭게 합니다. 성령의 모든 구원하는 역사는 초자연적이지만, 성령의 모든 초자연적인 역사가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역사 대신 초자연적인 작용을 취하여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4) 참된 회심보다는 외적개혁에 머뭅니다.

많은 사람은 회심의 사역 대신 신앙고백을, 내적인 거듭남의 참된 표지보다는 외적인 개혁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컵의 겉을 씻는 것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컵 전체가 깨끗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면서 경건이 모양만 취함으로써 영원한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5)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은 자신이 처한 진실한 상태와 조건을 발견하기 위하여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의 율법을 통렬하게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족하면 은혜의 역사가 부족한 가운데 있을 것이고, 자신에 대해 실제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 사도가 자신에 대해 알려주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참고)

바울은 자신에게 말씀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대하여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진술입니다.

 

첫째, 여기 율법이 없을 때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도다” 바울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지식의 모양’ 율법의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율법을 가지지 못했을 때는‘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마음과 양심에 죄를 각성시키고 의식하게 하며 분별하게 하는 율법의 능력과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경우에 처해 있는 동안 자신의 상태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의 선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살았더니’라는 구절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여기 율법이 있었을 때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상태와는 대조적입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계명이 이르매”는 주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 능력으로 임했을 때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의 양심에 유효적으로 좌정했을 때를 의미합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는 말씀 앞에서 그가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와 자기 의의 추함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나의 희망이 그쳤고 나의 확신이 무너졌도다. 전에 내가 살았다고 생각할 때에는 내 죄가 죽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의 양심을 깨우치자 나의 죄가 살아나 강력해지고 나 자신은 죽고 비참해졌도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유사 그리스도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실상 자신이 선하지 않은데 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실수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다섯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 거짓된 마음

② 교만한 마음

③ 일반 은혜를 특별 은혜로 착각함

④ 참된 회심보다는 외적 개혁에 머묾

⑤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적용하지 않음

 

2. 경건의 모양만 갖추라는 사탄의 유혹 때문

사탄은 죄인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게 할 수 없다면, 경건한 모양만 갖추도록 교활하게 설득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정욕에 빠져 천국을 무시하도록 유혹할 수 없다면, 천국에 이르기에 부족할 만큼만 신앙고백을 하도록 유혹합니다. 어떤 죄에서 떠나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그대로 행하게 합니다. 어떤 신앙적인 일은 행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나머지는 무시하게 합니다.

 

사탄은 그 영혼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버리기 보다는 그 영혼이 신앙을 고백하는데 까지는 양보를 합니다. 그리고 회심을 제외하고 즉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 응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행하는 데는 동의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결국 지옥에 이르게 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이 어느 갈래가 될지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3. 세속적이고 육적인 방법 때문

세속적이고 육적인 방법은 많은 사람에게 큰 장애가 됩니다. 그런 방법은 흔히 경건과 배치됩니다. 예후는 혹시라도 왕국에 해가 될까봐 금송아지 단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한 열심은 수단과 방법을 가볍게 여깁니다.

 

 

<열왕기하>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 하였더라”(왕하10:28-29)

 

정직한 방법은 신앙에 유익이 되지만, 육적인 방법은 신앙에 해가 됩니다. 우리는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합니다. 그러므로 또한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경건의 수단이 말씀을 벗어나면 안정성을 잃습니다. 반대로 수단에 경건이 결여되면 성실성과 진실성을 잃습니다. 수단 없는 경건은 너무 단순하여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건 없는 수단은 너무 교활하여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신중하며 정교하고 지혜롭고 주의 깊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거룩함은 성실함과 연계되어야 합니다.

 

다시 해안에 안착하기 전에 폭풍에 휘말리지 않도록 육지를 볼 수 있는 정도로 신앙의 깊이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저주받은 지혜입니다.

 

4. 내재하는 정욕이 진보에 한계를 긋기 때문

마음에 내재하는 정욕이 그리스도께 진심으로 응답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유사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까지는 오지 않습니다. 한 젊은이가 영생을 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고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오직 한 계명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 정도의 계명은 봐 주시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잔혹하실까요? 그가 그렇게 높은 높까지 이르렀는데 하나님께서도 한계를 조금 낮추시지 않을까요?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까? 하나님은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천국에 값 싸게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천국을 위해 아무 것도 내놓지 않을 것이므로 천국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면, ‘진주의 값’으로 모든 것을 내어 놓지 않는다면, 그는 흥정도 해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에 까지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 멸망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멸망하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벌거벗은 그리스도에 벌거벗은 죄인이요, 상하고 찢기신 그리스도에는 상하고 찢긴 죄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입니다.

 

대부분의 형식적인 신앙고백자들은 두 개의 똑같은 자석 사이에 있는 쇠붙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당기시면 하나님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잡아끌면 세상 쪽으로 끌립니다. 그득은 양자 사이에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지도 않지만 세상도 떠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정욕과 아끼는 것과 모든 것을 사랑하는 죄들을 내버려야 한다면, 데마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4:10)

 

내 형제들이여,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유사 그리스도인은 되지만 더 나아가지 못하는 큰 이유입니다. 한쪽은 정욕을 사랑합니다. 또 한쪽은 그것을 방해합니다. 신앙고백을 한 후에 정욕과 그리스도는 영원히 갈라집니다. 그들은 잘되어 갑니다. 그러나 결국 부족하여 영원히 멸망을 당합니다.

 

-매튜 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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