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그 질기고 깊은 뿌리에 관하여 AD 4세기경, 기독교계는 신학적 깊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았던 진리가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라지게 되었을 만큼 로마의 신화와 혼합된 것이다. 교회는 여러 차례 회의를 통해 진리를 다시 정립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만큼 콘스탄틴 이후 이교사상이 잠식되어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혼돈 속에서 한 사람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이 어거스틴이다. 그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으며,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중의 상당 부분이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수립되었다. 슬픈 사실은 그의 가르침과 신학은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교회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AD 354년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부친은 마니교도였다. 마니교는 3세기경 마니라는 사람에 의해서 창설되었는데 이 종교는 빛과 어두움(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하였다. 즉, 철저한 이원론적 개념과 결정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구원론이 예정설(결정론)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으며 1,000년 후 어거스틴의 사상을 부활시킨 칼빈이 결정론을 말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20세가 될 무렵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신이 어렸을 때 받았던 이교도적 사상이라는 집을 버린 것이 아니다. 그의 신학은 바로 그 마니교의 사상 위에 건축 된 기독교였다. 대부분의 혼합주의가 그렇듯이 융화되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전 것을 완전히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철저히 버리지 않고서는 순수한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그 결과 중세 교회 안에서 형성된 수많은 신학적 오류들은 거의 모두 어거스틴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마니교의 이원론적 결정론 사상에 물든 어거스틴은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해서 선과 악 중 어떤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도무지 읽어낼 수 없었다.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만 이해했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웠던 것이다. 흔히 사람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본다고 한다. 어쩌면 이보다 더해서 억지로 비틀어 왜곡시켜서라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사상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예정론이다. 어거스틴은 누가 구원을 얻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며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대해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논리적으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게 된다’는 개념(once saved, always saved)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거짓 안도감에 도취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죄 된 생활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 받았다는 깊은 자기-기만 속에 빠지게 된다. 예정론은 복음을 전파하는 면에 있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모든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다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궁색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성경은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은 자신의 죄와 결정으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오류는 죄 된 생활을 살면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여 죄에 대한 승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16세기 초에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개혁자들이 교회의 부패와 오류에 대하여 대항하였지만, 천 년에 걸쳐 뿌리 깊이 박혀있던 오류의 근원을 송두리째 뽑아내지 못했다. 이미 어거스틴의 이론은 개혁자 자신들도 모를 정도로 그들 의식의 중심부까지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루터가 죽고 나서 그의 동료 개혁자인 멜랑톤이 루터 교회를 예정론에서 끌어냈지만, 장로교회를 수립한 요한 칼빈이나 요한 낙스는 예정론을 받아들였다. 그 후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예정론이 거절되고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오류로서 지적되었지만, 여전히 현대 기독교 안에 이러한 가르침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오류들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왜곡시켜가면서까지 믿으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