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잃는 자들에게 나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위에서 언급한 것들(개인적 완성, 하나님, 하나님을 향한 즐거운 애착, 천사들 및 영화롭게 된 영혼들과의 복 된 공동체)이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오는 세상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없이는 결코 잘 지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고려하게 함으로써 그 때에 가서 그들이 천국을 잃는 것이 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이 되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1) 불신자들은 실제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때가 되면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귀한 것을 잃었는지 분명히 알게 된다.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뛰어남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놓쳐도 탄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룩한 일들과 거룩한 공동체의 귀중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잃어도 상관없다. 보석을 단지 돌로 여기던 사람은 그 보석을 잃어 버려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잃어버린 것이 보석이었다는 것을 알 때는 탄식하게 된다. 저주를 받는 자들의 이해력은 거룩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착각에서 벗어나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현재 그들은 내세를 위해 수고하는 것보다 현재의 영광과 재물과 쾌락과 건강 등, 이 세상의 삶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읽고 듣기만 하던 비극적인 일이 자신들에게 직접 임하게 되면 그들은 비참을 체험하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된다. 그들은 바다에 빠져 보기 전에는 자신들이 익사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으며, 불 속에 던져지기 전에는 자기들이 불에 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재난을 겪게 되면 믿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심판의 날이 오면 그들은 실제 경험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시하게 만들고 주께 드리는 예배를 혐오하게 만들며 주의 백성을 비방하게 만들던 그들의 생각들이 다 틀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끽소리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이 되면 그들은 바로 알게 되는 것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슬픔은 더욱 커질 것이다. 오, 가련한 영혼들이여! 그들이 백치와 짐승들처럼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그 때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텐데. 그들이 지옥에서 자세히 알게 되지 않고 그들이 땅에 있을 때 아는 만큼만 알고 있다면 좀 더 덜 괴로울 텐데. 그들이 무엇을 놓쳤는지 모른다면 그 놓친 것 때문에 덜 섭섭할 텐데. 또한 천국과 같은 장소가 실제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좀 나을 텐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야 실제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들은 지식이 그들의 비참을 막을 수 있는 때는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책을 읽거나 연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이 되면 그들이 원하든 말든 실제를 알게 되면서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현재 이 땅에서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죽음의 꿈을 꾸며 잠들어 있다. 그러나 죽음이 그들을 깨울 때는 그들의 착각이 순식간에 드러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지만 저절로 알게 되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2) 더 넓게 인식하게 된다. 그들의 이해는 분명하여지면서 더욱 확장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이 잃은 영광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지 더욱 깊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바르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해력 또한 증가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겪고 죄악의 결과들을 체험하면서 땅에서 그러한 비참에 대해 듣기만 하던 때와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비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삶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와 비교하여 이제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사람에게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예민하게 느껴지겠는가! 실재하는 영원한 축복을 놓쳤다는 사실을 알 때 저주 받은 자는 자기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큰 그릇이 조개껍질보다 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듯이 더 확장된 이해력은 과거 이 땅에서 이해력이 적을 때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 3) 그들의 양심이 진실하고 깊게 적용될 것이다. 그들의 양심 또한 더 진실해지고 깊어지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때 그들은 “오, 내가 얼마나 귀한 것을 잃었던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비참에 떨어졌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양심의 적용이 부족할수록 마음의 불편은 덜하다. 그러나 양심이 예민하여질수록 마음의 고통은 심해진다. 그들은 이 땅에 살 때 이러한 비참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비참의 상태에 처하게 될 줄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설교들을 놓쳤으며 모든 위협과 경고들을 농담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그들에게 가장 쉽고 분명하게 그들이 당하게 될 비참을 알려 주었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주의 사역자가 그들에게 그들이 놓치게 될 영광에 대해, 그리고 그 영광을 놓칠 때 그들이 당할 고통에 대해 말해주면 그들은 그 경고가 자신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악명 높은 다른 죄인들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악한 자에게 그가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과 그가 진노와 정죄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중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거룩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분명히 중생 및 거룩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마치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인양 생각한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보게 되며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람들 중에 자신의 상태를 분명하게 발견하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탄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또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 자신들이 현재 그 상태로 죽는다면 영원히 파멸될 것이라고 인식하는 자가 과연 몇 이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둠의 땅에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때, 그리고 작열하는 불꽃 속에서 신음하는 자신들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존전에서 영원히 쫓겨난 것을 깨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영원히 임하였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탄식 가운데 “오 나의 비참이여, 오 나의 어리석음이여, 오, 이제야 선명하게 알게 된 이 돌이킬 수 없는 무한한 손실이여!”라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4) 그들의 감정은 더 생생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때 그들의 감정은 더욱 생생할 것이며 더 이상 둔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이 땅의 강퍅한 마음들은 천상과 지옥을 사소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들에게 영원한 영광과 영원한 비참을 보여주지만, 그들은 잠이 들어 있기 때문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 하는 우리의 말은 벽에 던진 공처럼 다시 튕겨서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사건들에 대해 말해주지만 그들은 죽은 사람들처럼 반응이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상처를 찾아내지만 그들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천상과 지옥, 그리고 복음에 대해 그들에게 말할 때는 마치 바위에게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청천벽력처럼 그들은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의 감각은 열정적으로 일어나고 감정이 살아나면서 그들은 공포의 두려움과 함께 무한한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얼마나 자신들을 탓하며 꾸짖겠는가! 얼마나 이 땅에서의 자신들의 미친 광기에 대해 분노하겠는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아내의 탄식도,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도 천상을 잃은 그들의 탄식과 슬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오, 버림 받는 피조물의 자책과 자기학대의 분노여! 그들은 가슴을 찢으며 심지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나님의 형벌을 가하는 집행자가 된다!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요인이 자신인 것처럼, 이제는 스스로 수석 집행자들이 되어 자신에게 형을 집행한다. 사탄마저도 그들의 죄악의 직접적 요인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형벌을 받는데 있어서도 자기 죄 값은 자신이 치러야 한다. 그때 그들의 감각과 감정이 돌로 변하여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에 경고로만 듣고 이를 무시하며 지낼 그 때가 실제로 그 경고가 사실로 이루어진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경고하던 설교 시간에 잠을 잤듯이, 이제는 자신들에게 형을 집행하는 그 시간에 잠들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그들의 감각의 둔함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감각은 다시는 둔하여지지 않고 영원히 생생하게 있을 것이다. 5) 그들의 기억은 확장되고 강해질 것이다. 그들의 기억은 지식과 감정처럼 더욱 확장되고 강하여질 것이다. 기억력이 사라진다면 천상을 잃은 기억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기억이 말살된다면 천상을 잃은 그들에게는 큰 자비가 될 텐데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이해력과 양심, 감정과 기억은 다 살아나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준다. 사람들은 영혼의 이러한 기능들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고 하나님과 늘 함께 하며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이러한 기능들에 의해 하나님의 진노를 실감하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고통을 계속 당하게 된다. 그들이 과거에 이 땅에 거할 때 그들은 천상의 삶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기억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아무 할 일도 없고 기억의 기능도 할 일이 없다. 그들이 과거에 이 땅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원한 상태의 교리를 “그들의 집 문설주와 손목과 마음에 써 놓으셨다”(신 6:8-9). 그래서 그들이 그 교리를 마음에 두고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신 6:7) 말하게 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제 그들이 갇힌 지옥에도 그 교리가 여전히 그들 앞에 놓여 있을 것이며 그들이 어디를 보든 그 교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들의 잃은 영광의 위대함을 기억하면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만일 그 영광이 어딘가에 남아 있어서 어떤 수를 써서든 다시 얻을 수 있다면 그 손실은 그들에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잃은 것이 건강이나 부귀나 친구나 생명이라면 별 것 아니었을 것이다. 오! 그 엄청나고 영원한 영광을 영원히 잃었을 때! 그들이 한때 그것을 얻을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그때 그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때 내게도 천국을 얻을 공평한 기회가 있었던 것이었구나. 내가 세상에 있을 때 만일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나도 지금 그 기업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며 저 복된 성도들 가운데 있었을 텐데, 지금 나는 이렇게 저주 받는 악령들과 함께 고통을 받는구나. 주께서 내 앞에 영생과 영원한 죽음을 두었건만 나는 죽음을 선택했으니 이 고통을 당함이 마땅하구나. 내 앞에도 달려가 잡을 상이 놓여 있었건만, 그래서 노력했다면 그 상을 받았을 텐데, 용감히 싸웠다면 승리를 얻어 면류관도 받았을 텐데, 다 놓쳐 버렸구나!” 그들은 자신들도 면류관을 얻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꼭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더욱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도 한때 나를 도우시려는 성령의 강한 역사를 느낀 적이 있었지. 나도 다른 사람에게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들라고 제시한 적도 있었지. 나는 거의 하나님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였었지. 나도 한때 뿌리 깊은 정욕의 유혹으로부터 돌아선 적이 있었지. 오랜 옛 친구들을 버리고 경건한 자들과 함께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을 바꾸어서 내가 붙들었던 것을 버리고 언약을 파기하였다. 나는 거의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뻔 하였지만, 그러한 설득을 발로 차 버렸다. 신실한 목사가 진리를 강조하며 말할 때 도대체 내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오, 내가 지금 천국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거의 천국을 소유하였었는데 다 잃었구나! 계속 주를 따랐다면 지금 성도들과 함께 복된 자리에 있을 텐데!”라고 후회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회를 잃은 것을 기억할 때마다 대단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기회를 놓치며 살았던가. 만일 그 기회들을 활용했다면 지금 행복을 누릴 텐데! 오, 이 비참한 사람아!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에 이 일을 연구해볼 시간이 없었더냐? 영원을 위해 수고할 시간이 그렇게 없었더냐? 먹고 마시고 잘 시간은 있었어도 네 영혼을 구원할 시간은 없었더냐? 흥청망청하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시간은 있었어도 기도할 시간은 없었더냐? 오, 귀중한 시간이여! 그때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시간을 가질 수 없구나. 시간이 너무나 많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었는데, 지금 그 시간은 다 사라지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구나. 오, 다시 딱 일 년만이라도 살 수 있다면 정말 신속하게 회개할 텐데! 간절히 기도할 텐데! 부지런히 주의 음성을 들을 텐데! 내 상태를 철저하게 점검할 텐데! 집중하고 바르게 살아볼 텐데. 그러나 너무 늦었구나. 아아! 너무 늦었구나.” 그들은 주께서 얼마나 자주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권면하였는지를 기억하면서 더 많은 비참을 느낄 것이다. “그 목사가 나로 하여금 이러한 고통들을 피할 수 있게 한 것이로구나. 그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내게 권면했었지! 그러나 나는 그 권면을 농담으로 여겼다. 얼마나 그가 자주 나를 설득하려 했던가! 그럼에도 나는 그의 모든 설득을 묵인해 버렸구나. 그가 얼마나 내 마음을 열려고 애를 썼는지!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죄악 됨을 알고 싶지 않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오, 그때 내가 그리스도께로 진심으로 돌아섰다면 그 목사는 얼마나 기뻤을까! 내 경건한 친구들이 나를 꾸짖었었다. 그들은 내게 나의 고집과 무지가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믿지 않았고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또한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내게 찾아오셔서 권면하셨던가! 성령께서는 얼마나 내가 그를 부인하는 것을 싫어하셔서 내 마음과 씨름 하셨던가! 그리스도께서는 매주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죄인이여, 문을 열라. 네 맘을 구세주께 열라. 그러면 내가 네게 들어가 너와 함께 먹으며 너는 나와 함께 하리라! 왜 지체하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헛된 망상 가운데 거하려느냐?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 행복을 누려야 하지 않느냐? 당장 그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소리치셨다!” 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그렇게 애원하시던 일들이 기억날 때 저주 받은 자들의 마음은 자신을 향해 얼마나 분노하겠는가? “내가 꼭 그리스도의 인내를 업신여겨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천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을 때 내가 꼭 그분의 수고를 헛되게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그분이 오셔서 얼마나 내게 지겨울 정도로 ‘회개하라. 돌아오라’고 외치셨던가! 오, 그분의 인내를 끝까지 무시하였더니 이제 나는 이렇게 거부할 수 없는 무서운 진노를 당하게 되었구나. 주께서 내게 ‘깨끗하여지지 않겠느냐. 언제 깨끗함을 받으려느냐?’ 라고 외치실 때, 내 마음과 내 행동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으니! 이제 나는 ‘이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합니까?’라고 말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구나.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는 답변만 듣게 되는구나. 그래도 아무 할 말이나 따질 것이 없구나!” 더욱이 그들이 지옥의 비참을 얼마나 쉽게 피할 수 있었는지를 기억할 때는 그 기억은 그들에게 가장 뼈아픈 고통이 될 것이다. 그들이 할 일은 산을 옮기거나 나라들을 정복해야 하는 불가능한 일들이 아니었다. 율법의 일획까지라도 완전히 이루어야 하는 일도 아니었으며 모든 행동에서 완전한 공의를 세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어깨에 지우셨던 짐은 “쉽고 가벼운 짐”(마 11:30)이었다. 그 짐은 단지 회개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자신들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었다. 그 짐은 다른 모든 행복을 거절하고 주님을 최고의 선으로 붙잡는 것이었다. 그 짐은 세상과 정욕을 거절하고 그 대신 주의 온유하시고 자비로우신 다스림에 순복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 짐은 내 주관대로 사는 길을 내려놓고 주의 거룩하고 즐거운 길로 걷는 것이었다. 지옥의 고통을 받는 그 가련한 영혼은 “아,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작은 수고마저 하지 않으려 했으니 내가 이 모든 고통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구나! 그 은혜로운 제안을 거절할 때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일까? 나는 주님을 고약한 주인이라고 불렀고 주를 맘껏 섬길 수 있는 순간들을 속박이라고 여겼다. 대신 나는 마귀와 정욕을 섬기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길을 쓸모없는 규칙이라고 판단했을 때 과연 나는 미친 사람보다 수천 배 더 미친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나치게 엄격한 것으로 생각했고 내세를 위해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을 도가 지나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영원히 당하는 이러한 고통에 비교할 때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고통들과 수고들이 뭐 그리 힘들었겠는가? 이제야 천국에만 있을 수 있다면 저 아래에서 무엇을 다 잃는다고 해도 보상이 될 것을 안다.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땅에서의 모든 고통들을 다 잊을 것을 안다. 천국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떤 중대한 일을 내게 맡기셔도, 또한 계속되는 두려움과 슬픔 가운데 살게 하셔도, 혹은 수백 번의 죽음의 고비를 지나게 하셔도, 분명히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았겠는가? 하물며 주께서 하신 부탁이 기껏 ‘믿고 구원을 얻으라. 내 얼굴을 찾으라. 그리하면 네 영혼이 살리라.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영생을 주리라’ 하신 것인데 천국을 놓쳐버렸으니 이 얼마나 후회스러운가! 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은혜로운 제안이었고 가장 쉬운 조건들이었는데! 이 저주 받은 가련한 나는 그러한 제안을 거절하였으니!” 또한 그들이 천국의 복락을 팔아 무엇을 샀는지를 기억할 때 더 고통스런 기억이 될 것이다. 죄를 지을 때의 잠시의 쾌락과 비교하여 그로 인해 잃게 된 천국의 가치를 생각할 때 그 엄청난 불균형한 차이 때문에 깜짝 놀랄 것이다! 육체의 천박한 즐거움과 인간들로부터 잠깐 받는 칭찬들을 생각해 보고 그 다음 영원한 영광을 상고해 보라. “이러한 더러운 쾌락 때문에 내 영혼과 내 하나님, 나의 영원한 복락을 팔아먹었다니!” 이러한 생각이 들 때 그 영혼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게 될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때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탄식할 것이다. “오, 이 비참하고 어리석은 중생아! 이런 더러운 이득을 위해 내 영혼을 팔아먹은 것이더냐! 이 작은 먼지와 더러운 때를 위해 나의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이냐! 가룟 유다처럼 한 푼 때문에 나의 구세주를 판 것이더냐! 나는 단지 천국을 누리는 꿈만 꾸고 있었지 실제로 깨어나 보니 그 꿈은 사라지고 없구나! 이 땅에서 잠깐 맛보던 쾌락은 이제 쓸개즙이 되었고 내 술잔은 구더기로 가득 찼다. 이런 쾌락들이 없어지니 내 즐거움도 함께 끝이 났구나. 이것이 내가 영원한 보화를 팔아먹고 얻은 전부라는 말인가? 나는 도대체 얼마나 정신 나간 거래를 한 것인가! 온 세상을 다 얻는다고 하더라도 내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아아! 나는 온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썩을 것을 위해 나의 천국을 포기하였구나!” 오, 죄인들이 육체의 즐거움에 푹 빠져 헤매고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부유해지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를 궁구하고 있을 때, 분명한 죄인 줄 알면서도 양심을 거슬러 과감하게 죄를 범할 때, 그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만 있다면! 또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멸망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구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 기억은 더 큰 고통을 더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죄를 짓도록 강요를 당했다면 양심으로 인한 분노의 자책은 덜하여질 것이다. 혹은 그들이 멸망하게 된 요인이 다른 사람의 실책 때문이거나 다른 원인이라면 좀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 파멸이 스스로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분노는 더할 것이다. 이 세상 아무도 그들에게 자신의 의지에 거슬려 죄를 짓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이 생각을 하면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찢겨질 것이다. 이 비참한 인간들은 “세상에서도 원수가 충분하도록 많았는데, 이제는 내 자신이 내게 원수란 말인가? 하나님은 마귀와 세상에게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 만큼 그런 큰 능력을 절대 주시지 않으셨다. 그들은 기껏해야 미혹을 했다. 악에 굴복하고 악을 범한 것은 내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내 영혼을 붙들어 내 손을 피로 물들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 자신보다 더 무서운 원수를 나는 보지 못했구나.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에 선으로 대하셨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주님은 내게 계속 자비를 부어주시며 계속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내 마음을 주께로 이끌려고 하셨다. 그렇다. 그분은 부드럽게 나를 책망하셨고 내가 불순종할 때는 불순종의 쓴 열매를 먹게 하심으로써 신음하게 만드셨다. 그러면 나는 대개 감정적으로 주를 섬길 것을 약속했지만, 결코 진심으로 주를 섬기려 한 적은 없었구나”라고 기억을 한다. 이와 같이 죄인들은 그들 자신이 그들의 파멸의 요인이라는 점을 기억하며 자기 자신을 향해 끝없이 마음속에서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였고 마귀를 섬기는 일에 흔쾌히 나섰던 자들이었다. 한 차원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이 저주스런 파멸을 위해 많은 대가와 고생을 치렀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들의 양심의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멸망을 재촉하기 위해 얼마나 큰 수고들을 했던가! 그들은 성령을 대적하였고, 자비의 힘과 심판의 힘,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마저 이기었다! 이성의 힘을 짓누르고 양심을 묵살했다! 이 모든 일을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행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있는 계속적인 위험 속에서도 앞으로 밀고 나갔고 주께서 그들을 당장 먼지로 만드셔서 지옥 불에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모든 악한 수고들을 계속 행하였다. 오, 스스로 저주 받기 위해 그러한 많은 수고를 하다니! 절제하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건강과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잔칫상과 술 취함에 빠져 가난과 부끄러움과 병을 얻었다. 욕심을 버리고 만족을 하면 평안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탐욕과 야망을 가짐으로써 염려와 두려움에 빠지고 또한 건강을 잃을 정도로 뭔가에 몸과 마음을 빼앗겼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수고하는 대신 오히려 멸망을 받기 위해 수고하였다. 화를 내는 것과 복수심과 부러움은 그들 자신을 괴롭히며 그들의 영혼을 지치게 함에도 불구하고, 또한 더러운 행위들은 그들의 몸과 신분과 명성을 망가뜨리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이 모든 악한 일들을 행하며 그 고통스런 결과를 감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얼마나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분노하게 될 것이며 탄식하게 되겠는가? “이 모든 수고와 아픔들이 결국 저주를 위한 것이었던가? 이 저주를 얻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던 것인가? 어찌 나는 저주를 사기 위해 그렇게 힘든 수고를 했단 말인가? 그렇게 많은 수고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멸망을 당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수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명령하셨는데 어찌 나는 그렇게 수고하여 나의 저주를 이루어야 했던 것일까? 만일 내가 지옥을 위해 일한 만큼 천국을 위해 수고했더라면 나는 분명히 천국을 소유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경건이 지루하다고 아우성을 쳤고 내 자아를 부인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소리쳤다. 반면 나는 사탄과 죽음을 향해서는 얼마든지 더 많은 수고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나의 쾌락과 유익과 명예를 사랑했던 만큼 그렇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렇게 주님을 자주 생각하고, 그렇게 수고스러울 정도로 주를 찾았다면, 오, 지금 나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천국을 살 기회가 내 손에 있었을 때 천국을 사기 보다는 저주를 사기 위해 그런 비싼 수고를 했으니, 나는 참으로 지옥의 불꽃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합당하구나!” 오, 하나님께서 독자들을 설득하셔서 이러한 생각들이 ‘지금’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때 가서 지옥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자책하고 자학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그때 가서야 이러한 생각들을 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이러한 생각들을 단지 상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 부자가 고통 가운데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읽어 보라. 하늘의 기쁨이 주로 이성적인 영혼에 의해 이성적인 기능들 안에서 누려지듯이 지옥의 고통 또한 이성적인 영혼에 의해 이성적인 기능들 안에서 체험될 것이다. 그들은 지옥에서 여전히 사람들일 것이며 따라서 사람으로서 느끼고 반응하고 행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