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을 본질로 오인하지 맙시다
불이라는 것은 고대인이나 현대인을 가릴 것 없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는 분명합니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 불을 다룰 줄 알았다는 데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이 불은 고대 종교에서 절대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성물 가운데 하나였으며, 특히 유대교에서는 번제를 위해서 거룩한 불을 회막 안에 항상 두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항상 타오르는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으며, 초기 기독교에서도 불은 중요하게 다루어져 예배로 모일 때마다 제단에 놓인 초에 불을 피우고 나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고대 원시사회부터 불은 추위를 막아주고 짐승들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했으며, 조리에 이용함으로써 먹기 어려운 것들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더러운 것을 태워 깨끗하게 하는 정화의 역할을 함으로써 종교적으로 정결케 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불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살라 바치는 제사인 번제는 제물을 태움으로써 정결해지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 속죄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안에서도 역시 불로 태움으로써 정결해진다는 믿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주로 목양 생활을 해야 했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불은 그들을 모으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밤이 되면 추워지는 사막기후의 특성으로 인해서 목자들은 불을 피워야 했고, 그 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나 짐승들이 모여듭니다. 따라서 불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은 빛이며 생명이며, 그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삶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600년경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하는 종교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종교를 배화교(拜火敎)라고 부르는데 그 창시자인 짜라투스트라는 실존인물인지 신화적인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주장이 갈립니다. 고대 이란 지방에서 숭배해온 신의 이름인 ‘지오쑤드라’에서 따온 것이며, 이는 고대 수메르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를 실존인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가 희박한 가운데 그의 글로 인정하고 있는 ‘가타스’(Gathas)라는 송가와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보이는 아베스타어 경전 등으로 인해서 그를 실존으로 보기도 합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창조신이라로 불리는 ‘아후라 마즈다’의 계시를 받은 뒤에 불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여 단순히 신비한 것으로만이 아니라 우주의 근원과 우주적인 에너지를 나타내는 초월적인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윤리적 신학적인 의미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의 속성인 태우는 것을 정화의 의미로 보아 윤리적 차원으로 확대했고, 악을 행한 사람을 징벌(태움)함으로써 사후에 다시 정결하게 만드는 도구로 인식했습니다. 불은 또한 영적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수단으로도 인정했습니다(나 종근: 『조로아스터』시공사간, 2000).
짜라투스트라는 불 자체가 아니라 불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서 창조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본성을 들어내는 것으로 받아들여 사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기도할 때 반드시 불을 피울 정도로 불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 자체가 소중하다고 언급한 부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로아스터교가 불을 숭배하는 종교로 인정되어 배화교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은 짜라투스트라 이후에 이란에서 이 종교를 한 때 국교로 인정해서 장려한 때문입니다.
종교체계는 최초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인해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발전하여 상징들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원래의 의미 이외에 다른 내용들이 첨가되는 것입니다. 세대가 지나면서 가치관도 달라지고 문화 구조도 바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기독교에서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성화들은 6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교부들은 주님이 그 어떤 형상도 세우지 말라고 가르친 명령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에서 상징으로 사용하는 불상 역시 고대 모헨조다로 지역인 오늘날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수투파’라는 원형 기둥이 발굴 되었는데 이는 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세운 상징물입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단순한 기둥에 불과한 이 수투파로 시작된 것이 이후에 여러 가지 문양을 첨가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불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형상 없이는 사물을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약점 때문이며, 어딘가에 초점을 두되 보이는 형상으로 하지 않으면 구체적인 몰입이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 형상을 만드는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대상을 이론적으로 인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적 능력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인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형상을 통해서 존재를 파악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형상을 거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5세기 이후 다양한 상징들을 교회 안에 등장시키며, 그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일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 있는 십자가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 근래에 들어오면서 예배당 안에서 십자가를 철거하기 시작했는데 강단이 포퍼먼스 위주로 바뀌는 이른 바 열린 예배를 시도하면서 십자가가 있던 자리에 스크린을 설치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면서 자연적으로 제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 약하고 인식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으면 형상을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약점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상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 조로아스터교가 이후에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로 발전하게 되는 것과 수투파라는 단순한 기둥을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모여 예불활동을 했던 불교가 불상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서 종교활동을 하는 단계로 발전하였으며, 기독교가 십자가를 구심점으로 모여 모든 활동을 했던 중세의 가톨릭에서 보듯이 상징이 상징을 넘어서 자칫 본질을 대치하는 모순을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형상은 본질을 설명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그 수단이 본질로 대치되고 마는 어리석음에 휘말리고 마는 것입니다. 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그 자체입니다. 떨기나무에서 불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는 오늘날 우리 가운데 “성령의 불”로 임하십니다. 오순절 날에 마가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할 때 “불의 혀”같은 모습으로 우리 눈에 비추어졌고, 모세에게는 불기둥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지키고 인도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불은 곧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본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인위적인 그런 불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될 수 있지만 결코 본질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6세기 불을 통해서 초월자의 본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짜라투스트라의 기대와는 달리 결국 불을 숭배하는 종교로 전락하고 만 배화교처럼 우리 역시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상징에 매달리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상징에 집착해서 그것을 실체로 오인하는 행위인데 특히 종말론에 심취해서 그릇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일부 극단적 종말론자들이 그 예입니다. 성경 묵시서에 기록된 다양한 상징들에 집착한 나머지 상징을 위한 해석을 주장하며 상징을 위한 상징을 만들어냅니다. 이들은 마치 ‘신화탐구자들’처럼 끊임없이 상징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 지식이 부족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다른 성경은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로지 묵시서들만 다룰 뿐입니다. 구약의 다니엘서와 에스겔서, 신약의 계시록 그것만이 이들에게 중요할 뿐입니다.
상징은 우리가 본질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이 상징이 자칫 우리에게 본질을 망각하게 할 수도 있음을 역사가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는 상징들의 홍수 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과제 앞에 섰습니다. 꿈과 환상은 마지막 시대에 대표적인 신인식 수단으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약점인 상징을 본질로 오인하는 어리석음에 휘말리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내사와 투사라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으로 이미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선택된 상징이 세월이 지나면 결국에는 그 본질을 대치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이 이미 우리들에게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우리 기독교도 500년이 지난 지금 그런 징후들이 짙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5세기 기독교가 다양한 상징들을 교회 안에 들여오기 시작할 그 무렵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조로아스터교로 인해서 우리는 불을 숭배하는 위험에서 벗어났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