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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어서 속히 성숙합시다2024-07-22 22:21
작성자 Level 10

어서 속히 성숙합시다

 

 인생에는 여러 번의 변화를 거치게 됩니다. 크게 나누어보면, 철모르고 모든 것을 부모에게만 의존하여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고 오히려 어른들이 더 좋아하는 유아기가 있습니다. 이 시기를 벗어나면 흔히 미운 오리새끼로 비유하기도 하는 아동기가 옵니다. 이 시기에는 어설프지만 무언가 자기 스스로 해보고 부모를 흉내 내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어설프기가 짝이 없어서 실수를 많이 하고 문제를 만들어 부모를 귀찮게 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어서 이 시기가 지나갔으면 하고 바라지만 아동은 철이 없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날마다 즐겁기만 합니다.

이 철없는 아동기가 지나면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주제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울해지기고 하고 반항해보기도 하는 질풍노도의 계절 청소년기가 옵니다. 사춘기라고도 부르는 이 시기는 아동기에 자녀들이 부모를 귀찮게 하던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성인이 아니면서도 성인 같고, 아이가 아니면서도 아이 같은 이 시기의 아이들을 사회학자들은 ‘주변인’(boundary ma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소속인 셈이지요.

이 혼란스런 기간 동안 서서히 정체성이 만들어지면서 자신이 어떻게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아동기는 짧아지는 반면에 청소년기는 길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동기를 전기 후기로 나누었던 것을 이제는 단순히 아동기라고 부르고 청소년기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눕니다. 어떤 사람은 이 청소년기가 심지어 30대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혼도 늦게 합니다. 모습은 어른인데,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10대에 머물러있는 ‘어른 아이’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청년 실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는 모두 불안한 발달 상태에 놓여있는 시기입니다. 이 과정을 잘 거치고 나면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인기에는 무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결정력을 청소년기가 지나기 전까지 보모와 교사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것이 제대로 훈련되지 못하면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이미 앞의 글에서 ‘내사’ ‘투사’ 등의 문제에 관해서 설명했듯이 그런 문제가 사회적응을 어렵게 하는 부정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기가 편하게 지내려고 아이가 늘 유아기에만 머물러 있게 한다면 그 부모는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부모 옷자락만 붙잡고 부모가 시키는 것만 하면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집안에서만 놀면서 지낸다면 아이도 불행하고 그렇게 만든 부모도 불행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경우에 아이의 성장과 발달을 위해서 사회가 강제로 아이와 부모를 분리시켜 정신과 치유를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불행한 현상은 사회에서는 찾아보기가 그리 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예는 극단적인 설정이고 유아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아동기 또는 청소년기에 머물도록 부모가 아이들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여 심각한 수준의 ‘내사’가 되어버려 쉬운 표현으로 ‘마마보이’가 되어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과잉보호 때문에 자녀의 성격 형성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마마보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스스로 결정해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부모가 대신 결정해주며, 결혼하게 되면 아내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어야 합니다. 직장을 가지게 되면 상사가 대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맙니다. 이런 서글픈 일들은 아이가 스스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하는 시기인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부모의 지배가 너무 강해서 아이를 위협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아이는 두려움에 부모에게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어 심각하게 내사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른 아이 즉 마마보이는 외아들 외딸이 증가하면서 더욱 더 많아졌고, 이기적인 부모가 많아지면서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 내 딸만 고집하는 부모들 때문에 아이가 부모의 지배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어버려 ‘어른 아이’가 증가하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판단과 결정에 미숙한 성인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서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하는 목회자의 태도를 보면 과잉보호를 하는 어설픈 보모처럼 여겨집니다.

말 잘 듣고 집 안에서만 놀아주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이가 아동기에만 머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런 부모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이런 정도의 심각한 문제를 가진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직 내 교회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담임목사의 설교 외에는 어떤 설교도 들어서는 안 되고, 목사의 허락이 없이는 다른 집회에 참석해서는 안 되며, 특히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기도를 받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며, 목회자의 지시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자녀가 말을 잘 듣는 유아기에만 머물기를 바라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부모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가르침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유아기에 머물고 있는 심각한 내사증을 앓고 있는 환자입니다. 최근에 어떤 가정에서 평생을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온 ‘노예 할아버지’ 사건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온 노인은 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타인에 의해서 구출될 때까지 그는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묶어둔 것도 아닌데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웃 사람들 누구도 그 사람을 구출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노예로 삼아서 학대해온 사람은 그 일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그런 모습을 이웃에서 수도 없이 보아온 이웃 사람들도 그 일이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고 심각한 인권유린이라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런 삶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란 어떤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마침내는 그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순응하는 순치의 기능이 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변화에 적응이 되는 것을 ‘집단적 내사’라고 하며, ‘사회적 순치’라고 부릅니다. 사회적 순치(social domestication)는 독제정권 아래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북한의 경우에 집단적으로 사회적 순치가 일어난 대표적인 예입니다. 극심한 식량난과 사회적 고립을 겪고 있으면서도 그곳 사람들은 그런 조건에 순응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도 그런 구조를 뒤엎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철저한 사회적 통제장치가 마련되었다고 하지만 그런 사회적 장치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회적 순치가 형성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탈북해서 남한에 정착해 살고 있지만 이들이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독일이 통일이 된지도 오래지만 동독 사람들은 아직도 서독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채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집단적 내사의 결과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서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지만 그 대부분을 목회자가 대신하고 있고 그것을 잘 하는 일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방적인 수직적 체계 속에 머물도록 더욱 제도를 강화시킵니다. 수평적 구조가 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직적 구조를 유지합니다. 조직이란 수직적으로 구성되어 상의하달식이어야만 지도자가 그 조직을 통제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군인집단입니다. 철저한 계급으로 명령체계를 만들어서 하급자의 판단과 결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하는 전쟁을 의무로 해야 하는 특수한 성격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의 어떤 조직과도 같지 않습니다. 교회의 수직적 구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만 존재하며, 사람들과의 관계는 수평적입니다. 이런 관계는 보이지 않는 역학관계입니다. 이것을 보이는 구조가 대신하게 되기 때문에 이중적 구조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 구조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런 보이는 구조와 보이지 않는 구조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는 더욱 민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성도 각 사람을 독립적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주어야 하는 의무가 그 어떤 집단보다도 강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는 시기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시켜 독립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성도 각 사람이 홀로서기를 하게 하기 위해서 가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독수리는 자연계에서 강자로 살아남기 위해서 먹이를 떼야 할 시가가 오면 전혀 찢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아올라야 할 시기가 오면 어미는 강제로 둥지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새끼 독수리는 이 과정에서 추락해서 심한 상처를 입고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약하면 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미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독립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직무가 무엇인지를 빠른 기간 안에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는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직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소경일 수밖에 없으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과 같고 등을 지녔으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와 같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히 하고, 목회자에게 철저히 순응적인 사람을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인정해주었습니다. 무언가 스스로 독립적으로 하려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그릇된 신앙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하려고 하는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집단적 순치가 일어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부여한 일을 위해서 결단하고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골치 아픈 사람이라고 배척하고 따돌림으로써 교회 안에서는 어른 아이만 가득해졌습니다.

교회를 벗어나면 곧 죽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마치 가정을 벗어나고 부모의 품을 떠나면 죽는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치고 배운 정신적인 질병을 가진 가족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 부모와 자녀는 자기들끼리는 행복합니다. 마마보이는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사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며 공동체 속에서는 불행하고 병든 가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 단일 구조 속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일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는 행복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교회당 건물을 지으면서도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는 교회의 모습은 사회적 순치로 인해서 더욱 더 그렇게 빠져 들어갑니다. 사회와는 굳게 담을 쌓고 자기들만 좋으면 그만인 내사된 가정처럼 어른 아이들이나 마마보이들만 모여 있는 그런 집단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은 가슴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결과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장애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의 음성을 듣고 각 사람이 그 앞에서 책임을 발견하고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 속에서 일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사람이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의 속을 썩이는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지내야 합니다. 이 시기는 적어도 10여년 지속되는 짧지 않은 시기입니다. 이 기간 동안 부모와 자식은 때로는 원수처럼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가 가출해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어서 결국에는 서로가 이해하고 감싸줌으로써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가 독립적인 삶을 살도록 강하게 기릅니다. 사춘기에 변화무쌍한 시기에도 전혀 요동하지 않고 자녀를 지켜보면서 부모가 해야 할 도리를 다 합니다. 그러나 일부 겁 많은 부모나 이기적인 부모는 자녀를 품 안에만 두려고 합니다. 거친 세상과 격리시켜 온상에서만 자라게 합니다. 상처 받지 않고 거친 세상을 보지 않고 고상하게 자라게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키워서 무엇이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성도들을 그렇게 양육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상하고 거룩하게만 자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뱀보다 더 지혜롭게 자랄 수 있도록 거칠게 다루지 않습니다.

매일 오냐 오냐로만 키운 응석받이는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인 줄로만 아는 심각한 착각에 빠집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 모르는 이기적인 행동이 부모를 즐겁게 하는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조르는 일이 귀염을 받는 일로만 알고 자란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부모가 기뻐하면서 원하는 것을 내어주곤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그런 부모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고 구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아이처럼 달라고 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나요? 그저 마냥 달라고만 하는 것을 재롱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언제까지나 재롱동이로만 보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상장할 때 성장해서 책임을 가지고 성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의젓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정상적인 부모의 태도입니다. 성도가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성령 안에서 찾아내도록 때로는 가혹하지만 매를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성도 각 사람이 판단을 받는 주체는 목회자가 아닙니다. 판단하시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입니까? “우리 목사님이 잘 했다고 했는데요.”라고 말할 것입니까? 판단하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여러분 안에 있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도 그 판단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부모를 만나면 마마보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부모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부정적인 내사를 받으면 문제아이가 됩니다.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집니다. 자기만 알고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못하는 성인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만 알고 타 교회는 관심조차 없는 성도들과 그런 이기적인 행동을 부추기는 어리석은 일부 목회자들로 인해서 사회로부터 교회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우선 들어오는 관념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하는 서글픈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들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지도자의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격미달의 정치 지도자들로 인해서 국민들은 가슴 아파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문제가 지도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문제입니다. 국민들의 정치수준이 그 정도이기 때문에 그런 정치가가 활동합니다. 금권 선거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돈을 주고받는 것을 기대하는 쪽이 국민입니다. 정치가란 국민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표가 나오니까요. 국민들이 그런 정치수단을 좋아하니까 머리가 좋은 후부자들이 그걸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머리는 여러분들의 머리보다 훨씬 약고 영리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지도자들은 어리석은 대중의 요구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고 우매한 대중을 이기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지도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소수가 진정한 마음으로 대중을 위해서 자신을 버립니다. 주님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이런 지도자는 극히 소수이기 때문에 눈에 드러나지 않고 다수는 이기적입니다. 입으로는 헌신을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대중은 여기에 속습니다. 하지만 대중도 이기적이긴 마찬가지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자격 없는 지도자가 판을 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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