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은사의 활용과 활성화2024-07-22 2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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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의 활용과 활성화
가.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은사를 받으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알지만 은사는 사용함으로써 계속 다듬어지고 강화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적행하는 은사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고정관념에 젖어서 사장된 은사를 개발하고, 적극 사용함으로써 강하게 활성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는 실제로 사용해 보지 않고 관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설교를 예로 들어보자.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잘 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고 시간을 투입한다. 물론 특별 나게 설교 잘 하는 사람도 있지만 노력과 연구를 통해 개발되고 발전된다.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할 때 은사는 더욱 활성화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받은 은사를 불일듯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불일듯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 아나조퓌레오는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다," "불꽃을 계속해서 보존하다"는 뜻이다. 이는 디모데가 이미 받은 은사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사를 더욱 분발하여 새롭게 하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행하는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눈치보고 교단 눈치 보느라고 불일듯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장시켜서 은사를 소멸시킨다.
오랫동안 이런 은사를 사장해 놓으면,
-첫째는 예수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고 갖고있는 은사도 빼앗길 것이요(마 25:29), -둘째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된다(살전 5:19).
어떤 사람은 이미 기적행하는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인 눈치, 교단 눈치를 보느라고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 후, 도전을 받고 사용해 보려고 했지만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은사자의 집회에 참석하여 안수를 받고 사장된 은사가 다시 나타났다. 이후 그는 사람의 눈치, 교파의 눈치 보지 않고 담대하게 사용하여 이전에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나. 계속 개발해야 한다. 필자가 이전에 골프를 즐길 때였다. 주말 골프를 즐기다 보니 실력이 잘 향상되지 않았다. 프로들은 매일 골프를 치고 싱글 핸디 정도를 유지하려고 해도 최소 일주일에 서너 번은 골프장에 가야 한다는데 필자는 겨우 일주일에 한 번 나가니 실력이 늘겠는가?
은사도 마찬가지다.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영적 근육이 굳어져서 그 수준에서 맴돈다. 하나님은 은사를 사용하라고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받은 은사는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더욱 불일듯하게 하고 또한 내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사장시켰다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다. 은사를 간절하게 사모하고 구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은사란 선물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냥 주실 것이라면서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나에게 구할 마음을 주시지 않는 것을 보니 나에게는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을 모양이다"라면서 구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잘못된 기적종식론의 영향, 주변 동료의 영향, 교회의 가르침, 교파의 압력과 핍박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신기해서 필자도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과 교제하면 이런 은사에 대한 도전과 의욕이 일어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교제하면 또 그런대로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아무리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도 불일듯하게 하지 않고 도전을 받지 않으면 서서히 소멸된다는 사실을. 또한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과의 교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와는 달리 성경은 은사를 구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고전 14:7).
필자도 예언의 은사를 받기 전에, 이 구절을 자주 보았지만 사모하라고만 하니 꼭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연구해보니 그런 뜻이 아니었다. 여기서 "사모하되"의 헬라어는 "젤-로"인데 그 뜻은 그냥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할 정도로 구하다," "몹시 바라고 간절하게 탐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어대로 풀어서 번역해 보면 아래와 같은 뜻이다.
라.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들(은사)을 시기할 정도로 몹시 바라고 간절하게 탐내라. 특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
마. 신령한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여기서 "사모하는"은 젤-로(동사)의 형용사형인 "젤-로테스"인데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을 말하는 질롯(jealot)에서 생긴 단어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신령한 것을 몹시 바라고 간절하게 탐내는 자들임을 긍정적으로 인정한 후 그 열심을 발휘하여 신령한 은사들이 더욱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명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렇게 하기는커녕 이런 신학, 저런 이유로 오히려 억누르고 찬물 끼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사람은 "은사보다는 은사를 주신 분이 더 중요하다"면서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이 제일 중요하지만 그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그 하나님의 뜻을 더 잘 행하기 위해 그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구해서 받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기적행하는 은사를 많이 가진 고린도교회를 보라.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가장 많이 책망 받은 교회가 아닌가? 그러므로 기적행하는 은사는 말썽만 부리므로 받은 필요가 없다"는 식의 해괴한 주장을 한다.
성경 어디에 그런 주장이 있는가? 사도 바울이 책망한 것은 은사 사용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한 것이지 은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고린도교회에 많은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더욱 많은 은사가 고린도교회에 임하기를 기도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4-7).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은사자가 교회에 있으면 여러 사람이나 교회에 덕이 되지 않으므로 절제(?)를 강요하거나 교회를 떠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글쎄? 누구의 덕을 먼저 강조해야 할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엡 4:12), 전체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 이런 은사들을 주셨는데(고전 12:7; 14:4), 사람들이 자기가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잘 모른다고 해서 이런 은사들을 배격해야 할까? 우리는 누구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자부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들(은사)을 시기할 정도로 몹시 바라고 간절하게 탐내라.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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