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주의
존 낙스(John Knox)는 기독교 주류를 네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희랍정교회', '가톨릭교회', '개신교' 그리고 '열광적 기독교' 이렇게 구분하면서 그 가운데 열광적 기독교는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개신교 분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지만 사실 초기 기독교는 열광주의를 배제하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17~18세기에 서방 기독교의 주류에서 밀려난 열광주의는 이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교회의 부흥의 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로고스 일방주의의 제도화한 교회의 반성으로써 다시 시작되고 있는 열광주의 기독교는 미주 대륙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미국을 비롯해서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는 곳에서 이 운동은 널리 퍼져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열광주의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의 본질에 속한 것이지만 공교회가 자리를 잡으면서 그 주된 요소들이 케리그마와 로고스로 대치되면서 제도화한 교회로 굳어지고, 영적 요소들이 교회 안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이런 요소들을 회복하려고 시도했으며 종교개혁 이후 소종파 운동으로 회복을 구했지만 주류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지금까지 꾸준히 그 열정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열광주의의 주요 요소들은 ‘환상과 무아경‘, '이적들’, ‘영감’ 등입니다. 이 요소들은 사도행전에서 자주 나타나는 내용들인데 성도들이 모였을 때 이런 영적 현상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남으로써 그들은 이런 현상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주님의 임재의 표현으로서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일부에서 미숙한 모습들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은 장려되었고, 모일 때 그들은 이를 사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상과 무아경'은 바울에 의해서 장려된 것인데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영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예수를 육체로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이 대상인 그리스도를 영으로 경험함으로써 실제적인 예수를 영접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육체를 신뢰하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육체를 넘어 영적인 합일을 경험하는 수단으로서 환상과 무아경을 장려하였으며, 이런 영적 경험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치렀던 것으로써 이로써 자신은 육체이신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하는데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는 영적 일치를 이루었던 것이며, 그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회심하게 된 배경이 ‘하늘로서 오는 환상’(행 26:19)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예수는 살아계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영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함으로써 육신으로 그 안에 일치되며 따라서 육체적 할례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사도행전에서 120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단체로 경험한 신비한 현상은 무아경의 집단적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불의 혀 같은 성령의 모습을 보았는데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주로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모습과는 다른 현상이었고 그에 따라 그들은 방언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비한 영적 경험은 오늘날에도 무아경으로 나타나며, 이 사건 이후에 소규모로 또는 개인적으로 이런 무아경이 경험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령의 특성으로써 우리가 이제까지 이성적으로 경험하는 신앙고백적 성령 체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이러한 사실들은 사도행전 4:13, 8:17, 10:44, 19:6 등에서도 입증되는 사실입니다. 특히 누가는 이런 외적 현상들에 집중함으로써 성령의 나타나심을 인식 가능한 수준으로 이해하도록 배려했습니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적 특성으로 외적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증거들에 집중함으로써 무아경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모습을 분명하게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초대 교회 안에서 경험되었다는 사실을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놓여 있었던 인물들 즉 예를 들자면 베드로, 스데반, 빌립, 아나니아, 바울 등은 환상을 경험했으며, 이런 경험은 초대교회가 선교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일에서도 환상에 의존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행 9:10, 10:3~6, 16:9등). 환상에 의해서 중대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열광주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이 '이적들'입니다. 기적적인 치유는 초대교회 안에서 어디든지 나타나는 현상이었고 특히 선교현장에서는 예외 없이 등장하는 일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다비다의 소생)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능력 있는 일들은 열광주의에 사로잡힌 곳에서는 예외 없이 나타났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라는 이적은 주님이 살리시는 이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지만 이 또한 열광주의의 주된 요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군중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이 현상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분명하게 했으며, 이는 열광주의가 개인적 경험을 넘어 공동체의 정당한 가치를 위해서 나아가야 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영감'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하는 일을 통해서 들어났으며, 이는 특별히 예언의 영으로 인해서 기독교 교회 안에 새로운 지침을 만들어내거나 성령이 교회를 인도하시는 주요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직 성경이 없는 그들에게 사도들의 가르침만으로는 교회의 구성과 인도에 부족함이 있었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예언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따라서 바울도 예언을 하기를 사모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는 방언과는 달리 교회의 유익한 지침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특별히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배경으로 임박한 주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기대를 성취시키는 증거로 받아들여져(행 2:7)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예언자로 받아들여져 예언이 풍성하게 시도되었습니다.
성령은 찬양과 증거의 말씀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그들은 예언하는 일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대리자로서 전권 대사로서 이 일을 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담대하게 어디에서든지 말씀을 증거했고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행 2:8, 3:6, 4:10, 5:28 등). 예언에 주로 의지해서 복음을 전하고 임박한 주의 재림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열광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초대교회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현상이었으며, 당시의 개념으로는 이것이 정통이었다고 할 정도로 모든 교회가 열광주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열광주의는 자연스런 것이었으며, 주의 재림에 대한 확신찬 열정이 복음의 진보를 만들어냈고,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열광주의는 이런 유익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신령한 자들’이 등장하면서 고차적인 영성으로 구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분파를 만들어내는 부작용이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런 그릇된 ‘엘리트 의식‘은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시키며 이런 움직임에 들어가지 못한 새로 입문한 성도들과 차별함으로써 교회를 분리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으며, 이는 분파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일들은 고린도의 지역적 특성에 의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봅니다. 디오니시우스(Dionysus)를 광신적으로 섬기는 자들이 개종해서 교회 안에 들어옴으로써 그들이 예전에 행하였던 격양된 예배 형태를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하였으며, 무질서와 혼란을 부추기게 되었습니다(고전 12:2).
이러한 ‘무제한의 열광주의’는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영적 경험을 소유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방임하였으며, 이어서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라는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이들은 성령을 통해서 부활 생명을 충만하게 경험하고 소유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부활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릇된 열광주의는 엘리트적 영성의 또 다른 부작용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예언을 아무런 비판 없이 무조건 받아들였으며(살후 3:6~13), 골로새 교회에서는 환상을 경험한 자들이 그것을 천사숭배를 정당화 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달갑지 않은 부작용을 넘어서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이단적인 요소들이었으며, 이로써 우리는 바른 이해와 가르침이 배제된 열광주의는 교회를 해롭게 하는 독소적인 요소임을 알게 됩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신체 외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증상들에 대해서 놓치려 하지 않았으며, 성령의 역사는 초자연적이고 명백한 현상 속에서 뚜렷하게 들어난다는 사실을 증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누가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특별히 이런 증거들에 집중해서 기록했으며 따라서 누가의 성령 이해는 열광주의자들의 이해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경험이 반드시 타인의 눈에 볼 수 있도록 들어나게 임해야 하며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는 “열광주의자 누가”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바울은 열광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의 서신에서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지침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초기 1세기에 교회 안에서 아주 정당한 작용으로 받아들여졌던 열광주의가 오늘날 하나님의 비주류 분파로서 밖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까닭을 바로 이해해야 하며, 바울이 우려한 위험한 요소들을 경계함으로써 열광주의가 제대로 평가를 받아 교회 안에서 정통으로서의 위치를 회복하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1세기 사도들과 교부들을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광범위하게 나타났던 환상과 이적과 영감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다시 재현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그 움직임이 활력을 얻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위험한 요소들이 많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 그 위험한 요소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