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이끌어 내지 마십시오.
제 1 차 대각성운동(the first greate awakening movement)이 일어났을 때 조나단 에드워드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가장 거칠게 방해하던 몇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24시간이나 꼼짝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던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 경험을 통해서 변화를 받았고 그런 일들이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났습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서 부흥이 일어났고, 각성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대각성운동의 바탕이 되었던 것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하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훗날 이 운동을 평가하면서 “부흥을 방해하는 원수들보다 이런 현상들을 날조하여 꾸며낸 사람들에 의해서 대각성운동이 끝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회심하고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움직임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인위적으로 이끌어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서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의 어떤 사람들이 유럽으로 넘어와 바울이 전한 터 위에 자신들의 터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이 전한 그 내용대로 전하는 것은 매력이 없고, 자신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 바울과는 달라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에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덧붙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복음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했습니다.
복음을 혼잡하게 한다는 말로 번역된 우리말 성경은 원래의 뜻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고 있는데 ‘혼잡하다’라는 헬라어는 ‘kapheleuo’로서 그 의미는 영어 성경에서 제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we do not peddle the word of God for profit(NIV), peddling the word of God(NASB)(고후 2:17)
혼잡하다의 올바른 번역은 뜨내기 장사꾼처럼 책임감이 없이 행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집회를 사모하여 자신에게도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유사한 현상들을 조작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로 인해서 나타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노력과 프로그램에 의해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진정한 역사를 모방하는 유사한 현상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지요.
우리 나라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많이 행하여졌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분위기와 말로 인해서 사람들을 울게 하거나 웃게 합니다. 간혹 최면술을 익혀서 사람들을 최면에 걸리게 하기도 합니다. 시끄러울 정도의 북소리로 분위기를 만들고, 인도자가 계속 목청을 돋구어 분위기를 몰아갑니다.
이런 행동으로 인해서 성령이 그 시대에 역사하고자 하는 뜻이 심하게 훼손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나타나는 증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싶어서 성령의 역사를 흉내내거나 모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서도 흔한 일이었는데 성경의 마술사 시몬이 은사를 돈을 주고 사려고 한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이끌어내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잘못된 의도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의상을 돋보이게 입거나, 황홀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들을 이용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마치 마술사가 교묘한 장치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여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위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착각하도록 합니다.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는데 일부 사역자들은 사람을 너머지게 하기 위해서 최면술을 배우기까지 합니다. 단학 수련원에서 초월명상을 배워 사람들에게 이용하기도 합니다.
고대부터 전해오는 신비술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마치 점장이처럼 사람의 길흉을 점치기도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기독교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무속적인 것과 기독교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속임수에 쉽게 말려들기도 합니다.
뜨네기 장사꾼(peddler)은 물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을 속여서 물건을 파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름을 들어내는 일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집회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입니다.
보따리 장사처럼 이리 저리 떠돌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깁니다.
이런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런 길을 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들도 한 때는 신실한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만나고 그 어려움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게 되었고, 그렇게 되어 성령의 역사가 위축되었는데 이런 문제를 정당한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인위적이고 기만적인 방법을 취함으로써 양심이 무디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역자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역에 대한 점검을 받게 됩니다. 이런 점검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되면 핑게를 대기 보다는 솔직하게 자신의 속 마음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하나님의 신뢰를 덧입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고 거두어진 능력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위장하면 장사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항상 솔직한 태도가 능력의 원천입니다.
능력을 행하는 사역자들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목회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편견입니다.
능력을 행하는 사역자는 그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순결한 사역자로 오래 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어떠한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항상 위험한 곡예를 하는 사람처럼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긴박함이 있으며, 남모르는 갈등과 힘든 노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은사로 그냥 주어졌다고 해서 그 사역자가 그냥 놀고 먹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지요. 지키기가 힘들기 때문에 많은 사역자가 비뚫어진 길을 가게 되고 장사꾼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능력있는 사역자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복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능력 사역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