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캐트린 쿨만
"모든 사람이 다 치유받는 것이 아님은 왜입니까?"
이 물음에 대하여 내가 말해 드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정직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알지 못합니다"
자기는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염려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며,
어느 누가 그것을 헤아려 알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하나님의 사유(reasoning)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단순한 것도 몇 개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가 치유받고, 누가 치유 받지 못하는가라는 점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오직 하나님만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몸의 치유를 구해오고 기적의 집회에서 영적인 권능에 압도당하여 자기 자신의 필요를 망각해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를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기뻐하기 시작합니다.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치유하실 대상을 선택하시는 것은 참으로 바로 그런 순간일 때가 자주 있습니다.
즉 자신을 잊어 버리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최우선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믿고 기도해 온 사람에게 일어난 것 입니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사람들과 마음이 굳어 있고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일어 났습니다. . . .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도 치유받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한번도 집회에는 온 적이 없는데도 치유받거나 집회장에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치유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여자 분은 자신의 집에 있을 때에 치유받았습니다.
어떤 남자분은 집회에 와서도 머리를 흔들며 떠나가고,
성령께서 그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시려고 임하시고,
육신도 혼도 치유받으려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치유해 주시고 예수님의 권능이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 것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히브리서 11:33~34)했던 믿음..
그 믿음이 다시금 역사를 행한 것 입니다.
그럴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몇 가지의 사실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치유받지 못하는가 완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집회에 왔을 때와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왜인가.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낙심해 있는 곳에 실망이 더해지는 것은 커다란 비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알고 있는 것은 겨자씨 한 알 정도의 믿음이 있으면, 인간이 마음을 정해
애써 노력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한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믿음이 나타나게 되면 반드시 결과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양이 떠오르면 반드시 빛과 열을 동반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믿는 자신의 능력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마음(mind)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음(mind)에 나누어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감정이나 원함이 믿음이라고 잘못 인식되어 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음(heart)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지성(mind)에 속해 있는 어떤 것으로 부터는 아무런 결과도 생겨나지 않지만,
그 때 매우 간단히 하나님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한가지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경우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의 마음에 나눠 주시는 때 뿐임을 깨닫는 것 입니다.
믿음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져 나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영의 상태를 아무리 양육해도,
그것은 예수님이 소개해 준 형태의 믿음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그것도 역시 믿음의 문제이어서 믿기 위한 주님 자신의 믿음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것 입니다.
"그 분 (예수님)을 받아 들인 사람들, 그 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한 1:12)
죄인에게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자신의 죄를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정죄감을 주시는 동일하신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믿음도 전해 주시는 것 입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그런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 치유받기 위한 믿음을 주시는 분과 동일하신 분에 의해서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 입니다.
그 분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시요
완성자 이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 분에게는 분투함(struggle)이 없습니다.
양식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몸의 치유를 구하여 분투하고 몹시 노력하고,
하나님께 요구해도, 하나님으로 부터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하는 것을 나는 기적의 집회에서 얼마나 많이 보아 왔는지요.
우리가 치유를 믿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치유를 행하시는 우리 주님과 주님의 권능을 믿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를 승리의 산 정상으로 끌어올리는 역사를 행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다른 은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믿음에 대해서는 제한된 지성의 산물로써 생각합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은 여전히 진리를 믿는 자기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끊임없이 계속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서 의심과 불신을 몰아내는 자신의 분투와 자신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faith) 안에는 신념(belief) 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믿음은 신념 이상의 것 입니다.
믿음은 은사입니다.
모든 좋은 것과 완전한 은사를 주시는 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 이십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완전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의심없이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믿음을 받을 때, 이해력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것은 무엇이든 믿음의 손길에 의해 다다르는 곳에 두십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을 돌아 보시고 그 은사를 사용하기 위한 믿음을 자기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입을 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전혀 분투하심이 없습니다.
의심이나 불안, 걱정 등의 파도가 모두 사라지고 영광스럽고 놀라운 고요함과 평강이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받은 사람의 마음(heart)과 생각(mind) 안으로 유입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의사이신 주님에 의해 치유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찬양과 경배의 소리 뿐일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비밀들 가운데 하나는 내가 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였을 때 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권능의 가장 위대한 나타나심들 중에 얼마인가를 경험했던 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모든 것을 완전히 주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당신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이 은혜를 얻기에 가장 가까워져 있는 상태입니다.
나는 어느 젊은 여성이 기억납니다.
그녀는 믿음을 설명하는데 이 예화를 사용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내가 물에 뜨는 것을 연습하고 있었을 때 완전히 긴장을 풀고 물이 나를 지탱해 줄 것이라고 두려워 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역사했습니다. 나는 뜨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나는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으로서는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과 긍휼로써 우리에게 주시는 것 입니다.
우리가 쉽게 망각해 버리기 쉬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어느 누구도 지극히 조그마한 은혜라도 받을 만한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치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내가 20세 나이였을 때, 나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신학은 논리 정연했으며, 당신이 어떤 규칙을 따르고 열심히 일하고 계명을 모두 지키고, 어떤 영적 상태에 자신을 둔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치유해 주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습니다.
그렇지만 보십시오.
나의 신학은 허물어 졌으며 산산조각이 났을 때가 왔습니다.
어느날 한 남자가 기적의 집회에 와서 벽에다 등을 기대어 조용히 서 있었는데,
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담하게 무대까지 걸어와서 숨김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귀가 지금 막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 입니다."
나는 반복해서 그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는 자신이 치유받은 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중들을 보고 호기심으로 집회장 안으로 들어 왔지만 경매를 하고 있는지 무엇을 나누어 주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구경꾼으로서 거기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가지 질문을 하자 그는 25년간 이상이나 교회에 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치유받은 사람이 스스로도 놀라고 치유받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라고 한 후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더 많이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에 의한 치유" 도 있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잊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긍휼(compassion) 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으로 축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또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도 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치유에 대해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신학에는 거의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고 나는 종종 생각해 왔으며,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독단적으로 되기 쉽다는 것을 나는 자주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증명하라는 인간의 요구에 대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든 자신을 증명하실 필요따윈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당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울을 통하여 어렴풋하게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반면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재의 희미한 것 뿐이며,
더구나 뒤틀려진 희미한 것들 뿐 입니다.
여러가지 놀라운 계시를 받았던 바울 조차도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체의 가시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모든 대답을 얻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나에게도 적절한 대답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고린도후서 12:9)
그것에 대해 바울이 공언했던 대답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답이 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2:9)
느헤미야 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슬퍼하며 탄식하고 있었을 때,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헤미야 8:10)
그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는 의미입니다.
- 캐트린 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