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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제 10장 축사사역을 위한 기본 가이드라인2024-12-12 18:40
작성자 Level 10
제 10장  축사사역을 위한 기본 가이드라인

귀신들린 자에게서 어떻게 귀신을 쫓아낼 것인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귀신이 무엇에 근거해서 붙어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면 어떤 때는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자기는 거기에 남아있어야 할 당연한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어떤 통로를 통해서 귀신이 합법적으로 들어온 것이다. 예를 들면 마귀와의 언약이나, 반복적으로 짓는 죄들은 원수의 세력들로 하여금 자기 속에 들어와 거하도록 초청하는 것과 같다. 물론 실제로 그 속에 안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들어오지 않고도 외부에 있으면서 집중적으로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려면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혼란될 정도로 그 일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방해할 수 있는데, 이것도 귀신들림의 한 현상이다. 그래서 어떤 통로를 통해서 들어왔을 경우에는 귀신들이 마치 거기에 거하는 것이 자기들이 당연한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우리들은 ‘너는 그럴 자격이 없다. 권리가 없다. 예수님이 네 권리를 취소시키셨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물리쳐야 된다.

우리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그 첫 번째는 귀신이 무엇에 붙어서 사는지 혹은 무엇이 귀신에게 들어와 거할 권리를 부여했는지를 발견하는 것과 두 번째는 어떻게 그 원수의 일을 멸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내용이다.

그럼으로 이번 장에서는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내용들을 적용하도록 할 것이다.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눅 8:26-29)

이것을 보면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멀리서도 금방 알았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귀신의 세력들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을 때 우리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금방 알아본다. 그리고 이 사건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얼마나 힘이 세던지 쇠사슬로 고랑을 채워놨는데도 그것을 다 끊어버렸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삼손처럼 그 어떤 것도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 사이에 거처하면서 날카로운 것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고, 사람들은 무서워서 그 근처에는 감히 지나다니지도 못하는 그런 가운데 있었다. 이처럼 귀신들리면 사람이 황폐화된다.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의 경우는 어떤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군대귀신이 들렸으니까. 그 당시 로마 군대의 단위가 약 4,000명 되었는데, 귀신이 그 사람 속에 얼마나 들렸는지 모르지만 2,000마리의 돼지 떼가 한꺼번에 바다에 빠져 몰사했을 정도니까 이 경우에는 엄청나게 많은 귀신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힘도 굉장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다.

1. 먹이사슬

귀신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귀신은 두려움이나 미움이나 간음이나 정욕, 불행, 불평, 실망, 좌절 죄책감 등 여러 가지를 먹고 산다. 이러한 것들이 귀신들의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쥐가 쓰레기를 먹고 살듯이 쓰레기가 있는 곳에는 쥐가 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그것을 통로로 해서 귀신이 우리 삶 속에 들어온다. 그 중에 하나가 앞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를 가질 때 들어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에 자기는 그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절대로 당연하지 않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우리에게 어떠한 잘못을 했던지 그것이 아무리 클지라도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일에 비하면 그것은 새발에 피라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차이만큼 작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방이 우리에게 어떠한 잘못을 했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것을 용서해야 한다. 만약에 나는 피해 당한 자이기 때문에, 나는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를 용서할 수 없고, 그래서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하다. 원수의 세력들이 우리 속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 붙잡고 거할 수 있는 먹이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귀신의 먹이사슬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귀신이 어떠한 통로로 들어왔는지 그 사람에게서 지금 귀신이 붙들고 있는 것이 뭔지, 그 사람에게서 쓰레기가 뭔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그 쓰레기를 제거하면, 다시 말해서 그 통로를 막으면, 혹은 그 먹이를 치우면 귀신은 금방 쫓겨 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명하면 어떤 경우에는 그 즉시 구역질하고 나가기도 하고, 하품하면서 나가기도 하고, 그냥 나가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끈질기게 잘 안나가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사역을 많이 해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어떤 경우에는 매우 오랫동안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기도해주는 사람이나 기도 받는 사람이나 모두 다 지치고 고통스러운 기간을 거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존 윔버 목사님의 경우를 보면 밤낮으로 계속해서 쉬지 않고 열 시간에서 열네 시간이나 사역할 때도 여러 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때로는 귀신이 여럿이 들어있을 때, 졸개들은 쉽게 나가는데, 그 두목이 잘 안나가는 경우가 있다. 어떻게 안나갔는지 아냐면 본인이 그 속에서 자기가 아직 안나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걸리고 잘 안나가는 경우의 대부분의 이유는 그 귀신이 자기가 거기에 머무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발견해서 제거하면 대부분의 경우는 즉각 나간다. 그리고 귀신이 그 속에서 붙잡고 있는 근거가 때로는 두려움이 될 수도 있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발견하여 예수님 안에서 해결하고, 그리고 쫓아내면 대부분의 경우는 쉽게 나간다.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때로는 용서해야할 필요가 있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할 필요가 있고,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악행을 버릴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길로 행해야 한다.
우리 생각에는 귀신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거부할 수 있는가?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참 공평하신 분이시다.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로 가도록 가르쳐주는 생명의 길이다. 그리고 성경 말씀은 영적전쟁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전체가 영적전쟁의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우리가 그 생명의 길(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면 거기서부터는 엄청난 원수의 세력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고 공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한 차원에서 하나님이 길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심지어 마귀에게도 공평하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대통령이다 그래서 내가 미워하는 당의 당수가 죄를 지으면 형벌을 가하고, 내 아들이 죄를 지으면 용서해 준다면 그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올바로 나라를 치리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그 나라를 올바로 치리하려면 상대방 당의 당수가 잘못한 것이나 내 아들이 잘못한 것이나 그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똑같은 형벌을 주어야 그게 공평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반면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정확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서 곁길로 나가면 원수의 세력이 우리를 대적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길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감히 어둠의 세력들이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대적하고 왜 안듣는가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어떤 때는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에 대해서 크게 모르기 때문에 안듣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는 참으로 크다. 안듣는 이유는 예수님의 권세가 작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속에서 그 어두움의 세력이 나가지 않고 합법적으로 붙잡고 있는 뭔가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접촉점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접촉점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그 죄를 버리면, 그것이 접촉점을 닫아 버리거나 혹은 들어오는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된다.

어떤 분은 이것을 쥐에 비교한다. 집안에 쓰레기를 잔뜩 쌓아놓고 문 열어두면 머지않아 집안에 쥐가 들끓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쥐를 쫓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 설령 쥐를 다 쫓아냈다 할지라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쥐는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다. 왜냐면 쓰레기가 그냥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경우에 쓰레기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래서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해도 그것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 귀신이 합법적으로 들어온 근거가 있기 때문에 안나갈 뿐만 아니라 나간다할지라도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여전히 귀신은 아무 때라도 다시 들어올 수 있고 나중에는 더 악한 귀신들이 여럿이 들어올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치유 받고 귀신이 나갔는데, 돌아서서 나가면서 귀신이 도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왜냐면 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명령하는데도 잘 나가지 않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기도 받을 때는 낫는데, 다시 돌아가면 문제가 생기고, 올 때마다 문제를 더 가지고 오는 사람들은 그 근본적인 원인이 아직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귀신의 먹이가 아직 정확하게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 치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죄를 반복적으로 지으면 억압이 온다.
또 우리가 반복적으로 어떤 죄에 자신을 내어주었으면 그 죄를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죄의 습관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다. 그러면서 그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요 5:5-14)

이 경우는 귀신들린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그 죄의 습관이 고쳐지지 않으면 지금 병이 일시적으로 나았다 할지라도 나중에 더 심한 상태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귀신들렸을 때도 똑같다. 죄 때문에 귀신이 들어왔을 경우에 그것이 돌이켜지지 않으면 귀신이 쫓겨났다 할지라도 귀신은 아무 때라도 다시 올 수 있고, 나중에는 더 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을 발견하여 치유하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2. 어떻게 원수의 일을 멸할 것인가?

귀신의 영향력을 끊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그 귀신의 세력을 멸할 것인가? 어떻게 그 사람을 치유할 것인가? 원인을 발견했으면 앞에서 말 한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심하게 귀신들린 경우도 말할 것도 없지만 죄를 지으면 귀신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귀신이 여러 가지 억압을 줄 수 있다고 그랬는데, 개인적으로 과거를 돌이켜 보아도 그렇다. 나에게 어떤 억압이 있었을 때, 혹은 어떤 부분에 집중적으로 원수의 공격이 있었을 때, 하루는 하나님께서 비춰주시기를 내가 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한 것을 보여주셨다. 예를 들어 권위의 문제라면 내가 권위의 문제에 올바로 서있지 못한 부분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니까 안 것이다. 왜냐면 내가 아직 그 부분이 안되니까 당연히 원수가 공격을 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비춰주시면 그러한 죄를 회개하고, 그 다음에 죄 용서를 선포 하고, 그리고 그 어둠의 세력들이 그것으로 인해서 여태까지 공격해 왔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끊을 때, 이건 대단한 파워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것을 화개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 받고, 그래서 그 근거를 제거하고 나서 그 영향력을 끊게 될 때, 그러한 것들은 쉽게 끊겨지게 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한 것만으로 회개가 충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할 때도 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말은 돌아가서 그 일에 대한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돈을 훔치거나 사기를 쳤거나 손해를 끼쳤으면 돌아가서 당연히 돈을 갚아야 된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말로 지은 많은 죄가 있다. 말은 큰 영향력이 있다. 오늘 예언 중에서도 우리의 말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우리의 부정적인 말, 또는 음란패설, 이런 부분들을 많이 조심하라고 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 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말 때문에 귀신이 들어와서 속에서 역사한다는 그런 차원은 아니라도 우리 삶 속에서 얼마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우리가 하는 말들이 상대방에게 저주로 임할 수 있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말에 대단한 권세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말할 때도 말을 분명히 잘 골라서 해야 된다. 왜냐면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가 저주한다. 저주한다. 그런 차원이 아니고, 얘는 소망이 없어 안돼 틀려먹었어, 이런 부정적인 말들이 결국 저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 영향력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 영향력을 끊고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할 때가 있다.

감정에 넘어가면 안된다.
귀신이 어떤 때는 감정 뒤에 숨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소리를 크게 지르고 화를 버럭버럭 낸다. 그런데 사역을 많이 해본 분들이 얘기하는데, 겉보기에는 대단한데 조그마한 귀신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귀신들이 속이는 것이다. 귀신의 가장 큰 수법이 속이는 것이니까. 내가 여러 사람들을 상담해보면 실제로 속에 들어와서 억압하는 경우가 아니라도 귀신은 사람들을 어떻게 억압하냐면 가장 큰 수법이 속임수다. 여러분들이 속는 만큼 억압을 받는다. 왜냐면, 귀신들은 삼지창을 가지고 여러분 목에다 들이댈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때는 공격할 수 있다. 성경은 그것을 불화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때도 우리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 수 있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외부적으로 공격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나가면 다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사단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뭐냐면 속이는 것이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성경을 가지고도 속인다. 그런데 그 속는 만큼 지배를 받고 속는 만큼 억압을 받는다.

그러기 때문에 치유 받는 가장 좋은 길은, 먼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마음속에 영접해야 한다. 왜냐면, 예수님이 능력이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그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로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지름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님께 헌신된 삶을 사는 것이 이기는 지름길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주와 동행하며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면 안전하다. 그래서 말씀이 참 소중하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이것 하라. 저것 하라. 혹은 이것하지 말라. 저것하지 말라. 이런 말씀들이 있는데, 성도들은 이런 구절들을 보면 반가워하지 않는다. 뭔가 자신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 같고, 가로막는 것 같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 같이 느낀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말씀만큼 우리에게 진정한 보호를 제공해 주는 것은 없다.

핸리 불랙가비 목사님의 ‘하나님의 경험하는 삶’에 보면 좋은 예화를 들고 있다.

당신이 지뢰밭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고 가정합시다. 그 때 그 지뢰밭에 지뢰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신을 인도해 주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이 당신의 길을 나에게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신이 어떻게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저라면 할 수 있는 한 그 사람에게 바싹 붙어서 따라갈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 이리저리 방황하고 헤매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나를 인도하는 지침이 되어 나의 생명을 지켜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쪽으로 가면 안돼요. 그 길은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목적입니다. 그 분은 당신이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당신에게 계명을 주실 때 그 것은 당신을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최선을 보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분은 당신이 그것을 놓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는 것은 당신을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자유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제약받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안전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한 예다. 그런데 세상은 지뢰밭보다 더 무섭다. 어둠의 세력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끊임없이 미혹한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여러분을 미혹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토대하되 여러분이 혼자 깨닫는 것만 스스로 의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미혹된다. 우리 신앙은 교회 중심적이어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래서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자들도 있고, 지도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떤 것을 혼자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여러분의 목사님하고 상의하라. 왜냐면 여러분을 제일 잘 아는 분은 여러분의 목회자이니까. 그분이 누구보다 여러분을 제일 잘 안다. 그러므로 새물결선교회에 오시는 분들은 신앙 상담을 여기서 하려고 하지 말라. 여기 와서 상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기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서 그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영적인 보호인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지뢰밭을 갈수 있는 지도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좀 딱딱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그것이 여러분께 진정한 보호막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토대해서 하나님과 올바로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사단의 세력들이 방해할지라도 쉽게 끊어진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께 민감할수록 쉽게 끊어진다. 나아가 더 깊고 민감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성령님께서 더 자주 조명하시는 그런 사람일수록 훨씬 치유가 잘된다. 그러면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는다. 그냥 단번에 기도로써 끊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되는 것은 말씀의 토대위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도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도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안전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헌신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다.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체험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특별히 여기에 하나 추가하는데,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말한다. 목사님들이야 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붓고 계시기 때문에 문제가 별로 안되지만 일반 성도들 같은 경우 이런 것이 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부탁하는데, 여러분이 깨달은 깨달음만 절대로 의존하지 말라. 그것이 미혹에 빠지는 또 하나의 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여러분이 깨달은 깨달음만 의지하면 그것은 매우 지엽적일 수 있다. 그것을 어둠의 세력들이 속인다. 말씀을 가지고 속이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으면 아주 옆으로 간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억압을 받기 쉽고, 더 심한 상태가 되기 쉽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행하면 당연히 승리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사단의 방해에 넘어지기 쉽다.

우리 신앙은 실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실제를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실제를 강조하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한 토대와 바탕이 없이 하나님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한 이론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 말씀처럼 하나님에 관한 이론은 컵과 같아서 컵이 있어야 물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의 바탕이 없이, 어떤 체험을 하게 되면 자기 체험에만 의존한 나머지 미혹되어 속으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옆에서 얘기해도 잘 듣지도 안는다. 왜! 자기는 그렇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강조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얼마나 보호받는 길인가하는 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우리가 귀신들린 사람들을 사역함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자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이 사역을 해가되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는 귀신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누가복음 8장의 내용을 보면서 그 일이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귀신들려서 가정도 등지고 사회에서도 격리되어서 무덤사이에서 살면서, 쇠사슬과 고랑으로도 매지 못하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이 사람을 귀신의 억압에서 자유케 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더 큰 목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이점이 잘못 이해되다 보면 우리는 사랑으로 하기보다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상처를 줄 수가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에는 그런 경우가 많다.

오늘 11시 성경공부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목사님 몇 분하고 잠시 리더십에 관해서 얘기를 나눴는데(리더를 어떻게 분별하고 세우는 가), 참 어려운 점이 우리는 너무 극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더 그렇다. 균형을 잡고 중간에 서기보다 양쪽 극단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귀신이 어디 있어 쓸데없는 소리 말아! 그런 것은 중세시대나 있던 것인데 이렇게 말하는 반면에 한쪽에서는 모든 것을 다 귀신으로 몰아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그러면서 그 방법이나 행하는 것들은 전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지 않고 무례하게 함으로써 너무나 피해를 주는 사례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참 하나하나의 부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말씀으로 균형을 맞춰간다는 것이 너무나 힘든 것을 본다.

성령님만 해도 그렇다. 한쪽에서는 뜨겁게 불 받아라! 불 받아라! 불 받아라! 으-싸 으-싸 그러면서 능력이나 은사를 얘기하면 쉽게 받아들이는 반면에, 그게 아니라 성령님은 그런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분의 통치가운데 들어가야 되고, 그분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그분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면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둘 중에 하나는 그냥 쉽게 이해하는데, 그래서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양극단을 취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게 참 안타깝다.

귀신들린 사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다 보니까 어떤 때는 눈을 쑤셔야 귀신이 나온다고 그래서 심지어 눈이 터지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안찰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때려서 고친다고 사람이 맞아 죽는 경우도 있다. 옛날에 신학교 강의할 때 들은 얘긴데, 신학생 중에 한명이 말하기를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안찰한다고 하면서 때렸는데 나중에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와 주셨는지 그 사람이 오랫동안 귀신이 심하게 들려있었고 술주정뱅이에다 집안이고 동네고 가는 곳마다 난장판이라 집에서 차라리 죽어 없어졌으면 하면서 포기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교회로 데리고 왔는데, 교회서 기도한다고 때려가지고 죽었는데, 그 신학생 눈으로 보기에도 분명히 맞아서 온몸이 멍이 들어서 시퍼런데, 그 가족들의 눈에는 그 멍이 전혀 안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장례를 치루고 끝났다고 했다. 그 경우에는 천만 다행으로 넘어갔지만, 분명 때려서 사람을 죽인 것이다. 진주에서도 교회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 가족들이 처음에는 그냥 묵인 했다가 나중에는 돈을 요구해서 목사님과 교회가 반반씩 부담해서 일억에 합의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 교인들이 반으로 나누어졌는데, 한쪽에서는 돈을 주고서라도 빨리 해결해야 된다고 하는 반면에, 한쪽에서는 일부러 죽인 것도 아닌데 왜 교회가 돈으로 해결하느냐 그러면 죽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 교회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가끔 주변에 보면 안찰한다고 하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내 개인적으로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한군데만 집중적으로 때리면, 그것도 흥분해서 때리면 사람 죽이는 것이다. 때린다고 귀신이 안나간다. 귀신은 맞아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그러기를 귀신은 욕하면 나간다. 그래서 자기가 쌍스러운 욕을 막 했더니 귀신이 나갔다고 했다. 그런데 그 경우도 귀신이 욕해서 나간 것이 아니다. 어떤 분들은 귀신들린 사람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조용히 귀신을 쫓아내기도 한다. 참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한번은 존 윔버 목사님이 손자와 함께 영국의 한 세미나를 갔는데, 그날 설교하고 사역이 너무 바빠서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설교하고 사역하다보면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새물결선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날 귀신들린 자 사역을 하는데, 점심 먹고 저녁때까지 아무것도 못 먹고 사역을 하니까 어떤 분이 샌드위치를 사다줬는데, 목사님이 그것을 받아서 먹으면서 계속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놀래가지고 눈이 이만큼 커졌는데, 그분은 잠깐 쉬고 먹고 난 다음에 다시 사역을 할줄 알았는데, 어떻게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귀신을 쫓아내느냐는 것이다. 이런 얘기 들으면 우리는 금방 또 극단적으로 치우친다. 그래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사역을 하면서 껌을 쩍쩍 씹으면서 그냥 장난하고 얘기하면서 하는데 그건 옳지 않은 자세다. 내 얘기는 그런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밥도 먹지 못할 만큼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 쉴 수도 없고, 너무 배가 고파서 사역할 기운이 없으니까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사역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귀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 때문에 나가는 것이지, 우리의 행하는 것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상황에서는 음식을 먹으면서 사역을 할 수 있다. 샌드위치 먹으면서 한다고 귀신이 안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귀신이 소리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소리치지 못하도록 중단시키고, 또 귀신이 일어서서 방방 뜨려고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으라고 명령하고, 쫓아내면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를 깨닫고 그 위에 믿음으로 서야 한다.
참 중요한 말이 있다. 매우 중요한 말이다.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아는 것을 귀신들이 알면 복종할 거라는 것이다.” 이 말이 예수 권세, 내 권세라는 말이다.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있으면 여러분에게 주신 권세는 예수님에게 주신 권세와 똑같은 권세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다.(눅10:19) 또 예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가라고 말씀하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다.(마28:18-20) 그런데 이게 중요하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고 그 토대위에 믿음으로 서는 것을 귀신들이 알면 복종하게 되어있는데, 우리에게 이러한 엄청난 권세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못 나가면 귀신들이 안듣고 비웃는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떠한 종교적인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얼마만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권세를 깨닫고 그 위에 믿음으로 서느냐가 중요하다. 그 권세 위에 설 때 귀신들이 복종하게 되어있다. 소리 지른다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잠잠히 말하면서도 권세를 가지고 말할 때 듣게 되어있다. 그래서 이렇게 권세를 가지고 나아가되 사랑함으로 나가야 한다.

늘 기억해야할 세 가지
그런데 우리가 늘 기억해야 되는 것이 있는데, 전에도 말했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항상 기억해야 된다. 특별히 원수의 세력과 관련해서 세 가지가 중요한데, 첫째,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둘째,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셋째, 예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해서 깨닫고 그 위에 늘 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에게 권세를 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위에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성령의 조명으로 그 사실을 깨닫고 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늘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전에도 준비해야 되고,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도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실 것이고,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것이다.

귀신과 귀신들린 사람을 혼동하지 말라.
우리는 귀신들린 사람과 귀신을 혼동하지 말아야 된다. 눈을 쑤신다면 그건 귀신의 눈을 쑤시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의 눈을 쑤시는 것이다. 눈을 쑤시면 귀신이 아-야! 하고 속일 수 있다. 귀신이 장난하는 것이다. 귀신의 눈이 아플 리가 없다. 그런데 속으면 진짜인줄 알고 더 쑤시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군대에서 군종으로 있을 때, 한번은 유명한 부흥강사가 왔다고 해서 부대원들을 소집해서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설교가 끝난 후 부흥강사가 쭉 세워놓고 안수를 해준다고 하면서 묻기를 술을 먹느냐고 그래서 조금 먹었다고 했더니 손으로 눈을 쑤셔대면서 술 귀신이 나가야 하니까 아프더라도 좀 참으라고 해서 참느라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보니까 기도 받은 군인들 눈들이 다들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고 같은 내무반 동료들은 아무개 술 귀신 나가서 좋겠다고 놀려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부흥사는 분명 사이비일거라고 했다. 눈을 쑤시면 귀신들린 사람 눈이 아프지 귀신 눈이 안아프다. 그리고 안찰도 하지 말라. 때려가지고 아파서 귀신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안찰한다고 그래서 성경적인 근거가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예레미야 50장 14절과 51장 11절을 대면서 그게 성경적인 근거라고 해서 웃었는데, 그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땅바닥에 내려치는 사람도 있고, 때굴때굴 굴리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그 위에 올라가서 주저앉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은 천하게 대우해야 된다고 그러면서 쌍스런 욕을 막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매우 좋지 않은 자세다. 이런 서투른 치유사역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팔이 부러지기고 하고, 심지어 목이 부러지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때려서 죽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귀신들린 사람들도 귀신이 드러나서 귀신이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들을 다 기억한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치유 받더라도 나중에 엄청난 상처로 남는다. 또 오히려 그 상처들이 치유 받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역은 사랑으로 해야 되고 인격적으로 해야 한다.

민감해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가 사역을 감당할 때, 사랑으로 하되 민감해서 해야 되는데, 첫째는 귀신들린 사람에게 민감해야 되고, 둘째는 하나님의 성령님께 민감해야 된다. 다시 말하면 귀신들린 사람과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사람이 지금 뭐가 생각나는 것인지, 혹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 느껴지는 것인지, 혹은 그 사람이 어디에 통증이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수시로 대화함으로써 문제를 발견하기를 힘쓰고,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께 열려져 있어야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어떤 죄의 문제를 알리시는 것 같으면 그것을 본인에게 물어봐야 된다. 이런 감동 주셨는데, 이렇게 단정해서 말하지 말고, 이런 감동을 주시는 것 같은데 어떠냐고 물어봐야 된다. 그게 맞다고 그러면 그것을 회개하도록 하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도록 하고 이렇게 대화함으로써 그 가운데 치유사역을 계속해가면 우리는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면서도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잠언 3장 5절에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했듯이, 하나님이 귀하게 쓰는 분들을 보면 하나님께 많이 묻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분들을 옆에서 지켜보면 크게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항상 묻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있다. 늘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임의로 뭘 하나 하다가도 아! 실수했구나! 하나님께 물어보고 해야 되는데, 그러면서 다시 묻는 자세가 있다. 그러니까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면 자기 스스로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묻기를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두 번째 잘하는 것은 하나님이 감동주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게 참 귀하다. 어떻게 보면 너무 간단하다. 여러분들도 그 정도는 다 할 수 있다. 이것은 머리가 좋고 나빠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첫째는 하나님께 자꾸 물어보고, 둘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면 된다. 그래야 자라난다.

원인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번은 남아프리카에서 아주 심하게 귀신들린 14살 먹은 소년을 팀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이 아이는 일곱 살 때부터 성장이 중단된 아이였다. 성장이 중단되다 보니까 손이고 발가락이고 몸에 살이 터지고 거기다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엄마도 못 알아보는 아이였다. 귀신이 들려도 아주 심하게 귀신들린 경우였다. 그 아이를 사역하는 중에 귀신을 하나 쫓아냈는데, 그래도 뭔가 더 강한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쫓겨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님께 묻기를 주님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데, 팀 멤버 중에 한분이 말하기를 이 아이에게 마술사의 저주가 내린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 아이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그 어머니가 얘기하기를 그들이 사는 부족사회에서는 의사들이 주로 마술사들인데, 그 아이가 어렸을 때 자기 아주머니 집에서 살았는데 그 아주머니가 바로 마술사였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 아이가 거기서 마술사 심부름하고 산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그 마술사 아주머니에게 더 이상 우리 아이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때 마술사가 아이를 저주했는데, 그 뒤로 아이가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때로는 마술사의 저주도 대단하다. 무시하면 당할 수 있다. 물론 주님의 능력이 훨씬 크시다. 그래서 이제 그 원인이 밝혀진 것이다. 그래서 아이에게서 그 귀신을 쫓아냈더니 귀신이 나갔다. 그런데 그 뒤로 너무나 놀랍게 아이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 즉시 키가 자란 것은 아닌데, 그때부터 키가 자라기 시작하고, 말도 하기 시작하고, 어머니를 알아보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와 같이 그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해야 되고 그 피해자에게 민감해서 대화함으로써 치유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 있어도 과거에 어떤 영향력이 남아있을 수 있다. 왜냐면 모르고 그것을 처리 안했을 경우에 그럴 수 있다. 특별히 초대교회의 문헌을 보면, 당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침례를 받기 전에 반드시 과거의 이방종교 생활의 회개와 아울러 과거에 섬겼던 사단이나 무속신앙에 대해서 결별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것을 끊고 멀리하고 침례를 줬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를 믿을 때 그런 영적인 청소를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영향력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별히 우상숭배와 깊이 관련된 사람들일 경우와 그 부모들이 그랬을 경우에 영향력을 받을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 경우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훨씬 크기 때문에 끊으면 된다. 이전의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영향력이 파해졌음을 선포하고 끊으면 된다.

오늘 본문에 나온 거라사인의 경우를 보면, 귀신은 혼자 있게 만든다. 그래서 혼자 동떨어지게 만들므로 더 지배하기 쉽게 된다.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고립되게 만들고,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로부터 다 버림받게 하고, 육신적으로도 많은 아픔을 준다. 이처럼 귀신들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이때 우리는 그들에게 접근할 때,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접근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을 가지고 접근해서 그 원인이 뭔가를 발견하기 힘쓰고, 그 원인을 해결함으로써 그 어두움의 세력들이 이 피해자에게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하도록 근거를 제거하고, 가능하면 빨리 어둠의 세력들을 쫓아내줌으로써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자유함을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마치는 말
어떤 사람들 중에는 귀신을 어디로 보내야 되냐고 묻는다. 그래서 무저갱으로 보내느냐, 달나라로 보내느냐, 김정일에게 보내느냐, 이런 얘기들을 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부분이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성경에서 정확하지 않은 것은 그냥 놔두면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는 귀신이 어디로 가든 상관할 것 없이 그냥 쫓아내면 된다. 귀신이 어디로 갈 것인가는 주님이 알아서 보내시는 대로 가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귀신만 쫓아내면 된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쫓겨나가니까 먼저는 육신적으로 치유되었고, 그 다음은 가족관계가 치유되었고, 사회적으로도 치유되고 주님과의 관계가 치유되었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귀신들린 자 사역, 혹은 귀신들린 이런 말을 들으면 뭔가 좀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성경에는 나와 있기 때문에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그것은 좀 꺼려한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의 사역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사역이니까. 또한 억압된 자를 주님의 권세로 자유케 해주고, 그를 치유해서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잘 깨달아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또 우리들에게 배우게 하시는 대로 우리가 순종해 나가면 많은 결실들을 맺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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