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령의 은사와 사단의 모조품2024-12-12 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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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와 사단의 모조품 성령의 은사를 무시하면 사단이 모조품 은사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 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고전12:1)
현대 교회가 당면한 가장 가슴 아픈 문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이며 또한 교회가 혼란하여진다고 하여 성령의 은사를 묻어두고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없이 신령한 집을 지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면 교회가 덕이 안 된다고 하면서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집을 짓는 장비를 무시하면 어떻게 우리가 신령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한국 교계가 은사운동을 잘못하여 마치 은사는 특별한 개인, 능력 있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선물처럼 인식하게 하여 누구는 받지만 누구는 받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마치 경력이나 학력처럼 은사를 자랑하고 다녔지만 실상 그 은사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치 성령의 은사가 “특권층의 점유물”처럼 인식이 되어서 모두에게 주어지는 은사를 어떤 특정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유물로 전락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나 지도자들도 은사를 사모하지 않아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교육시키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고 은사를 묻어두어 하나님께서 다시 거두어 가시도록 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나타나심으로서 어느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나타나시며 그 나타나심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부인할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 앞에서는 겸손하게 그 나타나심을 인정하여야 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거부하고 무시하고 소멸하게 하는 배후에는 틀림없이 사단의 세력과 공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신령한 성전으로 세워져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예배자”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회복하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은사를 사용하여 신령한 집을 짓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잘못 사용하면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예 성령의 은사 없는 교회를 만들어 버리고 성도들이 믿음의 집을 짓는 도구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단은 성령의 은사대신에 모조품을 내어놓아 갈급한 심령들이 모조품에 유혹 받게 하였습니다. 신유의 은사대신에 심령술이나 최면술 혹은 무당을 불러 병을 고치게 하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대신에 투시의 은사를 가지고 성도들을 현혹하였으며. 예언의 은사대신에 점치는 은사를, 능력 행함의 은사대신에 기(氣)나 전생이나 윤회설을, 믿음의 은사대신에 심령과학이나 자기 확신, 잠재력을 가지고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였습니다.
성령의 은사대신에 사단이 내어놓은 모조품들은 교인들을 혼란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성도들이 진품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모조품에 현혹되어 거짓 선지자들을 숭배하고 따라다니며 이단에게 현혹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계 전체가 이러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가장 가슴 아픈 일입니다.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필요한 장비를 허락하지 않고 집을 짓게 하고 집을 지키게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집을 짓는 재료, 말씀만을 강조하고 이 장비를 어떻게 어떠한 곳에 사용하여야 하는지 교육이 없다는 것은 사단이 행복해서 배를 쥐고 웃다가 기절할 일입니다. 이러한 절묘한 전략을 우리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깨달음을 선지자들에게 주셨지만 이 교계는 그러한 것을 신비한 것이라고 다시 음지로 내려보내는 실수를 하였습니다.
신비한 것과 신령한 것의 차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노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전12:1,2)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자신의 신비한 경험을 익명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셋째 하늘(*히브리식의 하늘의 개념은 셋째 하늘이 곧 천국입니다)에 이끌려 갔던 경험이 있었지만 너무나 신비한 경험이라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경험을 14년 동안이나 말하지 않은 이유는 이야기하여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경험으로 자신이 교만하거나 자고하지 않도록 조심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신비한 체험만 추구하면서 생활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는 성도들을 건강한 영성으로 자라나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교회는 신비한 것(mysterious)과 신령한 것(divine)과 영적(spiritual)인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영어에서는 신령한 것과 영적인 것 모두를 spiritual이라고 표현하지만 저는 신령한 것을 하나님에게 속한 것, 그리고 영적이라고 표현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류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 부분에서 더욱 혼란을 겪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신령한 것입니다. 신령한 선물입니다. 신령한 곳으로부터, 신령한 분이 주시는 신령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사용하게 되면 “그 사람은 너무 신비적으로 치우쳤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사용해야 하는 은사를, 교인들에게는 전문적인 도구인 은사를 “신비한 것”이라고 몰아 부쳐서 교인들이 이 은사를 받고도 “쉬쉬”하면서 음지에서 사용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잘못 사용하기도 하고 잘못 듣기도 하고 잘못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음지에서 “쉬쉬”하면서 은사를 사용하고 있는 동안 사단은 “신비한” 모조품을 가지고 성도들을 유혹하여 모조품 쪽으로 쏠려가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영, 혼,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2분법, 3분법, 4분법, 혹은 6분법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또한 한편에서는 이렇게 나누는 것을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온전하게 한 인격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나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 혼, 몸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영이고 어디가 혼이고 어디가 몸인지 분명하게 나눌 수 없는 한 인격체인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3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인격을 혼란하게 분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구별하여 영, 혼, 몸이 하는 기능을 이해하고 보다 더 가까이 주님에게로 나아가고자 함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인간을 영, 혼, 몸이 있는 실체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신학적으로 3분법을 선호하고 있는데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설계도인 성막을 보게 되면 성전 뜰(몸), 성소(혼), 지성소(영)로 구분된 것을 보게 되고 영, 혼, 몸이 온전해 질 때 이러한 성소도 온전하게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영적(spiritual)인 존재라고 하여 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영은 무당에 대하여 열려있고 어떤 영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의 영이 부처에게 열려 있으면 부처 영성이라고 말하고 공자에게 열려있으면 공자 영성이라고 말하며 소크라테스에게 열려 있으면 스토아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열려 있으면 기독교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영적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가 없습니다. 무당도 점치는 자도 영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보다도 목회자들보다도 더욱 영적입니다. 예를 들면 점치는 자들은 우리보다 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처녀가 시집을 가고 싶은데 점쟁이한테 가서 어느 때 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 같으냐고 물으면 제법 그럴듯하게 대답을 해 줍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기도하며 기다립시다”라고 대답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점쟁이가 더 영적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점쟁이는 갓과 므니라고 하고 운(spirit of fortune 사65:11)의 귀신으로부터 정보를 받아서 전하는 것 뿐입니다. 그들이 영적이긴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령한 지혜를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당들은 더 우환을 잘 쫓아내며 어느 때는 믿는 자들보다도 더 쉽게 병을 고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 신비한 것을 사모하는 자들은 그런 곳으로 마음이 쏠리게 됩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 가운데에도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점쟁이들을 찾아가는 비율이 목사님을 찾아가는 비율보다 높다고 합니다. 그것은 점쟁이들이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신비하게 앞날에 대하여 점을 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나심은 이러한 신비한 것과 다릅니다. 초월적인 것이라고 하여,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여 이것이 모두 신령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영적인 것이라고 하여 모두 신령한 것도 아닙니다. 신령한 것은 주님의 주도적인 사건, 성령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신령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한 것들은 더러운 영과 접촉하여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으며 역사적 현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도 신비한 종교입니다. 신비한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신비한 내용이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어 있으며 확실한 화육(incarnation)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현장이 배제된 신비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의 신비는 이 땅에 성육신 한 신비, 곧 신령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이며 성령의 나타나심이며 성령님의 주도적인 사건입니다. 또한 기독교의 신비는 공동체적이며 역사적입니다. 이 신비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누며 함께 체험하며 함께 성장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은사에 대하여 배우지 못하고 무지하면 이 신비한 것과 신령한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여 영적인 것, 초월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 모두를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착각하여 우매하게 좇아 다닐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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