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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영적 충돌2024-07-25 16:42
작성자 Level 10

 영적 충돌

 

  우리가 중보기도를 할 때 어떤 사람은 기도가 잘 되는 데 어떤 사람은 전혀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기도가 되지 않아서 힘이 드는 것입니다. 묵상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묵상이 잘 되고 이미지도 잘 떠오르는 데 어떤 사람의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몇 번을 시도해도 역시 잘 되지 않지요. 구성기도 또는 방언 기도에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도 임하고 기도제목이 제대로 떠올라 기도가 잘 되는 데 유독 어떤 사람에게만 전혀 감동이 오지 않고 기도의 말문이 막힙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영적 충돌(spiritual collis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어떤 특정한 사람과 자신 사이에 영적으로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보기도자가 경험하는 영적 충돌의 가장 흔한 까닭은 그 사람과의 영적 코드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코드의 불일치는 그 사람과의 영적 색깔이 다른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영적 수준이 다른 것까지 포함하지만 수준이 다른 경우는 충돌에까지는 이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색깔 즉 영적인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성향이 다르면 우리는 일상에서도 많은 마찰을 경험합니다. 서로 종교적으로 추구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대화한다 하더라고 피상적이고 깊은 공감을 피차 얻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 사람과 거리가 생깁니다.

종교적 성향이 다르다는 것에는 은사가 다른 것까지 포함합니다. 구체적인 일에 있어서 은사가 다르면 충돌을 일으킵니다. 특히 교회에서 봉사하는 경우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헌신해야 하는데 이런 은사를 무시 당하고 은사와는 상관없는 부서에서 봉사하도록 강요 당하는 경우 영적 충돌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영적 상처를 입게 되고 심하면 갈등으로 인해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까지 있게 됩니다.

둘째로 흔한 까닭은 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는 그 사람의 죄가 우선입니다. 그리고 다음이 그 사람과 자신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 그 당사자의 죄가 심각하여 하나님의 징계가 임박한 경우 중보기도자의 기도가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징계에 들어가게 되며 어느 정도 죄에 대한 징계를 거쳐야 비로서 중보기도가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당사자가 여러 사람의 중보기도와 하나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고 있는 경우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최후 수단으로 징계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는 그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취득하게 되고 그 사람은 극심한 마귀의 시험과 올무에 걸려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들어서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일체의 중보기도를 하나님은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과 그 사람 사이에 불편한 관계에 있을 경우 기도가 막힙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불편함을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그 사람과의 오해나 다툼이 있는 경우 우리의 영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 상처가 그 사람으로 인해서 계속 낫지 않고 고통을 주기 때문에 기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생긴 마찰은 육신적인 방법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 사람과 화해한 후에야 비로서 진정한 중보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나타나는 원인은 아직은 그 사람에 대한 중보기도의 단계가 아니거나 자신에게 합당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자신과 구체적인 연관과 관련이 적은 대상에 대해서는 중보기도가 막연하게 이루어집니다. 막연한 대상에 대해서는 중보기도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자신과 거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장 효과가 큽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중보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너무 막연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중보기도는 일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계속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질적 연관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막연한 대상에 대한 기도는 형식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 대한 기도는 한 두 번에 그치고 말지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진행되지 못합니다. (여기서 나라와 민족에 대한 포괄적인 기도는 예외입니다. 이 점에 대한 문제를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음에 기회를 얻어 다루기로 합니다.)

자신이 그 사람에 대해서 중보할 수 있는 자격이 없거나 합당한 위치에 있지 못한 경우 중보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자신이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모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자신이 그 사람에 대해서 영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있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 원인 중에 하나는 자신의 처리되지 못한 죄와 그 사람의 처리되지 못한 죄가 일치하는 경우 그 사람에 대한 중보기도의 위치에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처리되지 못한 죄는 우리의 기도를 약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자신의 죄의 유형과 그 사람의 죄의 유형이 같거나 비슷한 경우 그 사람에 대한 중보기도자로 합당하지 못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은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자신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아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지요. 이런 까닭은 그 죄로 인해서 영적 양심이 무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심각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보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구체적으로 연관되어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중보기도의 힘은 나타납니다. 그러나 죄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충돌의 또 다른 까닭은 앞에서 언급한 것들과는 다른 각도의 내용으로써 중보기도자의 영적 성숙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한 충돌이 아니라 중보기도 대상자 전체에 대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초기에는 부분적으로 충돌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되던 중보기도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서서히 기도 중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민한 사람은 즉시 느끼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배워가는 과정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하는 사람이 막연한 기도를 하는 것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할 정도의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제부터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중보해야 하기 때문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중보기도의 단계 즉 예언적 중보기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식의 말씀을 받아야 하는 데 그러려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성령께서 인도하기 위해서 중보기도자의 기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육신적 기도를 가로막고 영적인 기도로 이끌기 위해서 영적 충돌을 광범위하게 일으킵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 기도가 막히고 되지 않습니다. 분위기도 삭막해지고 힘이 들어 육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방언으로 기도해도 답답합니다. 일반적인 기도는 잘 되는 데 중보기도는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자신에게 나타나면 이것은 자신의 영적 수준이 한 단계 상승되는 징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기도를 마치고 중보기도에 들어가려는데 충돌이 일어나면 기도를 멈추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기도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 사람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기다리십시오. 이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그 짧은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기도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입니다.

잠시만 기다리면 자신의 생각 속에 지식의 말씀이 임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중보기도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이렇게 안 지식을 바탕으로 기도하는 것이 예언적 중보기도이며, 성령의 인도에 따른 중보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기도를 하기 원하면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능력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습니다. 중보기도 역시 기다림을 통해서 능력 있는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충돌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호가 오면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참아 기다려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글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고 어떤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 카페를 찾는 모든 분들이 하나 같지 않습니다. 영적 수준이나 성향도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런 다양한 분들을 염두에 두고 이런 글을 씁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그 내용이 보편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공교육은 학력 차가 있는 여러 학생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나 학원교육은 최고의 수준을 겨냥하여 교육합니다. 그러므로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구체적이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치로 해서 이 글도 역시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여러분이 이해하기 바랍니다. 더 깊고 구체적인 내용은 개별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더 깊은 내용을 알기를 원하시면 개인적으로 저에게 메일로 질문을 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신의 영적 수준에 맞는 맞춤식의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공교육에서 오는 한계를 사교육으로 보충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역원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역원에서는 이론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훈련을 통해서 그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수준에 맞는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이루는 실질적인 길을 열어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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