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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은사

영성이야기

제목투시라는 말의 의미2024-07-22 22:36
작성자 Level 10

 투시라는 말의 의미

 

  투시(透視)라는 말은 독심술과 비슷한 내용인데 독심술은 심리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이지만 투시는 그런 기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생각을 읽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고전 2:11) 라는 말씀처럼 사람의 생각을 안다는 것은 영의 일에 속하는 것이지요.

독심술은 사람의 태도와 얼굴빛 등을 참고로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유형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대충 짐작하는 기술이지만 투시는 영의 활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을 일반적으로 투시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투시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영적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투시의 은사’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투시의 기능은 그것 하나로 독립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그런 은사들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은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기능 가운데 한 부분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투시는 환상과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의 현재의 영적 상태를 환상으로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주로 상징을 동반하는 데 영적 상태가 어리면 어린 아이로 보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나 몸 전체가 보이고 이어서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형상이 그 사람의 이미지 위에 겹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악한 영에 휩싸여 있거나 점령 당한 사람인 경우 커다란 구렁이나 뱀에 휘감겨 있는 형상이 나타납니다.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다면 검게 보이거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의 이미지 위에 검은 이미지가 겹치게 보이기도 합니다. 마귀의 영향을 받거나 공격을 받는 사람인 경우 그 사람의 이미지 곁에 검은 형상의 이미지가 따라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면 밝고 환한 형상을 하고 있지요. 밝고 상쾌한 분위기가 보이며,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배경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 영적 분별을 가능하게 하기도 합니다. 투시는 지식의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상상하거나 직접 만날 경우 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마음 속에 그대로 전해집니다. 이런 기능을 통해서 지식의 말씀을 받는 기능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나 영분별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그 초기에 이런 투시라고 말하는 현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은사가 그렇듯이 초기에는 그런 은사를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집중적으로 그리고 다발적으로 나타납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몸이 쑤시거나 저리는 현상을 매일 경험합니다. 축사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소름이 끼치거나 머리카락이 솟는 경험을 계속 하게 되지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말씀을 수시로 받게 됩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활용하여야 할 단계에 이르면 이와 같이 집중적으로 무작위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이 왜 이렇게 무식하게(?) 역사하시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좀더 세련되고 합리적이고 질서있게 임하지 않고 무질서하고 무절제하게 임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부흥회에서 보면 그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절제 없이 마구잡이로 분위기에 맞지도 않게 임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분수없이 마구잡이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절제하라고 합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이 제대로 절제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실 때 귀신들린 사람이 갑자기 거품을 뿜으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고상하게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귀신에게는 이 순간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매우 중대한 순간입니다. 최후의 순간에 고상한 것이 말이 됩니까? 이와 같은 이치로 우리의 죄악 된 몸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순간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흥분된 순간이겠습니까? 이 흥분된 순간에 점잖게 반응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을 보세요 콘서트 장에서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면 미친 듯이 날뛰지 않습니까?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영이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우리의 영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게 됩니다. 다윗이 성령이 충만하자 옷을 벗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춤추며 기뻐했지요. 그게 진실된 기쁨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처음 배우면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처음 골프를 배우는 사람을 보십시오. 밤낮 골프 공만 눈에 보입니다. 푸른 색만 보면 필드가 떠오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골프자세를 취합니다. 남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는 것이 제 정신이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처음 경험하면 마음이 설레이고 그 일로 인해서 일상이 변합니다.

은사를 받으면 우리의 영은 오로지 그 일로 인해서 흥분하고 들뜨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투시는 시도 때도 없이 대상을 가릴 것도 없이 나타납니다. 보는 사람마다 속생각이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물론 그 생각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사람을 대하면 생각이 떠오릅니다. 실제로 마주치지 않아도 생각만 해도 그 사람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생각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런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킵니다.

어떤 사람과 마주 앉아있는데 그 사람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마치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뚜렷하고 생생하게 전달되어오는 순간 그 사람이 그 내용의 말을 직접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을 경험하면 자신에게 지식의 말씀이 임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여년 전에 지금 저와 함께 사역하는 JK 사역자가 결혼할 상대를 데리고 저에게 소개시키려고 찾아왔습니다. 아직 결혼 결정을 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상대방을 저에게 소개시키고 좋은 말을 해 주어 결혼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얻을 생각에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저는 동네 카페에서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저는 상대방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주어야 될지 몰라 우선 내가 알고 있는 JK 사역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자리에 함께 앉는 순간 지식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지금 상대방이 궁금해 하는 생각이 저의 머리에 마구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궁금해 하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해를 시켰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동안 계속 궁금해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고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저는 화장실로 갔습니다. 그 사이에 상대방이 JK 사역자에게 자신에 대해서 미리 저에게 정보를 준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전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상대 여성은 그런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어떤 은사가 임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 이런 것을 경험하는 초보 은사자는 그저 신기하고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나타나는 투시로 인해서 때로는 괴롭기도 할 것입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좋은 면만 듣고 보는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부분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좋은 것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역자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귀찮고 거북스러운 일을 경험해야 합니다. 항상 입맛에 맞는 것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의도대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우 불쾌한 일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타인의 불행한 일에 관여합니다. 골치 아프고 귀찮은 일을 자기 일처럼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쾌한 일보다는 불쾌한 일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하고 실패하면 그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는 주님에게 합니다. 그런데 해결되지 않으면 보이는 사역자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은사가 성숙되면 투시는 고유한 은사의 한 부분의 기능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신유의 은사는 주로 병과 관련하여 병의 심각함이라든가 어떤 부위에 병이 들었는지 그리고 어느 부위에 손을 얹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기능으로 발전합니다.

영분별의 은사를 받았으면 주로 영적 상태에 대한 구분을 위해서 그런 기능으로 발전합니다. 예언은 지식의 말씀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투시라는 말은 은사를 인식하고 그 은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기능이지 독립적인 은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투시의 은사라는 말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을 즐기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독립적인 은사로 생각해서 그 일에만 매달리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그 기능이 어떤 은사를 위한 것인지를 구분하고 그에 따른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한 한 기능일 뿐임을 알아야 하며, 은사는 다양한 기능을 복합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한 가지 기능만 가지고 사역에 임하면 실수를 많이 하게 됩니다. 사역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많은 기능을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은사는 반드시 교육을 받아서 성장해야 합니다. 교육 받지 않으면 덕을 세우는 일보다 해를 끼칠 위험이 높습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초기에는 한 두 가지 기능만 주어집니다. 이 기능을 잘 익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면 그 기능은 깊어지고 다양해집니다. 그러나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거두어집니다. 이는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휼륭한 지도자 밑에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받는 것은 오로지 은혜로 받지만 그것을 개발하고 향상시켜 더 많은 능력을 받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순종함에 달려 있습니다. 처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맛보기일 뿐입니다. 맛보기를 통해서 진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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