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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초대교회 때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2025-11-08 20:46
작성자 Level 10

초대 교회 때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시대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성경과는 다르게 구원 받을만한 사람들이 넘쳐남을 보게 됩니다.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으나, 목사님들도 자신이 가르치는 교인들을 향해 교인들 대부분이 구원받았음을 기정 사실화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살펴보면, 지금의 가르침과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너무 적다며, 한탄하듯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다 하시면 정말 그런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장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장 13-14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구원받을 믿음이 거의 없다)" (누가복음 18장 8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구원 받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허나, 이 시대 교인들은 넓은 문을 좋아하며 또 그리로 들어가려 하면서도 구원 받는 걸 당연하다 여기는데,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좁은 문... 그 의미를 깊게 돌아본 적 없었고, 

실상이 아닌, 그저 막연히 상징적 추상적으로만 취급했기 때문에  가르치는 목사님들과 교인들이 좁은 문의 진짜 의미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세상 이방인들이 주일날 편히 쉴 때, 주여주여 주님을 믿노라 하며, 열심히 주일 지키는 게 좁은 문이 아닙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의 길, 즉 자기 인생을 실상 전면 부인(회개)하면서 주님께로만 올인하는 길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 때의 상황을 보면 초대교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입술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해 개인적 삶은 물론 자기 소중한 목숨마저 과감히 버리고자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자기 구원을 맹신하면서도,  왜!!! 목숨까지 불사하며 거룩의 길을 가는 초대교회의 신앙이 없을까요... 

초대교회 때의 교인과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의 DNA 구조가 달라서일까요? 

아니면.. 단지 태어난 시기가 다르기에 시대적 가치관의 차이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 시대 사람이나 지금 시대 사람이나 주님께서 창조한 똑같은 사람이고 아담과 하와의 유전자를 지닌 한 핏줄일 뿐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초대교회 시절에는 열매가 있는 참 회개를 했기에 거듭난 사람들이 지금보다 많았던 것이고, 

지금 이 시대는 온전한 자기 부인의 회개가 퇴색되었기 때문에 거듭나 구원 받는 이들이 매우 적은 차이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초대교회 때의 신앙 환경은 엄청 열악했습니다. 

이처럼 시대만 다를 뿐, 그 시대의 그들과 지금 우리는 똑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은 현재와 비교했을 때 너무 차이가 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믿음에 대한 방향성의 차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인간 편의에 맞춰 제작한 수많은 교리의 난립으로 인하여 사람 중심으로 방향을 틀었기에, 절대적인 믿음의 본질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의 믿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여, 그 많은 이 시대의 교인들을 회개와 거듭남의 십자가 좁은 길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점점 밟히는 방향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으로도 구원을 기정사실화 하며 희망고문 하게 만드는 이 모순적 상황이 너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 시대의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하나님입니다. 

시대가 다르다 해서, 시대에 맞게 성경의 본질이 휙휙 바뀌는 게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영성이 거룩하고 귀하다면 우리도 생각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그대로 따라가는 게 참된 믿음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때의 믿음은 그 시대에 맞는 믿음이고, 우리는 또 이 시대의 믿음에 맞게 구별되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그건 사람 기준에서 나온 이론일 뿐, 주님은 똑같은 기준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이천 년 전 초대교회 교인들이 접한 십자가 믿음의 본질은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 시대나 지금 시대나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후, 믿음의 거룩한 모습으로 살다 호흡이 멈춘 후, 

그토록 갈급하던 주님과 천국에서 영원한 동행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절대적 본질은... 창세부터 지금까지 늘 같았고, 앞으로 그럴 것이기에 절대 사라지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역시 초대교회 시절처럼 자기를 부인한 후,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무조건 따라가는 그대로의 모습이 되어야만 합니다. 

추상적 상징적 차원의 십자가가 아니라, 내 마음 판에 분명히 새기고 내 삶에서도 실상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 사람들의 영성을 바라보면서 성경 속.. 파노라마처럼 기록된 한 장면으로만 인식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초대교인들의 거룩했던 영성이, 우리의 실상적 영성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십자가의 거룩한 영적 모습은 이천 년 전 에 끝난 과거 완료가 아닙니다. 

이는 현재 진행이며, 천국에 가서야 완료되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회개하고 거듭나 옛사람의 구습을 벗었다면 거듭남의 희열과 기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듭남이 삶에 흘러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계속 성령으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나)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라디아서 5장 25절) 

 

이것이 진정 내가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므로 그 모습 그대로 나오는 실상의 모습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런데 이 시대의 많은 선생들은 아무 부담 없이 단지 입으로 주님을 시인했다는 이유 하나만을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고, 또 구원 받은 것이니 이제 모든 것이 완성된 현재 완료형처럼 가르치고 배웁니다. 

십자가를 과거의 추억처럼 인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걸 예비하여 화려한 주단을 깔아주셨으니 이제부터 우리는 화려한 주단을 걸으며 누리는 데만 집중하라 가르칩니다. 이제는 내가 죄를 지어도 십자가 보혈 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깨끗하게 없어졌으니, 죄에서 해방되었다 하면서 아무런 부담감 없이 여전히 육의 열매로 살아가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십자가의 값진 은혜라 하고 또 자유함이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은혜이고 믿음이고 자유함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참고로, 바울 사도가 기록한 입술 시인은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했을 무렵, 

목숨줄을 쥐고 위협하는 핍박자 앞에서도, 성령으로 거듭난 초대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은 내 구세주'라 당당히 고백했던 그 시대적 상황을 전한 말씀입니다. 또한... 미래에 환란이 닥치면 또 그런 상황이 도래할 것인데 그때도 초대교인처럼 그렇게 고백하는 것... 

바로 이런 영의 시인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롬 10:10) 

하여 의에 이르는 거듭남이 없으면 죽음이 너무 두렵기 때문에 예수님을 내 주시라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시인이 참고백이라 하는 분들 중, 탈레반처럼 총칼을 든 무서운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만약, 내 목숨을 위협하는 총칼 앞에서도 시인한다면 그 믿음은 참입니다. 

그래서 순교도 내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시대에, 아무 부담감도 없이 목사님이 유도하는 대로 따라 하는 그런 시인이 아닙니다. 그런 시인을 구원받는 시인이라 믿으니 

여전히 변화됨 없이 육을 벗 삼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현상은 실제 성령님의 온전한 인도를 받은 적 없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진짜 자기를 부인 회개한 적도 성령으로 거듭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회개하고 거듭나, 그리스도의 성령이 임재하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법(성령의 법, 사랑의 법)으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를 값진 은혜(?)로 덮으며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판단하기에 작다고 여기는 죄도 못 견디도록 내 안의 성령께서 들어내기에 늘 십자가를 품고,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돌아보는데, 이게 바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죄를 대하는 필연적인 태도입니다. 

은혜의 값진 영향력은 죄를 덮으며 없던 걸로 하는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죄를 드러내 회개로 이끄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으로 인도됨을 생각할 때, 어떤 기적이나 남들에게 없는 징조나 표적이 있는 것으로만 여깁니다. 

절대, 그리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의 성령님은 그런 것보다 우리를 매일매일 십자가로 인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의 사람은... 마귀가 권세 잡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한시라도 십자가(회개, 자기 부인)와 떨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멀리하는 순간, 육신의 모양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모습이 십자가에 죽었다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 길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장 34절)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닌 내 안의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기에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십자가에 죽고 온전히 거듭났다면, 

주님께서 날마다 나를 붙잡아 십자가를 지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심장에서 뿜어지는 뜨거운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자기를 부인함) 

(고린도전서 15장 31절) 

 

바울 사도의 이 모습이 거듭난 사람에게 존재하는 성령의 진정한 인도이자 동행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날마다 죽는 것이며 현재 진행형이며, 천국에 가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끝까지 붙드는 사람에게는 마귀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없는 믿음과 은혜와 구원은 결단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초대교인들처럼 자길 부인하고 죄로부터 돌이키고자 한다면 당연히 초대교들의 영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천 년 전의 초대교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유전자의 사람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거듭난 참믿음을 바탕으로 실상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지, 

거듭남 믿음 없이 허상의 종이 십자가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차이입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 때입니다. 

반드시, 초대교회의 뜨거운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디~ 나를 부인 회개하고 거듭나 그들과 같은 영성이 되시길 간구합니다. 

그렇다면, 초대교인들처럼 반드시 구원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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