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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낡은 전통이 유지되는 까닭은2024-07-22 22:36
작성자 Level 10

 낡은 전통이 유지되는 까닭은...

 

  지도자들이 그 집단을 이끌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와 형식을 만들어내야만 했다는 사실을 앞의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이 제도와 형식은 그 후 후계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면서 그 배경은 기억되지 않고 오로지 그 틀만 전해지면서 화석화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제도와 형식이 지니는 의미조차 알지 못한 채로 그냥 답습할 뿐입니다. 이런 제도와 형식은 때로는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일부 지도자들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형성된 것들도 있습니다.

제도와 틀이 당시에는 정당한 것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시대가 바뀌어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들도 있지만 그것이 전통이라는 이유로 그대로 유지되는 것들과, 지도자의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이유 때문에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유지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제도와 틀은 다수의 무지한 지도자들 때문에 항상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에 대한 불합리성을 제기하는 소수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가혹한 핍박을 가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찾아보면 ‘좌측통행’이 있습니다. 이 제도는 서구사회에서 운송수단인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사고를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영국은 좌측통행을 통행의 법칙으로 규정해서 모든 사람들이 좌측으로만 보행하도록 제정했으며, 운송수단도 이에 따랐습니다. 이것을 일본이 그대로 받아들여 좌측통행을 통행규칙으로 정했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교육을 받은 우리는 이 통행방식을 따랐습니다.

미국은 영국과 다른 보행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우측통행입니다. 사람과 우마 모두 우측으로 통행하도록 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방이 되면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어 미국 문화가 우리 사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적 혼란기인 이때에 우리는 이중적인 이국문화로 인해서 혼란이 생겼습니다.

미국은 우측통행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배운 좌측통행이라는 상반되는 통행질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들여온 자동차는 우측으로 통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이 만들어놓은 철도구조는 좌측으로 통행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30여 년간 좌측통행에 익숙해진 사람의 보행이 하루아침에 우측으로 바뀔 수 없었습니다. 몸에 배인 습관을 고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혼란기인 이 시기에 어느 하나도 정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내왔고, 지금까지 교통수단은 우측, 사람은 좌측이라는 모순투성이 보행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선지하철은 좌측, 민선지하철은 우측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제도를 아직도 반성 없이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선택하는 일에서 우리 교회는 개역판을 고집합니다. 이는 서구사회가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라는 성경을 고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흠정역은 영국 국왕 제임스의 통치시기에 번역한 것입니다. 제임스 1세는 어린 시절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얻기 위해서 청교도와 가톨릭을 탄압하고 국교회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으며, 의회정치를 무시하고 독단적인 정치를 했습니다. 그의 재임기간동안 의회는 단 4회만 열렸습니다.


그는 무지하고 탐욕이 많은 세속적 군주였으며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 성경번역을 시도했고, 그때 나온 책이 흠정역입니다. 왕권신수설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절대적 군주로 서려고 시도했고, 의회와 늘 충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귀족들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 아들 찰스 1세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왕이 되었으며, 더욱 강력한 군주제를 만들어내려고 했습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런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군주의 지지를 빌미로 흠정역의 절대성을 상업에 이용했습니다. 출판업자들은 흠정역이야말로 가장 표준적인 것이라고 광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표현이 ‘공인본문’(Textus Receptus)라는 말입니다. 자신들이 만든 성경이 잘 팔리게 하기 위해서 공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다른 번역본은 비공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업적인 표현은 제임스와 찰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누구도 이 문구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흠정역이 마치 성경의 표준인양 인식하게 만드는 오류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상업적 정치적 광고 문구에 지나지 않은 이 표현은 다른 상경과 차별화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고, 자연적으로 제도화하고 형식화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번역한 우리의 개역 성경 역시 이와 비슷한 까닭으로 인해서 절대적 권위로 인정을 받고 지금까지 대다수의 교회가 개역 성경을 사용합니다.


100여 년 전에 사용하던 단어들과 표현으로 가득한 개역성경은 이제 더 이상 우리들에게는 맞지 않는 심각한 오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폐기되어야 할 성경입니다. 그 동안 개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지난 시대의 단어와 어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요즘 세대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단어와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번역본이 많이 나와 있지만 그럴 때마다 당치 않는 주장을 펴면서 거부해왔습니다.

사람이 번역하는 모든 성경은 원문에 비교할 때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번역하는 사람의 주관이 배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역성경 역시 다른 번역본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고, 번역의 오류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을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나 흠정역을 공인본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이 편파적인 오류인 것입니다. 번역본에 있어서 공인본문이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제도와 틀이란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상업적 의도를 망각한 채로 맹목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까닭은 그것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득을 보아온 집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학자들이란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학문적인 틀 속에서 자신의 삶이 보장됩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거나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그 틀이 모순이 있고 불합리하지만 그 틀을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조금 덧붙이거나 개조하는 수준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송두리째 허물고 전혀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무리가 더 많기 때문에 그들 전체를 적으로 돌려 다툴 용기도 능력도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행할 뿐이기 때문에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불합리한 틀은 그대로 유지되며 곪을 대로 곪아야만 갈아버리게 되는데, 이때도 용기 있는 개혁자가 나타나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제도와 틀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다니는 옷은 유행에 뒤지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면서도 제도와 틀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좀처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지도자들의 눈가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낡은 것이 좋다는 가르침을 받게 되면, 분별력이 사라져버립니다. 우측과 좌측의 이중통행 방식의 혼란 속에 계속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해되지도 않는 문구로 가득한 개역성경은 계속 사용될 것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시간이 흐르면 개역성경에 어느덧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고 할지라도 계속 입고 다니면 그것이 오히려 익숙해져버립니다. 올바르지 않은 자세를 교정해주지 않으면 그것에 몸이 익숙해져서 비정상이 오히려 더 편해지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삭막한 신앙생활이 오히려 더 편해져 버렸기에 열심을 내거나 영적 경험을 추구하는 일이 이상해져버렸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듯이 하는 성경공부가 더 익숙해져버렸기에 성령이 인 치듯이 가르치는 영적 경험에 관해서는 오히려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도는 시대가 바뀌면 당연히 바뀌어야 할 것이지만 대중은 앞에서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면 맹목적으로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소요가 일어날 초기에는 대중이 분명히 무언가를 보고 달려가지만 뒤를 따라 달리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달리는지 모르고 달립니다. 곁에서 사람들이 우루루 달려가니까 영문도 모르고 달립니다. 안 달리면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군중심리라는 것이지요. 상업적인 지도자들은 이런 군중심리를 자극하고 이용합니다. 최근에 나온 다빈치코드 역시 이런 상업적인 이익을 위해서 기독교의 일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을 자극해놓았습니다.

그 결과 흥행에 성공했고 제작자들은 돈을 벌고자 하는 그들의 목적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이류 영화에 지나지 않을 내용을 가진 이 영화가 기독교를 자극시킴으로써 돈을 적게 들이고 대단한 홍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제작자들은 이 영화를 만들 때 이미 이 모든 것을 계산에 넣었고, 그들의 계산대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군중은 상업적 목적에 쉽사리 휘말리는 것입니다.

마케팅은 전문가들이 철저히 분석하고 전략을 세워 무방비한 대중을 공략합니다. 이것이 현대 상업광고의 힘인 것입니다. 조직적 언론의 힘에 의해서 군중은 휘말립니다. 군중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며, 바람에 휩쓸리는 힘없는 갈대와 같기 때문입니다. 일단 한 쪽으로 휘말려들면 걷잡을 수 없이 쏠려가는 것입니다. 이 일방적 쏠림을 만들어내는 최초의 힘이 어떻게 효율적으로 작용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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