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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영의 실마리를 잡는 일부터2024-07-22 20:47
작성자 Level 10

영의 실마리를 잡는 일부터

 

  요즘 영성에 관심을 많이 가지면서 ‘하나님의 음성듣기’ ‘예언’ 등에 대한 컨퍼런스가 여러 곳에서 자주 열립니다. 이런 주제를 가지고 열리는 세미나 등에 사람들이 모이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유익을 얻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일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서 이런 주제의 강연이 자주 열리고 있는데 대부분의 강사가 미국인임이 조금 아쉽습니다.

이것은 아직 우리나라에는 이 부분에 능력 있는 사역자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영적 능력에 대해서 이론적인 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 지식 수준만큼 역사가 나타나지 않아서 갈등하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영의 일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지식이 부족했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오늘날처럼 지식이 풍성해지고 있는 이 때에는 ‘아는 것이 곧 힘’인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영의 일도 아는 만큼 역사가 일어나며 더 빨리 그리고 더 깊이 나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의 현상들과 역사는 그것이 자신을 통해서 나타날 때 바로 인식하고 다음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식을 전체적으로 알고 있으면 영의 흐름과 그 작용에 대한 분명하고 구체적인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전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큰 시각에서 영의 움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혼란이 적어집니다.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은 오히려 혼란을 만들어내며 자주 시행착오를 겪게 되어 어렵게 느껴지게 됩니다. 영의 다양한 기능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을 가지고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어떤 한 부분이 사역의 중심에 놓이게 되면 다른 기능은 보조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환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선 신유가 중심이 됩니다. 이 경우 정확한 치유를 위해서는 지식의 말씀이 필요하며 이는 예언의 기능에 속하며, 또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죄에 기인한 것인지 악령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영 분별력이 필요하지요. 이처럼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예언과 영분별이 보조 수단으로 동원됩니다. 그리고 신유를 행하는 사역자는 이 부분에 대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 장님처럼 그저 환부에 손을 얹고 기도할 뿐입니다. 나을지 안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나으면 좋지만 치유되지 않으면 난감합니다.

영에 관한 총체적인 지식이 우선 필요합니다. 모르고 행하는 것보다 알고 행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전에라도 영적인 지식을 잘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영적 지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어설픈 목수가 연장 나무라듯이 영적 지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능력을 받으면 자칫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교만의 영에 사로잡히면 그 다음에는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식이 없이 사역을 행하기 때문에 ‘나 홀로 사역’이 되어 갖가지 문제를 만들어내며, 올바르지 못한 조언을 하게 되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지식을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능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과 실제가 제대로 연결되어야 하는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은혜도 받고 기름 부음도 느끼지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서 실망하고 또 다시 다른 세미나를 찾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 능력은 은사와 권세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미 설명했는데, 우리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배경으로 영적 사역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그 일에 전문가가 되게 하려는 뜻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성령께서 나누어주시는 것이지만 권세를 배경으로 오는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언제든지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부분에서 능력을 개발하고 드러내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외 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로서 능력을 행하는 일과 주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들어야 하는 주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들을 수 없어서 갈등이 심해집니다.

이론과 실제는 때로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론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실제적이 경험이 거의 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원리를 발견하고 체계화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론에서 출발해서 이론으로만 끝나고 마는 것이지요.

실제적인 경험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는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고 그 속에서 원리를 발견해서 정리한 이론은 가장 중요한 실마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원론적인 수준을 벗어날 수 없으며 논리를 위한 이론일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우기가 원하는 바는 바로 실제적으로 역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 것입니다.

많은 컨퍼런스가 자주 원론적인 이야기로만 끝나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실질적인 훈련을 한다고 해도 각 사람마다 다른 특성을 찾아내지 못하고 뭉뚱그려서 행하기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해서 풀려나오지 못하는 것이지요.

영성은 각 사람마다 다르고 수준도 다르기 때문에 개인적인 가르침이 필요하고 실질적으로 개발될 수 있도록 곁에서 살피고 조언해 줄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하지만 다수의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컨퍼런스는 동기부여는 되지만 실질적으로 능력을 개발하고 이끌어내는 데에는 조금 미흡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훈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떤 한 부분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영성훈련을 통해서 능력을 얻고 개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임상적 경험을 쌓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언이나 축사나 신유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문제를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임상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날마다 이론적인 연습만 하면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실전적인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은 실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닌 문제는 심각하고 처리 되어야 하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훈련이라 할지라도 마음가짐은 전문가의 그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주님이 실질적인 문제 앞에 서게 함으로써 무척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씩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예민한 관찰로 성령이 저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지식을 마음에 깊이 세기고 다음에 그것을 적용했고 그렇게 해서 차츰 영적 지식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성경을 살피고 그리고 성령께 끊임없이 질문을 했습니다. 수많은 날들을 그 문제를 곰곰이 묵상하면서 이해될 때까지 줄곧 주님 앞에 그 문제를 들고 나갔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곧 문제해결의 열쇠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첫 단추를 제대로 꿰는 일이 중요한데 이것이 실제로 되지 않아서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도 간단합니다. 성령께서 자신의 앞에 내어놓은 문제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실마리지만 그것이 서툰 초보자에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지요. 자신 앞에 놓여진 성령의 은혜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꼼꼼해야 합니다. 영의 시각으로 보아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육신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는 훈련에 익숙한 우리는 영적 시각을 갖추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곧 익숙해집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자세 교정만 되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과정이지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자신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제가 ‘이것이 성령의 음성입니다.’라고 지적해 주어도 선 듯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미한 성령의 음성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 때문이며, 느낌이라는 수단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게시판에서 수도 없이 이 느낌에 대해서 강조해 왔는데 성령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배경은 처음부터 느낌이며 끝까지 느낌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지요. 성경은 수도 없이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 이 믿음과 연관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 ‘믿음’이라는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느낌’입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이 느낌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능력을 행하는 수준이 결정됩니다. 이것을 세부적이고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느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영성훈련에 들어가서 이 느낌을 배우기 시작하면 그것이 곧 믿음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 마치 물이 스며들 듯이 생각 속에 들어오는 불확실한 어떤 느낌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너무 미약해서 느낌이라고 여길 수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강렬해서 그것이 자신을 온통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이 느낌대로 행동하고 선포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주저하게 되고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면 부정적인 상황들이 마음속에 물밀 듯이 들어옵니다. ‘이 말을 했다가 망신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창피를 당할 수도 있는데.’ ‘내가 목사인데 이런 확실하지도 않은 것에 모험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짓이지.’ ‘가만히 있으면 50점은 되는데 괜히 분명하지도 않은 일을 해서 망신을 자초할 일이 없지.’ 이런 생각들이 스며들게 되면 믿음은 사라지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생각들에 의해서 행동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되면 성령은 탄식하게 되며, 그 사람을 사용하는데 많은 제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을 제한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 있고 위치가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것저것 재다보면 기회를 잃게 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영의 일에는 담력이 필요하고 한두 번 망신을 당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 과정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처음 활시위를 잡은 사람이 첫 발에서 관중(貫中)할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과녁에라도 맞추기만 하면 그것으로 대 만족입니다. 그러나 화살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방향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초보자의 실력입니다. 영의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하게라도 가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이 과정을 통과해야만 능력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서도 우리는 처음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상적인 내용의 음성을 듣습니다. 처음부터 계시가 담긴 예언적인 음성을 듣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이미 어떤 지위에 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그럴 듯하고 품위 있는 역사를 이끌어내고 싶어한다면 시작조차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보시기에는 단순한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두터운 신뢰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이고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습니다. “네가 하는 모든 말을 내가 시행하리라.” 이런 관계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을 보이는 과정이 느낌을 따르는 것입니다. 느낌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은 무엇을 믿고 살아갑니까? 주님은 보입니까? 만질 수 있습니까? 기록된 말씀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귀도 압니다. 아니, 마귀는 더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주님과 신뢰 관계가 이루어집니까? 바리세인들의 수준을 능가합니까? 그들의 지식과 열심을 능가합니까? 주님은 아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친밀함을 원하십니다.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 수단이 감성입니다. 감성은 느낌으로 옵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오는 그 수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능력을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주님과 친밀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능력은 자동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도 됩니다.

  “다 능력행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다 주님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해야 할까요? 신뢰를 얻는 편에 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는 아니지만 신뢰를 얻는 소수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처럼 마음에 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아니어도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음성을 어떤 이는 성경을 읽을 때 오는 감동의 수준으로 이해합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 그런 차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런 수준이라면 그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운데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주의 음성을 듣듯이 그렇게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수준의 음성을 열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차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그런 수준의 음성을 듣는 시대입니다. 우마차가 교통수단이었을 때는 그 수준의 속도가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속 300키로의 속도를 살아갑니다. 이 속도가 우리가 경험하는 속도입니다. 그런데 우마차 수준 이상의 속도는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을 우리는 전근대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영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영적 수준은 10년 전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분발해야 하고 페러다임의 변화가 없이는 따라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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