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에 대한 이해(1)
능력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이해보다는 부정적인 오해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소극적인 사람과 적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능력을 감당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능력을 행하려면 여러 가지로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많기 때문에 막연하게 두려워하지요. 훈련을 비롯해서 감당하기에 쉽지 않은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일을 행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조건이 되면 반은 모험을 가지고 그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지요. 그래서 때로는 실패도 하고 그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생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갖은 노력을 다 합니다. 영적인 일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도 능력을 얻을 것이라는 보증은 없으나 반드시 능력을 지니게 되고 능력을 받아야만 합니다. 부자가 되기 원한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부자가 있으며,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다 능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능력을 받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라고 말할 때 기사와 이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능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능력은 모든 능력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것이며, 우리가 보편적으로 누구나 갖추어야 할 능력은 죄를 이기고 세상에 물들지 않는 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하고 그 말씀의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 능력입니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적용했을 때 그 의미하는 바가 나타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와 친밀함이 유지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의지로 배우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으며, 심지어 불신자나 불교신자라도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말씀은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이지만 능력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이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신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손을 얹는다고 해도 병은 치유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능력은 우리의 믿음의 순수성을 드러내는 시금석이기도 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알면서도 삶에서 그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삶에 적용했다고 해도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더 이상 적용할 의지를 갖지 못하는 것은 능력을 사모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경우는 마치 가인과 아벨의 경우와 같습니다. 이 두 형제는 함께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가인은 낯이 붉어지면서 화를 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가운데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에게 열심히 구하였는데 얻지 못합니다. 신앙으로 보나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보나 월등하게 우수한데도 불구하고 능력을 얻지 못합니다. 특히 목회자들 가운데 그런 경우가 있지요. 목회를 위해서 능력을 사모하고 금식하면서 간절하게 구했지만 얻을 수 없었는데 어떤 성도는 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고 말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능력을 받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목회자는 낯빛이 달라집니다. 마음에 화가 치솟습니다.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 행위로 그 사실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과 얼굴빛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심하게 거부감을 나타내며 능력을 받은 사람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자 동생을 죽일 궁리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가 그를 지배하려고 하니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화가 난 가인은 동생을 속여서 들로 이끌어내고 거기서 죽이고 맙니다. 이일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이미저리입니다.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이 능력을 가진 사람을 시기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배척하고 고립시켜 영적 살인을 합니다. 능력을 받았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고 오 갈 곳이 없이 방황하거나 억제함으로써 영적 갈등에 휘말려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여성도들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고 이 사실이 이를 증거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광범위하게 누릴 수 있는 길을 막아놓게 되고 막연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인식으로 능력을 거부하고 무능한 채로 살아갑니다. 능력을 얻지 못한 다수의 가인과 같은 사람들은 능력에 대해서 악의적인 소문을 만들어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비주의라는 오명을 씌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비마저 오해되고 하나님을 이론과 관념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종교형태로 만들어버려 타 종교와 근본적으로 혼동하여 구별이 되지 않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종교를 이원적으로 분리하여 삶은 삶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각각 달리 적용하는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성과 속이라는 이원적 구분을 통해서 성직과 세속직으로 구분하여 사제와 평신도라는 비성경적인 계급을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구약의 제사장직을 신약에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합니다.
신약성경은 모든 성도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릅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즉 능력으로 다스릴 왕이며 세상의 죄를 감당할 제사장입니다. 세상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그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번제로 삼아 희생을 드려야 하는 제사장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의 재물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좇아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을 희생으로 드려 세상을 구원하는 제사를 드릴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의 재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이제 그 능력을 개발하고 실천하여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희생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기사와 이적의 초자연적 능력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이며,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런 증거의 능력을 택한 소수의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심으로써 우리 가운데 주어진 다양한 능력들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가변적이고 상황적이며 소멸하고 증대되는 것으로 지식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식은 한 번 얻어지면 고정되어버리지만 능력은 현재적이므로 우리는 그 능력을 날마다 유지하고 증대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열납되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 부담을 지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능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통제하고 인도해 가십니다. 능력이 소멸되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에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 능력이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으며 우리에게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소멸되고 증대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능력은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증거로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능력이 소멸되면 회개해야 할 것이며 어디서 그 능력이 소멸되게 되었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영적 삶의 지침이며 척도입니다. 이 소중한 것을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고 무시한다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속지 말아야 하며 힘쓰고 애써서 자신에게 맞는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이런 부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성도들에게 알게 하고 가르침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글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