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의 세 가지 차원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언(prophesy)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말하는 것이며, 신유(divine healing)는 치유의 능력을 받아서 환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며, 축사(exorcism)는 귀신을 꾸짖고 나가라고 명령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성령으로부터 그런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그냥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특별히 없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것이 은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은사는 받은 만큼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이 받은 사람은 강력하게 나타나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은사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언, 신유, 축사 이 세 가지는 화려한 은사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또한 세 가지 특성(성도, 사역자, 전도자)을 지니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같은 은사처럼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세 가지의 특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를 이기고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거듭나면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로 받게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 권세 속에 능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언할 수 있고, 병을 고칠 수 있으며, 귀신을 쫓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회수가 빈번하지 못하며, 여러 가지 부담과 조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필요할 때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서 이를 사용하게 하는 한시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이런 능력들이 나타나지 않다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의 영이 임하면 예언하게 되고, 신유의 능력이 임하면 병을 고치며, 주님의 임재가 일어나면 귀신이 쫓겨나갑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도구가 되어 언제든지 성령의 뜻에 따라서 권능을 보일 수 있지만 그 선택은 절대적으로 주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일시적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서 성령의 선택을 받게 되며, 그로 인해서 기름부음이나 임재가 일어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최초의 기름부음에 의한 능력의 나타남은 우리들의 어떤 노력의 결과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단계를 지나게 되면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며, 기름부음과 임재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배워서 정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이란 그리스도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조직신학적인 이론의 정립처럼 능력에 관해서 이론을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정리함으로써 우리는 자주 그리고 의도적으로 기름부음과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린다”(마 18:18)는 말씀은 우리들에게 어떤 부분에서 우선권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먼저 할 때 주님은 그 다음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시동권(始動權)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 주님은 역사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동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해야 할 많은 부분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은사로서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역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능력을 골고루 나누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차등을 두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달란트 비유에서 잘 드러난 사실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서 되는 일이므로 우리는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충성이라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잘 행하였을 경우에는 그 능력이 증대될 수 있다는 사실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잃어버릴 수 있다는 엄격함이 있습니다.
사역자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 역시 배우고 개발해야 하는 요소들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므로 학자들이 해야 할 몫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여기까지 손이 닿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주먹구구식으로 해오고 있고, 그 책임 전체를 사역자에게 돌리는 무책임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교회를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래서 신학을 교회의 시녀라고 정의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영적 능력 사역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여성들입니다. 남성들이 교권에 집착하는 가운데 주님은 여성들을 사용해서 능력 사역을 행하도록 불러냈습니다. 목회자를 위해서는 신학이 존재하지만 능력 사역자들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야전을 치르는 초급 장교들처럼 그들은 몸으로 이 능력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런 세월이 반 세기가 지났지만 신학은 아직까지도 이 부분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 없는 목회자가 있을 수 없듯이 신학 없는 능력 사역자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초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 당연히 조직신학을 구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가 잡히고 부작용이 감소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아주 독특한 사역자인 복음전도자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강력한 권세와 능력이 주어집니다.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불러낸 종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했을 때 그들에게 주어진 권세로 그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대도 없이 전도의 길에 올랐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자에게 주어진 아주 특별한 기사와 이적의 능력은 ‘공수의 조건’이 달려 있습니다. 전대도 없고 두 벌 옷도 없어야 하는 이 조건은 전도자를 전도자로 인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에 관해서 정의할 때 주의 직접적인 부르심과 오래 참음과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는 많은 능력(고후 12:12)이라고 말합니다. 기다림은 그에게 있어서 사도로서 인치는 중대한 조건이었습니다. 이렇듯이 복음전도자에게 있어서 공수의 조건은 전도자로서의 인증마크입니다. 이것은 전도자 스스로가 지켜 나가야 할 정체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언을 비롯한 각종 능력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고 알아야 할 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세월이 흐르고 교회가 성장할수록 그 지식들은 더욱 세분화되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에는 이런 지식이 없어도 행할 수 있었고 용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숙기에 접어들도록 지식을 축적하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으며 조건들을 외면하면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능력 사역을 행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교회도 공동으로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지도자들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아는 것만큼 우리는 더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