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경건을 열망하라(토마스 왓슨)2024-08-21 1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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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을 열망하라(토마스 왓슨)
1. 경건의 본질
경건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새기고 만들어 놓으신 것으로서, 인간으로 육적인 존재에서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경건이 한 사람 안에 만들어질 때, 그 사람은 새 영혼을 받는 것은 아니나 다른 마음을 갖게 된다(민 14:24). 능력은 새롭지 않으나, 속성은 새롭게 된다.
경건은 실제적인 것이다. 경건은 그 기초를 진실에 두며, 따라서 “진실한 길”(시 119:30)이라고 불린다. 경건은 하나님께서 비춰 주시는 광선이요 빛이다. 하나님께서 진실하시다면, 경건도 진실한 것이다.
경건은 내적인 것이다. 경건은 주로 마음속에 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9). 도덕론자의 종교는 온통 잎사귀에만 있는 것으로서 외면적인 것들이다. 그... 러나 경건은 영혼에 뿌리 내린 거룩한 수액이다.
경건은 초자연적인 것이다. 경건은 새 예루살렘에서 나온 천상의 식물이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의 열매”라고 불린다(갈 5:22). 인간은 자신을 창조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자신을 바꿀 능력도 없다.
경건은 전체적인 것이다. 경건은 영혼 전체에 퍼지는 거룩한 누룩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 전체를 거룩하게 하시고”(살전 5:23). 이해에는 빛이 있고, 애정에는 질서가 있으며, 의지에는 융통성이 있고, 인생에는 본받을 만한 것이 있다. 몇몇 부분에서만 선한 자는 경건한 자가 아니다. 은혜는 새 눈도 새 혀도 아니고 “새 사람”(골 3:10)인 것이다. 경건한 자는 모든 면에서 선한 자이다. 비록 그가 한부분에서만 거듭났다 해도, 모든 부분에서 거듭난 것이다.
경건은 열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생기가 넘치고 열정적인 것이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뜨겁게 헌신하는 자는 경건한 자로서, 그의 마음은 거룩한 사랑으로 끓어 넘친다.
경건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영혼의 경건은 하나님 보시기에 총총히 빛나고 있다. 이성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고 경건은 우리를 지상의 천사로 만든다. 우리는 경건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벧후 1:4). 경건은 영광, “영광과 덕”(벧후 1:3)에 가까운 것이다. 경건은 영광의 씨요, 영광은 경건의 꽃이다.
경건은 영구적인 것이다. 경건함은 그 영혼의 기질이자 혈색이 되어야 한다. 경건은 고정된 것이다. 경건이 영혼에 뿌리를 내리면, 영원히 지속된다.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 3:9). 성령으로 마음속에 새겨진 경건은 다이아몬드로 새긴 듯 결코 지워질 수 없다.
2. 경건한 사람의 특징
1) 경건한 사람은 지식의 사람이다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잠 14:18). 성도는 “슬기 있는 처녀들”(마 25:4)이라 불린다. 자연인은 하나님에 대한 추론적인 지식은 어느 정도 있겠지만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다”(고전 8:2).
그는 하나님을 알되 구원받을 만큼은 알지 못한다. 그는 이성의 눈을 떴을지는 모르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분별하지는 못한다. 자연인은 그의 영역을 넘어서 활동하지 못한다. 그는 눈먼 자가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거룩한 것을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
그는 자기 마음의 악을 보지 못한다. 죄인의 마음은 너무 검어서 지옥 외에 무엇으로도 그것을 묘사할 수 없으나 무지의 베일은 그것을 숨긴다. 그는 구세주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진주이다. 그러나 감추어진 진주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이다.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 2:27). 다시 말해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침 받는 자이다. 경건한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통달한” 자이다(대하 3:22). 그는 “완전한 지혜”(잠 3:21)를 가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안다.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를 원수로 아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매우 감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인자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고후 2:14)를 가졌다.
2) 경건한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믿음은 은혜 중에서 가장 값지다. 믿음은 우리를 돌감람나무에서 베어 내어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준다. 믿음은 영혼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동맥이다. 믿음은 은혜에 생명을 준다.
믿음은 회개하도록 자극한다. 내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그 믿음은 나로 하여금 그 좋으신 하나님께 죄 짓는 나 자신에 대해 눈물 흘리며 애통하게 만든다. 믿음은 소망의 어머니다. 일단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되면 우리는 그 약속을 소망하게 된다. 믿음은 소망의 등불을 채우는 기름이다. 믿음과 소망은 한 쌍의 원앙새 같은 은혜들이다. 그 중에 하나를 제거하면 나머지 하나는 쇠약해진다. 믿음은 인내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섭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 자는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 이와 같이 믿음은 살아 있는 원리이다.
성도의 삶은 바로 믿음의 삶이다. 성도의 기도는 믿음의 호흡이다(약 5:15). 성도의 순종은 믿음의 결과이다(롬 16:26). 믿음은 만병 통치약이다. 그것은 경건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의 바다에 던진 비상용 닻과도 같아서, 절망으로 빠져 드는 것을 막아 준다. “믿음이 굳건하기만 하다면, 어떤 파멸도 해를 입히지 못한다.”
3)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른다(시 116:1) 믿음과 사랑은 모든 종교가 향해 나아가는 두 개의 기둥이다. 믿음이 활기를 띠게 하는 것처럼, 사랑은 모든 의무를 유쾌하게 한다. 사랑은 믿음의 봉사를 원숙하게 하여 더 좋음 맛이 나게 해준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은 은혜로 충만한 마음을 사랑으로 속박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영혼을 증오할 것이다.”
경건한 영혼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를 갈망한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을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더 열망하게 된다. 경건한 영혼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한다”(딤후 4:8).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영혼이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면,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4)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닮는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판단과 같은 판단을 내린다. 그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과 같은 거룩한 성향을 갖는다. 그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 1:4)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과 형상을 지닌다. 경건함이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별개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는다. 거룩은 왕국의 왕관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진주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경건한 사람을 힘있게 하고, 하나님의 자비는 그를 사랑스럽게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를 영광스럽게 한다. 그가 지닌 내적 순결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나온다. 경건한 사람은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 하나님과 비슷한다. 그는 여호와의 성도라고 불렸던 아론처럼(시 106:16), 그를 성별하는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았다. 거룩은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배지요 제복이다. “주의 거룩한 백성이”(사 63:18). 경건한 자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벧전 2:9). 그들이 겉모습만 거룩하다면 이집트의 사원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겠지만, 그들은 내부가 금으로 되어 있었던 솔로몬의 성전과 같다. 성소들의 거룩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의 모든 원리와 행동 방식이 된다.
거룩은 사람의 영광이다. 아론은 “영화롭게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제사장의 옷을 입었다(출 28:2). 이렇게 한 사람이 수놓아진 거룩한 옷을 입는 것은 그를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이다.
공기의 우수함이 그 맑음에 있고, 금의 가치가 그 순도에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그의 거룩함에 있다.
5)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철저하며 신중하다 헬라엉서 “경건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의미한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존중하며 허식보다 예배의 순결을 더 중시한다. 거룩한 것에 무엇을 섞는 것은 포도주에 무엇을 섞는 것과 같다. 그것은 색깔을 아름답게 하겠지만 질을 떨어뜨린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출 25:40)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다. 모세가 그 식양에서 하나라도 빠뜨리거나 덧붙였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그를 섬기는 일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불쾌감을 나타내신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하나님이 제단에서 거룩하게 하시지 않은 불-을 분향하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켰다”(렙 10:1,2).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친히 정하신 것 이외의 것은 모두 다 “다른 불”로 간주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그토록 노를 발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섬김받을 방법을 친히 정하실 지혜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명령을 하려 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 규칙이 불완전하기나 한 것처럼 그것들을 고치려고 하며 자신들이 고안한 것들을 덧붙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보여 주신 식양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다윗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불린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동기를 순결하게 지켰고 거룩한 것에 자신이 고안한 것들을 첨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 경건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무릇 경건한 자는 모두 주님께 기도하나이다”라는 말씀에 나온다. 은혜가 그 속에 부어지면 기도도 넘쳐나는 법이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이 말은 히브리어로 “나는 기도하다”라는 뜻이다. 기도와 나는 하나이다. 기도는 하늘 나라에 다다르는 영혼의 교통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는 기도로 그에게 나아간다.
칼리굴라는 주피터의 귀에 속삭이는 자신의 상을 카피톨 신전에 세워 놓았다. 기도는 하나님의 귀에 속삭이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그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은혜의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린다. 바울은 회심하자마자 기도를 했다(행 9:11). 바울은 분명, 과거에 바리새인일 때도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피상적이었고 관습적이었다. 그런데 그 영혼에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자, 보라, 그가 진정으로 기도한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매일 기도의 산에 오른다. 그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가게의 문을 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연다. 우리는 집에서 좋은 향내가 나게 한다. 경건한 사람의 집은 “향내가 나는 집”이다. 그는 기도의 향내를 낸다. 그는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시작하지 않는다. 스키피오는 반드시 먼저 카피톨 신전에 올라가서 예배를 한 후에 원로원 건물에 들어갔다. 경건한 사람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그는 하나님의 허락과 하나님의 축복을 구한다. 헬라인들은 신탁으로 신의 뜻을 구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창 24:12; 삼상 23:3,4). 진정한 신자는 거룩한 절규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하늘로 쏘아올린다. 7) 경건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천국은 그가 천국에 가기 전에 그의 안에 있다. 성도를 나타내는 헬라어 하이오스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한 곳에 살지만 다른 곳에 속할 수 있다. 그는 스페인에 살지만 영국의 자유 시민일 수 있다. 폼포니우스는 아테네에 살았지만 로마의 시민이었다. 이와 같이 경건한 사람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늘의 예루살렘에 속해 있다. 경건한 사람이 원하는 곳은 바로 천국이다. 경건한 사람에게는 하루하루가 그리스도의 승천일이다. 성도들은 그들의 숭고함 때문에 “별들”이라고 불린다. 즉 그들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산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잠 15:24). 경건한 사람은 여섯 가지 면에서 천국 지향적이다.
경건한 사람은 선택이 천국 지향적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것들을 선택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궁정에 거하기를 원했다(시 84:10). 경건한 사람은 해 아래서 가장 화려한 것들을 구하기보다 그리스도와 은혜를 원한다. 사람의 됨됨이는 그의 선택에 있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결정적인 때에 가장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세상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관계를 끊는다. 그것은 우리가 “더 좋은 편”(눅 10:42)을 선택했다는 표시이다.
경건한 사람은 마음이 천국 지향적이다. 경건한 사람은 그의 마음을 위에 있는 것에 둔다(골 3:2). 그는 천국에 가기 전에 그의 마음을 천국에 둔다. 그는 세상을 단지 아름다운 감옥으로 보며 그의 족쇄가 금으로 만들어졌어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경건한 사람은 영광과 영원을 묵상한다. 그의 소망은 날개를 달고 천국으로 날아간다. 마음속에 있는 은혜는 불과 같아서, 거룩한 소망과 부르짖음의 불꽃을 위로 솟아오르게 한다.
경겅한 사람은 말이 천국 지향적이다. 그의 말은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다른 사람에게 뿌려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무덤에서 부활하시자마자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행 1:3). 어떤 사람은 회개하자마자 천국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처럼 말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경건한 사람은 행동이 천국 지향적이다. 하늘에 있는 행성들의 움직임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경건한 사람의 행동은 숭고하며 거룩하다. 그는 구원을 이루어간다. 그는 천국의 꽃들로 만든 화관을 얻기 위해, 그리스 올림픽에서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힘을 쏟는다. 그는 기도하고, 금식하며, 근신한다. 그는 천국을 침노한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움직인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천사들의 일을 한다. 그의 행동은 스랍과 같다.
경건한 사람은 소망이 천국 지향적이다. 경건한 사람의 소망은 주께 있다. 그것은 곧 “영생의 소망”(딛 1:2)이다. 경건한 사람은 천국에 닻을 내린다. 그는 죄의 족쇄를 끊기를 원한다. 그는 눈이 보지 못하는 그런 것을 원한다. 그는 죽을 때, 아버지께서 약속하셨고, 그 아들이 값주고 사셨고, 성령께서 보증하신 왕국을 원한다. 상속자가 많은 재산이 자기에게 주어질 때를 바라보며 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게 상속자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산다. 이런 소망은 모든 상황에서 경건한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
경건한 사람은 품행이 천국 지향적이다. 경건한 사람은 거룩의 광채를 덧입어 자신의 고백을 장식한다. 그는 마치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뵈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그의 삶 속에서 열심과 고결함, 겸손이 그 얼마나 빛나는가! 경건한 사람은 천사와 우열을 다툴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체를 모방한다. 마테도니아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탄생을 기념하면서 그 날에 진주와 값진 보석으로 장식된 알렉산더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목에 걸었다. 이와 같이 경건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그의 품행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니고 다닌다.
경건한 사람은 열심 있는 사람이다 은혜는 성도를 스랍으로 변화시킨다. 은혜는 성도를 거룩한 열심으로 불타게 한다. 열심은 복합적인 애정으로서, 사랑과 분노가 뒤섞인 것이다. 열심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죄에 대한 분노를 가장 강력하게 나타낸다. 열심은 애정의 불꽃에 해당한다. 경건한 사람은 물과 불, 이 두 가지로 세례를 받는다. 그는 열심의 영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와, 예배를 위해 열심을 낸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시는 하나님의 위해 열심을 품었다. 그 열심은 그의 머리에 씌워진 면류관이 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제단 숯불에 닿은 사람이며,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우상 숭배하는 백성을 보고 크게 노하여 하나님께 받은 두 돌판을 던져 깨뜨렸다. 우리의 복되신 구세주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꾸짖으며 내쫓으셨다.
9) 경건한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이다. 인내는 캄캄한 밤에 빛나는 별과 같다. 경건한 사람은 소원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은혜의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구원은 우리의 때를 지나도록 지체될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때를 지나도록 지체되지는 않는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끈기 있게 기다리지 못하는가? 우리는 종이며 기다리는 것이 종의 자세이다. 우리는 그 밖의 모든 것들도 기다린다. 우리는 불꽃이 타오르기까지 기다리며, 씨앗이 자라나기까지 기다린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하나님은 기다릴 수 없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신다. 그분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셨는가? 그분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찾으실 때까지 해마다 우리를 찾아 오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려 주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기다릴 수 없는가? 경건한 사람은 기꺼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 묵시가 이루어지는 것이 더딜지라도 그는 기다린다. 인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복수하지 않고 손상을 감수할 때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불평하지 않고 그분의 손길을 견딜 때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견뎌낸다.
10) 경건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찬양과 감사는 천국에서 하는 일인데, 경건한 사람은 천국에서 언제나 할 그 일을 지금 이곳에서 시작한다. 유대인의 말에, 세상은 율법, 하나님에 대한 경배, 감사, 이 세 가지로 지탱된다는 말이 있다. 마치 감사가 없어지면,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가 사라져 세상이 언제라도 붕괴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찬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갑자기 분출되다”라는 의미를 가진 어근에서 파생된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천국을 향하여 일제 사격하듯 찬양을 쏘아 보낸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그가 하나님께 얼마나 아름다운 선율로 찬양을 드렸는가?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삼하 23:1)라 불렸다. 그리스도인은 최악의 상황에 처해도 감사한다. 선지자 요나는 성을 잘 내는 사람이었다. 바다에 폭풍이 쳐도 요나의 마음이 격분하여 끓어올랐던 만큼 흉용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구름을 뚫고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11) 경건한 사람은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은혜를 깨닫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마음을 함께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결합시키고 사랑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결합시킨다.
경건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정중하게 사랑한다. 헷 족속이 비록 이방인이었고 언약에 속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을 정중하게 대했다. 은혜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깨끗하게 하여 사람을 “겸손하게”(벧전 3:8)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정중하게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같이 흙으로 만들어졌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오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온화한 행동을 할 때 그들을 이끌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때문이다. 무뚝뚝하고 무례한 행동은 종종 다른 사람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고, 거룩함에 대해 완고한 태도를 갖게 한다. 반면에 애정어린 행위는 매우 정중하며, 마치 자석처럼 그들을 신앙으로 이끈다.
경건한 사람은 경건하고 거룩한 사랑을 하는데, 특히 “믿음이 가정”(갈 6:10)에 대해 그러하다. 일반인에 대한 사랑은 정중함에서 나오는 사랑이지만, 경건하며 거룩한 사랑은 기쁨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육신의 친척들보다 성도들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관계가 더 가깝기 때문이다.
12) 경건한 사람은 신앙으로 철저하게 훈련받는다 .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한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꼭 맞추어 살려고 애쓴다. 모든 명령에는 똑같이 하나님의 권위의 인이 찍혀 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은 모든 명령에 한결같이 순종한다.
태양이 황도 12궁좌를 차례차례 통과하듯이, 경건한 사람은 신앙에 포함된 모든 요소를 다 겪으며 지나간다. 십현금을 연주할 때는 모든 현을 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음악 전체를 망쳐 놓을 것이다 십계명은 십현금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즉 모든 현을 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의 아름다움 음악을 전혀 연주할 수 없다.
참 순종은 자식된 도리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바르고 진지한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갈고리에 걸려 있었던 성막의 휘장과 같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고리가 연결되어 잇는 황금 사슬과 같다. 양심적인 사람은 그 사슬의 고리 하나라도 자진하여 끊지 않을 것이다. 명령하나를 어기면 그 사슬은 전체가 끊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하나를 고의로 어기는 사람은 범죄자이며 율법 전체의 저주를 받게 된다. 참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요 한결같은 순종이다. 선한 마음은, 자침처럼, 자석이 끌어당기는 방향을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