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모독과 거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신앙생활을 이어온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은 의외입니다. 그들은 교회 내부의 형편과 사정에 대해서는 환하지만 자신들의 죄용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임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무리 죄사함을 확신한다해도 헛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성령을 모독할 경우엔 도무지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성령을 하찮게 여기거나 성령을 모시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인데 그 결과는 결코 죄사함을 얻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성령을 모시는 것과 죄사함 받는 것에는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을 자신의 죄사함과 곧 연결시키지만 죄사함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다시는 죄가운데 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죄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후의 행위입니다. 비록 그 행위가 선한 행위이거나 하나님을 위한 행위일지라도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죄의 행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자신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사는 자를 말하며 그는 하나님과의 생명관계에 있기 때문에 죄 지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생명관계는
성령 하나님깨서 한 사람의 생명이 될 때에 가능하며 그는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하여 행하는 자입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상태이라면 죄의 반대인 의는 성령께서 그의 생명이 되셔서 전적인 다스림을 통해 성령을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죄사함의 확신은 성경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이란 자신의 죄의 행위를 경험할 때마다 그 확신이 흔들리는 불완전한 확신이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의미와는 다른 지식뿐인 확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실 수 없듯이 성령께서도 죄를 생산해내는 타고난 육신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포기치 않는 자에게도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주장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것이지 성령께서 생명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생명이 되시지 않고도 성령의 은사는 얼마든지 사람에게 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는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같은 은사는 성령의 것이 아닌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확실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도 성령의 열매가 없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 은사는 성령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에서도 방언이나 예언이나 치유같은 초자연적인 일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의 내주는 십자가 진리가 믿어질 때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를 짓는 삶 가운데 있으면서도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한 죄사함을 받았다면서 여전히 죄가운데 사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받았다면서 성령의 열매가 없는 것도 헛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았다면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죄가운데 사는 것은 헛되고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며 또한 성령을 모시기 위해 자신에 대해 죽지 않는 것은 성령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나 성령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사함이란 없습니다. 십자가 진리에 대한 믿음이 없이 성령을 받았다거나 은사를 논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며 말로만 성령을 논하고 정작 자신이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성령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