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육의 균형을 유지합시다
영은 육신의 지배를 받고 육신은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영육의 균형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느 쪽으로든지 기울게 되어있습니다. 영육이 균형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면 부작용이 나타나게 됩니다. 어느 한 쪽이 강하면 독주가 생깁니다. 이것은 자연적 이치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영적 현상을 소화시키는 체계입니다. 영이 강건하면 그만큼 많은 영적 현상과 접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영 뿐만 아니라 악령과도 접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힘이 강하면 그에 해당하는 영적 현상들이 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수로가 크면 많은 양의 물이 흐르듯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고 믿음과도 상관없으며, 신앙의 성숙과도 상관없는 영의 법칙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육이 강건해지면 육적인 일에 기울어지게 되고 사고체계가 세속적으로 변하게 되며, 육체적 요구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그것을 즐기게 됩니다. 육은 이성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즉 생각의 지배를 받는 것인데 육이 영보다 강하면 자신의 생각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게 됩니다. 육은 몸을 지배하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육이 강해지면 행동이 거칠어지고 영의 도움이 없이 육신적 안목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과 영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사고체계가 육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영의 지배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육의 지배에 익숙한 사고체계가 영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영의 지배를 따르는 체계로 변환되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체계를 온전히 이루는 훈련이 없이 영이 육을 능가하게 되면 우리의 사고체계는 그 영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육의 지배를 따르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육이 영 보다 약하기 때문에 생각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기도와 성경읽기 등의 영적인 일에만 전념하여 영을 강하게 만들면 영적인 일에는 탁월해지지만 육은 약해져서 현실적 사고체계에 문제가 생겨 행동이 위축됩니다.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세속적인 일을 거부하는 사람은 행동 없는 경건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영에 편중되어 육적 체계를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사고체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반드시 이성적 분석이 제대로 되어야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무시하고 오직 영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영적으로 많은 것을 깨달아도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알고 있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면서도 육의 균형이 깨어졌기 때문에 그 영의 자각을 육이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충분하지 못해서 제대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성 훈련은 영과 육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익히는 훈련입니다. 이제까지 육의 지배를 받은 사고체계를 영의 자각에 맞추어 행동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영적 자각은 반드시 우리의 이성에 전달되어야 하고 그곳에서 적절한 분석을 거쳐 행동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행동이 없는 영적 깨달음은 영지주의와 같은 오류를 낳게 만듭니다. 특별히 영적인 현상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자신을 그 일에 헌신하는 수도사의 경우는 다르지만 일반적인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과 육의 균형은 중요한 일입니다. 영의 현상들이 지성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그것은 행동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행동이 없는 영적 현상은 신비에 머물 뿐이며, 이런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영적 현상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영적 지식을 배우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공동체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이 강해지고 육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하면 영의 현상에 매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갈수록 더 강한 것을 추구하게 되며, 행동이 없는 영적 경험은 자신에게 갈등도 없고 부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 현상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행위가 있을 때 갈등하고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영적 현상은 반드시 식별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이런 식별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성적 사고체계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고 이런 상태로 오래 가면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런 과정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지요. 일방적인 영적 현상에 매달려 분별력을 잃게 되면 영에 얽매이게 되며, 더욱더 강한 영적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 빈번히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기도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명상이나 신비술에 탐닉하여 황홀경을 추구하는 기수련이나 초월명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와 반대로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일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인 일도 지적인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고 현상들에 대해서는 일체를 거부하게 됩니다. 영적 현상을 통해서 영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육적인 지식체계로만 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의 사람이 아니라 육의 사람이기 때문에 육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이라는 영적 변화를 통해서 비로소 영적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육적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영의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고 영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하기 보다는 익숙해져 있는 육의 관례를 따라 행동하기를 좋아합니다. 따라서 영과 육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육의 지배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다수가 이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 점에 대한 지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영과 육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육적인 삶이 곧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 다 되는 것으로 여기지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고 그러려면 영과 육의 균형은 필수입니다.
육의 삶 속에 있으면서도 영의 삶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를 구하지 않는 것이지요. 성령을 받았다고 말로는 하지만 도대체 그 성령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뿐 그 증거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산모가 임신하면 그 증상이 나타나듯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면 그 열매가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의식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일에 더욱 열중하고 의식을 개발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만큼 영이 약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영의 현상이 잘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그렇게 배우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견고한 종교체계를 만들며, 슐라아어마허가 지적한 대로 이런 믿음은 ‘사변적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고백하는 믿음과는 다른 것이며, 이지적이고 인습적인 믿음으로써 강요된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중세의 유럽에서 오로지 기독교만이 강요되었던 시대의 산물이며, 오늘날에도 정치체계에 의해서 이런 믿음의 형태가 나타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특히 중동의 모슬렘에서는 절대적이며, 이스라엘의 유대교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부모로 인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모태 신앙의 경우도 이와 같은 강요된 믿음의 형태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이후에 성령 체험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채로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육적 형태의 신앙은 견고한 이성적 종교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영육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것은 이성적 판단에 매이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보기로는 매우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지성과 이성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을 본받아 살아가고 있는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갈등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육적 삶의 연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소 경건한 정신수양이나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한 쉼터로 인식하는 신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 육에 치우쳐 영육의 균형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며, 균형을 이루지 못한 지도자의 가르침 때문에 그 속에서 벗어날 도전을 받지 못합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
영에 치우치는 것 못지않게 육에 치우치는 것은 위험합니다. 다수가 그런 위험 속에 있다고 해서 위험한 것이 위험하지 않게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영에 치우치는 사람이 1이면, 육에 치우치는 사람이 10입니다. 절대적으로 육에 치우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육에서 벗어나 영의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소수인 것입니다. 거듭남은 영의 움직임의 시작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 우리가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은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영의 바른 성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의 길에는 위험한 함정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마귀가 파 놓은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배워야 합니다.
영의 일을 사모하는 사람은 육의 일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육의 일을 하는 사람은 영의 일을 사모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영육의 균형은 늘 살펴보아야 하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서서히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우쳐 버리면 균형을 되찾는 데는 많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굳어져 버리면 좀처럼 되돌리기 어려워집니다. 모든 일을 규모 있게 행하라는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