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바르게 기도하고 있는가?2024-08-20 16:37 |
---|
나는 바르게 기도하고 있는가?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 기도를 많이 할수록 나는 어떻게 변화 되는가? 그렇게 많이 기도해온 나는 과연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 달라지기를 원하고 있는가? 이것은 기도의 기본적인 정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왜 당신은 기도하는가? 기도의 기본기가 잘못되면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내용들은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들일 수 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바른 답을 할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히브리어로 ‘테필라’(tefilah)이다. 이 말은 페-라메드-라메드(Pe-Lamed-Lamed)라는 어근과 르히트팔렐(l’hitpalel)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자신을 판단한다’라는 의미이다. 이 뜻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해준다.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의 기도는 어떤 기도이든 그것이 간구이든 감사이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든 혹은 고백이든 간에 세상 속에서 우리들의 역할과 하나님과 관계를 바라보면서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소요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난 후나 외출할 때, 또는 중요한 사람을 만나기 전에 늘 거울 앞에 선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얼굴과 헤어스타일, 옷차림 등 온몸 전체를 거울에 비추어 본다. 만약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고 수정한다. 그런 면에서 거울은 필수적이다. 거울은 속이는 법이 없다.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흉하면 흉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사실을 진실 되게 보여준다. 우리는 거울을 보고 오직 한 가지만 하면 된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거울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본다. 그리고 판단한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을 판단하고 돌아보는 것이 기도이다.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 이후 오랫동안 기도를 이렇게 생각하고 드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도가 생소하다. 우리는 기도를 조금 다르게 이해해 온 것이 사실이다. 기도는 곧 구하는 것이고 찾는 것이고 두드리는 것이라는 식의 정의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께 나의 구할 것을 열심히 아뢰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보다는 내가 구할 것을 소원하는 성취 식의 기도가 습관화되었다. 인격적인 관계없이 주문만 늘어놓는 기도 기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나의 부족한 것을 아뢰고 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그러다 보니 기도의 방식이 한결같다. 구하는 제목을 놓고 이루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전부이다. 어떤가? 혹시 당신의 기도도 이런 기도가 아닌가? 여기에는 관계적이며 인격적인 기도보다는 주문식의 기도에 익숙한 한국의 정황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대상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빌고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잘못된 기도 습관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해 왔다. 이런 식의 기도는 말씀 없이도 가능하다. 열심히 아무 신에게나 빌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기도는 구하는 측면이 포함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기도의 시작이 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구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가 잘 형성되었을 때 하는 것이다. 아무에게나 가서 무엇을 달라고 애걸하면 그 사람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아무리 가지고 싶은 것이 있고,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처음부터 무엇을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사람과 오랜 교제 기간을 가지고 마지막에 겨우 힘을 내어 구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상식이다. 구하는 것을 얻는 것은 열심이 아닌 관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관계가 좋으면 구하지 않아도 이미 상대방이 무엇을 구하는지 다 알아차린다. 나아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 준다. 부모는 자녀가 구하기 전에 무엇을 구하는지 다 안다. 자녀는 뱃속에서부터 수십 년 동안 자신을 키워 온 부모에게 무엇을 숨길 수 없다. 부모의 마음은 무조건 나의 몫을 달라는 자녀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자녀에게 간다. 기도 훈련이 잘된 사람은 먼저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다. 지금부터라도 이것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는 기도 훈련이 필요하다. 부모 앞에 서거나 존경하는 사람 앞에 서면 제일 먼저 무엇이 생각나는가? 나의 구하는 것인가? 아니다. 나의 존재의 미약함이다. 나의 부족함이요 연약함이다. 부모를 만나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녀가 좋은 모습이다. 존경하는 스승을 만나면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의 말을 먼저 듣는 것이 순서이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기도가 시작된다. 영이신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기도도 없다. 코람데오의 자세로 드리는 기도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1521년 4월 17일에 독일 보름스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앞에 서서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밝히면서 기도하는 장면은 무척 감동적이다. “황제 폐하와 여러 높으신 분들이 간단한 답을 요구하시니 번잡한 이유 없이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 한 교황이나 종교 회의들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모순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제가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이것은 마틴 루터의 연설문인 동시에 또한 기도이다. 그는 교황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영으로 느끼면서 사람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단호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목숨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그의 행동이 곧 기도이다. 루터는 자신이 기도한 대로 살았다. 그가 마지막에 드린 “여기에 제가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의 기도는 그때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능력은 언제 나타나는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놀라운 결단과 능력이 뒤따른다.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는 루터뿐 만 아니라 당시 모든 종교 개혁자들이 가슴에 품었던 신앙 고백이었다. 기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을 영으로 느끼고, 자신이 그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드느냐에 따라 기도의 성패가 결정된다. 하나님 앞에 서면 발가벗겨지듯이 자신의 존재가 훤히 드러나는 경험을 얼마나 자주 하고 있는가? 기도 때마다 그것을 체험하는가? 우리는 그 체험 가운데 경외감을 느끼게 되고, 비로소 기도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절로 찬양하게 된다. 그분을 경배하게 되며, 감사하게 된다. 자신의 약함을 경험하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할 수 없다. 찬양은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다. 자신의 비천한 모습을 발견할 때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찬양하게 된다. 교만한 자는 본질적으로 기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그는 결코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푸념을 내뱉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나의 기도의 첫 제목이 기도란 무엇인지 에 대한 질문이 선결 되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