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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영에 속한 사람의 의미2024-07-22 22:17
작성자 Level 10

 영에 속한 사람의 의미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형태가 있음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육적인 그리스도인이지요. 이것을 더 분명하게 언급하면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할 것입니다. ‘속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的’이라고 표현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을 닮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그 또한 바른 표현이라고 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자신이 영에 속하거나 영적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분명히 영에 속하거나 육신에 속하게 됩니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증거들을 자세하게 거론했습니다(롬 1:29~30, 갈 5:19~21). 육신을 좇는 자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좇는 자들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롬 8:5)라고 주장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삶의 모습은 그 결과에서 드러나듯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이런 결과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를 들러내는 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렇듯이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의 모습이 확연하게 차이가 드러나는데, 그런 행위가 나타나는 배경은 그가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났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궁정 제사장으로 당대에 가장 존경 받고 거룩한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덕망도 높고 학식도 많아야 그런 자리에까지 오를 것입니다. 그런 이사야가 성전 안에서 주님을 영으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거짓말을 한 사람이라는 표현이지요. 즉 위선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위선적인 행위는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술수’에 해당하는 육체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종교적인 지도자이면서도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로 종교적인 제도와 틀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그녀의 제자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일깨워주기 위해서 『Interior Castle』에서 ‘거룩한 궁방’(The Holy Mans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영적 삶의 단계를 궁방의 화려함으로 비유해서 설명했는데 간혹 우리 가운데 천국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화려한 집들을 보았다는 간증을 듣습니다.

영적 삶이란 품위 있고 화려한 궁방에서 사는 귀족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겉모습이 그와 같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모습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으로 만나면 그의 삶은 그날부터 화려하고 고귀하게 변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보다 높은 이상을 향해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모습에서 예외 없이 이런 고귀한 삶의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다툼’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은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엘리트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사람들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심지어는 ‘예수파’까지 들먹이면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 높은 위치에 놓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학위와 교단을 자랑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미 잘 알려진 사람의 이름을 빌려 그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다툼의 배경을 제공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은사였습니다. 특히 신령한 은사를 받으면 그 자체로 자신도 신령한 사람 즉 영의 사람이 되었다고 보며, 타인들도 그런 사람을 그렇게 인정해줍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영적 은사를 얻는 것과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과는 전혀 별개일 수 있습니다. 영적 만남이 없이 은사를 받을 수 있으며, 그런 상태가 영에 속한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을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여겨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육신에 속한 모습을 나타낼 때 우리는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지식이나 학문이 많으면 영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을 전공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을 우리는 영적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일에 관여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절대로 타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 만으로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라는 증거로서는 불충분합니다. 영에 속한 증거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영으로 만나는 경험의 바탕에서만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그 결과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영적으로 고귀한 삶이란 지극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끝없는 자기희생의 바탕은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증거이기도 합니다. 영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면 가치체계가 변화를 일으킵니다. 바라보는 대상이 바뀌기 때문에 행동이 바뀌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삶의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그 사람들이 삶도 변화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고귀한 삶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된 삶처럼 다른 사람의 삶도 변화될 수 있도록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능력 있는 삶이라고 표현하며 이런 고귀한 삶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없이는 영에 속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아무리 영적 지식이 많고 성경에 박식하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절대로 영에 속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일 뿐이며, 낮은 차원의 경건의 모습은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낮은 차원이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수준을 의미합니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들의 삶이 희생의 삶으로 변환되게 하는 것이 능력인데 이 능력은 하나님을 영으로 경험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영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길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 길은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실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영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결코 우리들의 노력이나 갈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은혜인 것입니다. 이 만남이 없이도 영적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도 역시 그 삶은 육신을 따르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이 없다면 그 삶은 육신을 따르는 삶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리세인들입니다.

육신에 따른 삶에도 충성과 온유 등과 같은 유사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성령이 전혀 없는 승려들의 삶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의 교리 속에서 절제된 삶으로 훈련된 승려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경건의 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절제된 행동들은 많은 신도들에게 경외감과 존경심을 불러내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경건의 모습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만남의 경험이 없는 경건의 모습을 취하는 사람들로 교회는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다수의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교회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과정에도 많은 단계가 있음을 아빌라의 테레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궁방을 소개하면서 각각의 단계의 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런 영성 발달을 구분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크게는 ‘생활의 영성’과 ‘능력의 영성’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 각각의 영성에도 다시 ‘에굽의 영성’ ‘광야의 영성’ ‘가나안의 영성’등으로 이름을 붙여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런 영성도 각각 여러 단계로 구분합니다. 세분하려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구분의 시작은 영적 만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성숙으로 나가는 과정에 따라서 숙성하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주 극적인 영적 만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은 단순한 만남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이 만남에는 반드시 주어지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단순한 만남 그 자체로도 이미 신분의 변화가 충분히 일어납니다. 육신에서 벗어나 영을 좇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보다 중요한 만남의 진정한 의미는 말씀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명령(Commission)과의 만남이며, 소명(The Call)과의 만남입니다. 이사야가 경험한 만남은 ‘보내심을 자각하는 만남’이었으며, 바울의 만남은 ‘이방인들에 보내어지고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만남’이었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수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이 말씀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바울은 로마로 잡혀가는 것을 결코 피하지 않았습니다. 말씀과의 만남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확정짓는 것입니다. 이런 만남으로 인해서 다시는 요동하지 않으며, 갈등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으로 만나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 영에 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는 말이 곧 영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요 6:63).

영에 속한 사람이란 말의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영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로부터 일러주는 말씀을 들은 사람 즉 말씀에 속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영적 경험을 통한 말씀과의 만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의 예가 바로 열 두 사도들과 바울입니다. 우리가 영에 속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로 영이신 그리스도와의 실질적 만남의 경험과 그 과정에서 주어진 말씀과의 만남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영혼과 관절과 골수를 능히 쪼개고도 남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가장 고귀한 영적 삶입니다. 송두리째 변화하는 이런 결과가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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