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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영적인 일에 과감히 도전합시다2024-07-22 22:17
작성자 Level 10

 영적인 일에 과감히 도전합시다

 

  2000년 동안 교회는 육신에 얽힌 일들을 다루는데도 힘들어했습니다. 육신의 눈을 먼저 떠야만 영의 눈이 떠지는 법이니까 육신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여전히 육신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에게 접근하도록 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영의 사람이 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육신의 사람이며, 영의 일을 알기에 앞서서 육신의 일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우선 학교에서 학문을 익히고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다음 단계가 영의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반드시 배워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 주위의 70%가 육신으로만 사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역시 그만큼의 사람이 육신적 안목으로 살아가는 방법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며, 이런 까닭에 영의 원리들이 연구되고 적용되는 구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그 필요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젊은 날부터 이런 일에 헌신해서 배우고 연구하려고 하는 사람이 극히 적은 것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해도 영에 관한 실질적인 배움을 얻지 못하고 다만 목회를 하는 일 정도만 깨닫고 바로 목회에 뛰어들기 때문에 영의 일에 많은 시간을 드리고자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의 지식은 진보가 느리고 심하게 따돌림을 당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는 대상인 영적 존재와 그의 역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다만 원론적이고 교리적인 지식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냥 모르는 것은 모르는 채로 넘어갑니다. 그런 까닭에 고통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곁에 여전히 제거 되지 않은 채로 계속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의 일을 외면하는 동안에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다루지 못하고 사회과학에서 만들어놓은 그릇되거나 부족한 지식과 정보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지요.

치유가 일어나는 일만 해도 우리는 깊이 있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떻게 했을 때 고침을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했을 때 고침을 받지 못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역자에게 가서는 고침을 받지 못하던 것이 어떤 사역자에게서는 아주 간단하게 고침을 받는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은 사역자 스스로도 깊은 관찰과 연구를 하지 않고 그냥 대충 믿음으로 넘기고 마는 피상적인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의학이 발달하기까지는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 연구란 다른 것이 아니지요. 약물을 투여하고 그 경과를 살피는 임상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서 논문으로 발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젊은 의사들이 시술하거나 투약해서 경과를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 일이 자신들의 명예와 소득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사회에서 성공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는 노력을 한 결과인데 영의 일에는 그런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영의 일은 믿음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치유가 일어나면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면 그만이고, 치유가 되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그 책임을 당사자에게만 넘기고 마는 정도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인지를 살피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임상을 통해서 지속적인 관찰과 연구를 해야 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목회자들입니다. 신학을 배웠고 그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므로 이런 일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논문을 만들어내야 할 의무가 있지요.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이런 일을 게을리 하고 있으면서도 그 책임을 회피하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댑니다. 능력 사역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말씀만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말씀은 왜 배우며, 그저 학문적 만족을 위해서 배우는 것입니까? 학문을 위한 학문이듯이 배움을 위한 배움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그냥 숙명처럼 받아들이면 다 잘 될 것이라고 체념하는 정도로 무시합니다.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의 몫이지 결코 교회의 몫으로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우는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위장된 웃음 이면에 있는 아픔을 교회는 외면하려고 합니다.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잠시 고통을 잊도록 하는 어쩌면 마취제 같은 역할을 하거나 진통제 역할을 하는 정도입니다.

고통의 근원에 깃들어 있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제대로 관찰하여 치유하는 방법을 알아내려는 연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 일에 누구도 뛰어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앞이 보장 되어있지 않고 모호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가지 않은 생소한 길을 위험을 무릎 쓰고 갈 사람이 별로 많지 않거든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선교사들의 길은 영광이지만 영의 이치를 발견하고 그 절차와 원리들을 정리하는 일에는 눈길을 두지 않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색안경을 쓰고 보기 때문에 그 시선이 무척 따갑습니다. 과학의 영역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에서 남모를 희생을 치른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같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우라늄을 연구한 퀴리 부인은 결국 방사선 과피폭으로 인해서 암에 걸려 죽었지요. 위험을 무릎 쓰고 그 일에 헌신한 사람들로 인해서 과학은 진보를 했습니다. 세상일에 이렇듯 목숨을 거는 사람들로 인해서 지식은 발전하게 되었듯이 영의 일에도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이제까지 솔직히 능력을 받으면 그것을 행하는 일에는 열과 성을 보였지만 연구하려는 사람은 극히 적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식이 교리에 밀리는 까닭이기도 하지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사역자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영적 능력을 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체계화해서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능력을 나누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이 운동이 주로 미국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많이 앞서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나 젊은 신학생들이 미국에서 배우려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의 영성과 미국인의 영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귀신만 해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방언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기 때문에 영성도 다릅니다. 따라서 영의 역사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지요. 감성이 다르기 때문에 느낌이 다르고 특성과 장점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릅니다. 서양적 영성은 합리와 이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백인들의 영성의 특성이지요. 그래서 저들은 뇌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일이 보다 더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주로 인식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하며 그 기능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쉽게 말하면 공부방식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감성적인 사고구조를 가진 민족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느낌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느낌이 모든 것을 우선합니다. 설교를 들어도 느낌으로 듣습니다. 귀로 머리로 듣기 보다는 마음으로 듣습니다. 서양식으로 공부하고 그 가치를 절대적이라고 믿는 학구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우리의 모습이 어딘가 부족하고 흠이 많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감성에 빠지지 말고 말씀에 치중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런 대부분의 주장은 우리의 정서를 너무도 모르는 서구적인 안목만 갖춘 사람들의 주장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논리적인 설득에 의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끌려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끌림이란 다름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여서 행동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느낌을 기억합니다. 분위기가 좋고 기분이 좋으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말씀은 교회를 나오는 순간 대부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느낌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며, 이것이 교회를 유지하는 바탕입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느낌이 좋기 때문에 그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회는 친교가 정말로 중요한 것이지요. 이것이 동양의 영성이며, 교제라는 말로 번역되는 ‘디아코니아’라는 말은 곧 목회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그 배경이 바로 섬김(교제)에 있는 것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위험해 보이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우리에게는 장점이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은 감성의 영성이며, 이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솔직히 은혜를 누리는 수단이 기도입니다. 말씀 공부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호응을 받지만 그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영적인 지식을 전하는 방법도 감성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즐겁고 마음에 부담이 되지 않아야 듣고 배웁니다. 딱딱한 방법은 통하지 않지요. 나이가 들고 신앙생활을 할수록 우리는 영에 관심이 생기지만 그것을 제대로 풀 수 있는 곳이 부족하며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연구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검증해서 진리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그런 구조가 부족하기 때문에 영적 지식의 진보가 더디고 약합니다.

교리 교육은 몇 년이면 됩니다. 그리고 실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데 크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보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소홀히 한 영적 지식들입니다. 몰라서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모를 뿐만 아니라 고치지 못해서 그 고통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답답한 부분이 많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서로 서로 연구해서 진리의 원리들을 찾아낸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아름다울 것입니다. 요즘 웰빙에 관심들이 많은데 진정한 웰빙은 영적 지식을 많이 갖추고 능력 있게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서로 문제를 고쳐주고 위로하고 힘을 더해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확실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지요.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꼴이 아니라 정확하게 알고 대처함으로써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이지요. 목회를 준비하는 젊은 세대들이 저의 글을 통해서 자극을 받고 도전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많은 세월이 걸리고 위험도 많지만 개척자들의 희생으로 미지의 세계가 열렸듯이 희생 없는 진보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어려움을 당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편안해지는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취할 태도입니다.

영의 일은 많은 위험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생소하기 때문에 오해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을 두려워해서 피한다면 진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길을 여는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하게 됩니다. 많은 시험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한 가지 진리가 우리 앞에 나오지 않습니까? 복제양을 만들기 위해서 수 만 번의 실험을 거쳤답니다. 세상의 원리를 찾아내는 일도 이렇듯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데 하물며 영의 일이라고 그런 수고와 착오가 없겠습니까? 시행착오가 있고 좀 어설프고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있더라고 이해하고 참고 기다리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책망하고 정죄함으로써 그 싹을 잘라내는 일만 해온 우리 교회였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좀 이상한 일을 하면 그 즉시 이단이라고 정죄하여 기를 죽이고 마는 그런 유치한 일은 이제는 그만 해야 할 때입니다. 모든 사람은 실수를 합니다. 영의 일도 만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인간이며, 서로를 도와야 하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그러면 수많은 허물이 덮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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