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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이야기

제목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차원들2024-07-22 22:25
작성자 Level 10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차원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비판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이라고 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예수를 믿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불신자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이라는 말처럼 말하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서 하나님이 멋대로 표현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실제로 하나님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영이기 때문에 우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사람과 동물의 차이 이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동물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종에 따라서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짐승을 훈련시킨다고 해도 어느 한계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있어서 문제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본질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모호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전혀 모호하지 않지만 우리들에게는 모호합니다. 모호하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설명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 또한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면, 지적 수준이 다른 사람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해하는 방법도 다르고 수준도 다르기 때문에 오해를 많이 합니다. 선생님이 교단에서 설명을 해주어도 어떤 학생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엉뚱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림을 감상하면서 작가의 의도대로 감상할 수 없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의도를 감상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글로 환상으로 접하게 되지만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는 수단을 찾아내기란 실제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같은 세대를 살아가면서 공동체가 합의하여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석 또는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항상 갈등과 의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올바르다고 누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올바르다고 인정하고 있을 뿐이며 세대가 바뀌고 다른 해석을 공동체가 인정할 때 기존의 것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마치 모세가 듣는 것처럼 그렇게 들을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런 음성이라고 할지라도 세월이 지나면 다시 모호해질 수밖에 없고 그 자체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 그 자체를 의심하고 새로운 역사 해석을 내어놓지 않습니까? 쉬운 예로 KAL기 폭파 사건의 경우, 그 당시에는 김 현희 씨가 폭파한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지금도 이 사실을 여전히 진실로 알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 사실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그 후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고, 다시 또 번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에게는 의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들었다고 해도 역시 의심하고자 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의심의 문제는 시간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며,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해도 비켜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역사적 사실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록이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남성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상대성 원리의 지배를 받습니다. 자기와 같은 성향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즉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감각이 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생소하고 반대되는 것은 구별이 잘 됩니다. 이것은 보색관계에서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남편, 아들로 표현하기 때문에 남자들에게는 불리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대적으로 우리는 아내이며, 신부입니다.

이런 개념과 반대 위치에 있는 남성의 경우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불리한 점이 있습니다. 성도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남성성으로 표현함으로써 같은 남성의 경우에 친밀함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동성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성의 경우에는 상하 지배관계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종 관계로만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교회의 제도는 자연적으로 권위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으로 관계성이 이루어지는 여성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성에게 있어서 이 관계적 접근은 동성애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은 “주님 사랑해요”라고 표현할 때 진실하지만 남성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성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개념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여성은 예수를 신랑처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지만 남성은 존경하는 분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물질과 초물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물질적 세계관으로 이해합니다. 즉 3차원적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3차원을 초월하는 수단으로 상상력을 사용하려고 하지만 이 역시 3차원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존재론적으로 감지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이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입장으로 내려와서 자신을 표현한 것이 예수이지만 우리는 이 표현마저도 힘들게 생각합니다. 이 예수를 이해하는데 2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흡족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기독론은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소개됩니다.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기독론은 새로운 변화를 거듭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표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가 사람의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이 개가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지만 개는 그것을 이해하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처럼 우리들 역시 하나님이 우리식으로 표현하는 그 표현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때로는 전혀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있음으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모두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더 선명하게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그 바탕에는 물질적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공상의 산물로 이해하게 됩니다. 물질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뿐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당과 목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있어야 하고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원시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통해서 그 존재 사실을 인정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3차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초물질적인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물질로 자신을 소개한 방식입니다. 이런 형이상과 하의 이질적 차원을 우리가 동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 설명이 설득력을 갖출 때 더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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