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 영의 작용에 따라서 삶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이 표현한대로 바람에 날려가는 겨와 같고(시편 1:4) 잡혀 먹히려고 살아가고 있는 짐승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피 값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났으며, 그 영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게 되는 상태(롬 8:14)에 이르게 된 사람입니다. 이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고전 12:3)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라는 표현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내 영으로’ ‘천사의 영으로’ 등과 같은 의미들을 다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런 사실을 실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이전에 예수를 몰랐을 때의 상태와 별로 다른 면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에는 출석하지만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구체적은 증거들을 찾을 수 없으며, 믿지 않았던 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삶의 연속입니다. 여전히 내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기도한다고는 하지만 독백일 뿐이며, 삶의 변화도 없습니다.
굳이 변화된 것을 찾아본다면 교회에 출석하고 다소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지만 이런 면은 불교신자들도 다 그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종교인의 틀에 맞는 정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곁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볼 수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랑하지만 교회 밖으로 나가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여전히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답답한 삶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씀이 가슴에 절실히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따라서 마음에 새겨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성도들이 처한 현실일 것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영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듣지만 도대체 영의 실존과 그 작용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세월만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내 영은 때로는 ‘양심’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선한 양심’(συνειδήσεως άγαθης)이란 베드로가 세례를 설명할 때 세례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고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영의 상태를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영의 작용이 선한 양심으로 나타나며 이는 믿음과 더불어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는 중요한 축이 됨을 바울은 설명했습니다(딤전 1:19). 그러므로 우리가 영의 소리를 듣는 첫 단서는 우리 속에 있는 선한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선한 양심을 따라서 행동합니다. 우리도 믿기 전에는 양심에 따라서 선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 때의 양심의 소리와 지금의 양심의 소리의 차이를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양심의 소리이기 때문이지요.
이 양심의 소리가 기능면에서는 모두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이 몸 역시 불신 상태에 있을 때에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몸으로 하는 행위가 다릅니다. 예전에는 내 몸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살았고 따라서 내 몸을 위한 삶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여기에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첨가되었습니다.
선한 양심도 마찬가지로 더러운 것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릅니다.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첫 단계의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에서 더 나아가 본격적으로 내 영의 소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윤리적인 면과 연관이 깊습니다. 그러므로 믿은 자의 양심은 기독교 윤리를 배경으로 강화되게 됩니다.
영의 음성 즉 속사람의 반향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기 위해서 첫 단계인 선한 양심을 기독교 세계관에 맞추어 윤리적으로 강화시킬 때 우리 속사람은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설명하면 죄에서 떠난 삶을 살게 됨으로써 속사람이 마귀의 참소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영의 작용을 우리의 의식에 전달하는 기능이 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속사람인 영이 힘을 얻어 강한 작용을 하여 우리 인식체계에 신호를 전달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보다 더 강한 영의 반응을 느낄 수 있게 되며, 현상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영적 경험입니다. 속사람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죄를 처리하고 죄에서 떠난 삶을 살아야 하는 윤리적인 측면과 방언과 묵상과 같은 기도를 통해서 강화시키는 영성훈련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영은 강력한 힘을 얻어 굳세어지며 따라서 영의 작용이 더 확실하게 우리의 의식체계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수단인 내 영의 작용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윤리적인 측면은 우리가 교회에서 수도 없이 듣는 설교를 통해서 강화될 수 있지만, 영적 측면은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기도의 방법은 다양하며 그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 묵상 또는 관상기도가 있으며, 방언을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방언기도와 방언통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내 영을 강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이며, 내 영이 강화되면 그 작용이 구체적이고 세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미 없어 보이고 지루하게 생각되는 방언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영의 다양한 신호임을 이미 앞의 글들에서 강조했고 설명했습니다. 다양한 신호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미지 확장’ ‘꿈과 환상의 해석’ 등과 같은 내용들을 이미 설명했으며, 방언통역이라는 수단을 앞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방언 통역은 은사로서의 통역이 있고 권세로서의 통역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인데, 이미 설명한대로 은사란 그 일에 전문 사역자로 세워져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극히 일부 성도들에게 오로지 은혜로 주어지는 특별한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은사를 받으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받은 사람의 뜻에 따라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역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알아야 할 부분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거듭나면서 부여받게 되는 권세는 은사와는 다릅니다. 이것은 배워야 하고 더욱 강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주어진 권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욱 강해지고 폭이 넓어지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사용할 때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방언통역 역시 구해야 합니다(고전 14:13).
자신 안에서 영이 작용하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강화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영의 작용이며 어떤 것이 이성적 작용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지만 모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이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으로부터 오는 작용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 다음은 영적 현상들에 관한 의미를 찾아내야 하며, 그 다음은 다양한 영의 신호를 이해해야 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양심이 꺼리는 일을 하지 말고 내면의 즐거움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주변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야 하며, 그 변화의 의미를 정리해서 선한 양심에 비추어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꿈과 환상에서 보이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영의 작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계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신앙 공동체가 서로 의견을 나누는 교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란 인위적으로 구성한 구역이나 속회나 셀과 같은 모임이 영적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에는 영적 경험이 많고 영의 인도함을 받는 훈련을 거친 지도자를 중심으로 구성해서 영적 인도를 받는 경험들을 나누고 서로 가르치고 이끌어줌으로써 어려운 초보의 과정을 무리 없이 치르게 됨으로써 이후 홀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롬 8:14). 하나님의 아들의 징표를 유대인은 할례에서 찾으려고 했고, 오늘날 우리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며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무지함 속에 쌓여 있을 따름입니다. 이 무지함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보다는 성령을 금심케 하는 일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안타까움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영으로 둘려 쌓이면 억압과 눌림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규제와 통제라는 수단으로 나타납니다. 교회가 더 많은 규정을 만들어내는 까닭은 영의 인도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 사이트를 찾아오신 여러분들은 영의 일에 목말라하는 분들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서 찾다가 제 사이트를 만나게 되었지 않습니까? 영의 일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유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우리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자유하되 철저히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가르치지 않고 오로지 성령만이 가르칠 수 있는 그런 단계의 그리스도인으로 교회가 가득해질 그 날을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