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동반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동반자가 있어야 하듯이 영적인 일에도 동반자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동반자를 만나면 세상을 즐겁고 아름답게 살 수 있지만 나쁜 상대를 만나면 삶이 굴곡지고 황폐해지듯이 영적인 일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동반자는 한 번 맺어지면 평생 함께해야 하지만 영적인 동반자는 그와 같은 구속력은 없습니다.
일정기간 동안 서로의 영적 삶을 위해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서로 영적 유대(soul tie)가 생기고 이 관계로 인해서 영적 성향이 더욱 짙어집니다.
영적 유대는 자신의 영적 성장과 확고한 믿음을 세우는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일정 기간 동안 영적인 유대를 유지함으로써 믿음의 색깔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됨으로써 신앙생활이 분명해지고 뚜렷해져서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런 유대가 없으면 신앙은 흔들리고 때로는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좋은 동반자를 만나야만 영적인 삶이 즐겁고 기쁘고 하나님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좋은 동반자를 만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꼼꼼히 고르듯이 영적인 동반자 역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좋은 동반자를 고르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점들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1) 영적인 성향이 비슷해야 합니다. <BR>한 생을 살아갈 동반자는 자신과 수준이 비슷해야 합니다.
비슷한 취미와 취향이 있고, 생각하는 관점이 비슷해야 합니다. 즉 수준 차이가 나지 않는 상대가 좋습니다.
이렇듯이 영적 동반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성향이어야 합니다. 신앙의 색깔이 너무 다르면 영적 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영적 유대는 영적으로 힘이 약한 부분을 자신보다 더 강한 부분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믿음의 터전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약한 부분이 강한 사람을 통해서 영적 성향을 이어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부터 성향이 약한 사람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적 동반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서로 약한 부분을 강한 사람으로부터 공급 받게 되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성향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충돌이 없이 순조롭게 유대가 만들어집니다.
성향이 다르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지요.
좋은 동반자는 영적 성향이 비슷함으로써 그 방향의 영성이 더욱 성장하고 견고해집니다. 자신과 다른 성향의 사람으로부터 다른 성향의 믿음을 얻게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성향이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좋은 유대를 맺게 될 가능성보다는 나쁜 솔타이가 만들어질 위험이 더 높습니다. 솔타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때로는 갈등이라는 부정적인 관계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것은 솔타이에서 언급합니다.)
색상에는 보색 관계가 있고 대비색 관계가 있습니다. 보색관계는 서로 잘 어울려 그 색깔을 보는 사람의 시각을 부드럽게 합니다.
그러나 대비색 관계는 두 색상이 너무 뚜렷해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두 색이 서로 조화하지 못하고 각각의 색을 더욱 뚜렷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관계는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 뚜렷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오히려 충돌을 일으키고 마찰을 빗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관계성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너무 뚜렷한 개성은 서로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매우 강합니다.
물론 이것을 극복하면 자신들의 존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좋은 점도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희생이 따르는 위험한 관계입니다.
보색 관계는 서로의 색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두 색으로 인해서 더욱 부드러워지고 차분해지는 색입니다.
이런 관계는 서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서로로 인해서 분위기가 좋아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동반자 관계는 각 사람의 존재를 부각시키지 않으면서도 각 사람을 더욱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같은 성향의 영성을 갖춘 사람으로 인해서 그 추구하는 영성이 더욱 성장하고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적 경력이 비슷해야 합니다.
각 사람이 영적 경력이 비슷하다는 것은 다양한 요소들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도, 봉사, 성경지식, 은사 등의 요소들이 있는데 이 모든 부분에서 서로 비슷하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강한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경륜이 비슷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기도가 월등히 우수하지만 봉사는 약하다든가 해서 봉사의 부분에서 상대방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나은 부분이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음으로써 서로 보완되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자신보다 월등하다면 이는 동반자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동반자 관계는 연령적으로 비슷하지만 영적 동반자 관계는 육체적 연령보다는 영적 나이 즉 거듭남의 기간이 비슷해야 합니다.
거듭남의 연령이 비슷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비슷합니다. 비슷한 경험은 서로에게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영적 유대가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동반자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영적 동역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BR><BR>
3)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영적 동반자 관계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우세를 배제합니다. 상하 복종과 순종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견제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강한 성향을 가진 사람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너무 확고한 믿음을 보이는 사람은 동반자 관계에 적당하지 못합니다. 서로 적당히 타협하고 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견제란 서로에게 유익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서로 토론하고 설득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반자 관계는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갈등도 빗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가 보색관계이므로 격한 논쟁이 있었다 하더라도 쉽게 어우러집니다. <BR><BR>이와 같은 요소를 지닌 사람이 좋은 동반자가 됩니다.
이런 동반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서로 이끌어주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서로 어우러져서 만들어가는 것인데 수십명 수백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 공동체에서 자신의 신앙 생활에 정말로 어우러지는 동반자를 만나는 것이 신앙의 성숙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동반자는 대체로 10명 이내의 소수이여야 좋습니다. 이런 동반자들이 모여 가정교회를 이루고 신앙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신앙의 균형을 잃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신앙은 여러 가지를 골고루 해야지 한 부분에 치우치면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얼핏 들으면 매우 타당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면 그런 말은 한갓 이상일 뿐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나 세속적인 삶이나 모두 전문가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농사하는 사람은 농부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괜히 장사하는 사람과 어울리면 자신의 농사일이 초라해 보이고 갈등이 생겨 자신도 장사해볼까 하는 헛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농사를 걷어치우고 장사길로 나갔다가 낭패를 보고 인생이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사는 교사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정보를 얻게 되고 더 나은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배우는 배우끼리 어울릴 때 가장
안전하고 발전이 있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분야에 기웃거리면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편식을 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도 역시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체질에 맞는 음식이 있고 해가 되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주로 먹어야 건강합니다.
체질에 따라 음식을 선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육류가 맞는 사람이 있고 채식이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편식이 건강에 더 좋습니다. 저의 조카도 육류 알러지가 있습니다. 10대인데 고기 종류를 먹으면 피부가 붉어지고 심하게 가려운 피부알러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될수록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자신의 체질에 맞는 음식을 선택하여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음식이나 골고루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성장기에 속한 어린이에게는 타당성이 높지만 성장을 이룬 성인에게는 오히려 편식이 건강에 더 좋은 것입니다. 운동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종류의 운동이 있지만 그 모든 운동이 자신에게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몇 가지 종류는 도움이 되지만 어떤 종류는 오히려 해롭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아침형 인간이란 말이 유행해서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다가 오히려 병을 얻은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에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이지요. 저의 아내도 야간형이어서 밤에는 생기가 돌지만 낮에는 무기력해집니다.
반대로 저는 새벽형이어서 04시면 눈이 떠지고 그 시간부터 하루가 시작됩니다.
신앙생활 역시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에 전념하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이것저것 다 손을 대면 결국은 어정쩡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아마추어 수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프로는 한우물을 파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깊이 있게 개발하고 그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문가들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어정쩡한 아마추어들로 인해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멸시를 당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철저한 전문가들이 모이는 집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분야에 대해서는 막힘이 없는 그런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이것저것 건드리다가는 세월만 가고 맙니다.
한 가지 일에만 골몰해야만 그 일에서 오는 기쁨이 그윽해지고 깊어집니다.
자신의 적성과 취향을 모를 때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합니다.
이것저것 해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적성이 발견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것은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그 일에만 매진해야 성공할 수 있지요.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모를 때는 이런 일 저런 일에 관여하여야 합니다.
교회 활동도 많이 해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였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해 오던 행동은 정리하고 한 부분에 고정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 부분에 관한 글만 읽어야 합니다.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같은 성향을 가진 동반자를 만나고 그들과 연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소규모의 모임을 통해서 그 기능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동호회가 있는 것처럼 동반자의 모임인 가정교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는 속에서 다듬어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동반자들이 모여야 영적 성장이 더욱 깊어지고 빨라집니다.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면 갈등만 깊어지고 상처만 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다양한 집단들이 뒤 섞이기 때문에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하향 평준화가 되고 만 것입니다.
전문가 없는 아마추어 집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서로 잘났다고 자기 자랑만 합니다.
어설픈 잡동사니만 모이면 그 결과는 자기 자랑으로 나타납니다.
추구해야 할 정점이 없기 때문에 요란하기만 하고 친목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목적으로 모인 동호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압니다.
그리고 누가 더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질서가 생깁니다.
잡동사니만 모이면 그 집단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강제가 필요합니다.
강압적인 수단이 없이는 이런 집단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런 집단은 그 집단을 유지하는 일로 세월과 정력을 다 소모하고 맙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그저 모이는 일에만 모든 에너지를 쓰고 마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모여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강제적인 압박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반자를 만나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동반자를 만나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영적 동반자를 만나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