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받은후 실족으로 낙심하지 말라! 우리는 집회에 참석하거나 책을 읽거나 또는 어떤 만남을 통해서 은혜의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아주 즐거운 경험이다. 우리는 크게 깨닫기도 하며 우리의 영혼이 고양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삶의 방향이 바뀌어지기도 하며 새로운 결단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몹시 행복해져서 울기도 하며 그 희열과 감동을 주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 그런데 문제는 그 은혜와 감동이 그리 오래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간은 지나고 감동은 식는다. 한 때 강렬하고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었던 그 감미롭고 평화로운 느낌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꿈결처럼 느껴진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 속에 가물가물하다. 항상 은혜와 감동 속에서만 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할머니 집사님을 어떤 기도원에 모시고 간 적이 있었다. 하루에 세 번씩 뜨겁고 열정적인 집회를 통해서 은혜에 푹 잠긴 할머니 집사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너무나 시원하네요. 맨 날 여기서만 살았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것은 소망사항일 뿐이다. 은혜의 순간은 잠깐이고 집회는 언젠가 끝이 나며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기도원이나 집회에서 경험하고 부딪치는 영과 전혀 다른 영들과 씨름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전쟁이며 사명이다. 항상 기도원에서 집회를 하면서 세상과 떨어져 살면 정말 좋을까?
그러면 아무 근심도 염려도 없을까? 그러면 우리 영혼이 계속 성장하며 천국에 있게 되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단언하지만 그러한 상태에서 영혼이 자라기는 어렵다. 항상 예배를 드리고 기도만 한다고 영이 자라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영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 흰눈이 온다. 흰눈이 많이 내렸다. 그래서 세상이 모두 하얗게 되었다. 쓰레기통 위에도 지붕 위에도 길에도 온통 하얀 색 뿐이다. 과연 그 하얀 눈 때문에 모든 것의 성분이 바뀌게 되었을까? 모두 다 하얗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잠시 흰눈이 그 위를 덮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 눈의 밑에는 여전히 쓰레기가 있다. 여전히 지붕이 있다. 그것은 눈이 녹으면 다시 그 정체를 드러낸다. 만약에 그 눈이 녹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흰눈에 가려져서 그 눈 밑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은 여전히 더럽다. 조금 더 오래 눈에 덮여있다고 해서 그 밑에 있는 것의 성분이 바뀌어지지는 않는다. 은혜의 경험도 이와 같다.
집회에서 아름다운 은혜의 말씀을 듣고 순결한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는데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성질이 드러날 리가 없다. 그런 곳에서도 상처받고 실족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러한 곳에서 속에 있는 악성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은혜 가운데에서만 살고 우리 안에 내재된 그러한 악성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좋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영혼이 성장해서 악성이 소멸되어서 평화로운 것과 속에 있는 악성을 건드리는 사람이 없는 편안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은 다르다. 베드로는 은혜의 산에서 초막을 짓고 살고 싶다고 했지만 그거야 누가 그렇게 못하겠는가. 산 위에서 맨 날 기도만 하고 찬양 집회만 하고.. 은혜 가운데서만 사는 것.. 그거야 누가 못하겠는가.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으며 곧 산밑에 내려가 슬픔과 전쟁과 많은 문제들과 부딪치도록 하셨다. 그렇게 현실에 부딪치면서 우리는 실제적인 신앙과 영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집회하면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삶 속에서, 고난 속에서의 감사를 경험해야 한다. 집회하면서 감동과 은혜가 충만할 때 용서하는 것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용서와 용납을 경험해야 한다. 집회에서 사람들이 따뜻한 웃음으로 우리를 포옹할 때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도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속을 뒤집어 놓을 때 그 때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실제적인 신앙이며 실제적으로 주님을 알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회에서의 은혜는 하나의 수학공식을 배우는 것과 같다. 현실의 삶은 그 공식을 이용해서 응용 문제를 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공식을 많이 외우고 있어도 그가 실전에서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면 그는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천국은 공식을 이해하고 외운 후에 시험을 쳐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실제의 삶을 통해서 들어가는 곳이다. 실제의 삶을 통해서만 우리의 믿음은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보잘 것이 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집회에서 울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자식에게 성질을 낸다면 그는 주님과 먼 곳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원, 저 교회 집회, 이 영성 세미나, 저기 기적의 집회.. 하는 식으로 돌아다니기 바쁜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영혼이 자라기가 아주 어렵다.
그는 항상 공식만 배우려고 하며 문제를 푸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는 항상 눈 위에서 살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 눈이 녹아서 그 속의 쓰레기가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영성수련 장소는 곧 우리가 처한 환경이다.
이것을 벗어나기를 항상 고대하는 이들은 실제적인 주님께 나아가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현실의 환경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자, 이제 이야기를 진전시켜보자. 어떤 사람이 잠시 일상을 벗어나 아름다운 집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넘치는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 그는 너무 행복해진다. 하지만 그러한 은혜의 공간을 벗어나고 그는 집으로 돌아간다. 직장으로 돌아간다.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자, 이제 그는 다른 분위기에 접한다. 거기에는 감동적인 멘트도 없다.
은혜가 흐르는 찬양의 선율도 없다.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순결한 눈물도 없다. 그저 메마르고 삭막한 세상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긴장이 있고 욕심과 분노와 갈등과 의무와 짐이 있다. 누군가 그의 성질을 건드린다. 그것은 그의 아이일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직장에서 부딪치는 사람일수도 있고 가족일수도 있다. 아마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가족일 경우가 가장 많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잠시 참는다. 그리고 조금 더 참는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그는 폭발한다. 분노를 터뜨린다. 그리고 나서 조금 시간이 지나서 그는 낙담하기 시작한다. 그는 절망에 빠진다. 이게 뭐야? 나는 이번에 내가 정말 변화된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 내가 정말 은혜 받은 게 맞는 걸까? 그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상념들이 그를 뒤덮는다. 나는 위선자가 아닐까? 조금 전의 집회에서 나는 천사와도 같았지. 그런데 지금 나는 왜 이 모양이지? 아니야. 내가 울면서 기도할 때.. 그 때는 정말 진심이었어. 하지만 왜 나는 그것을 유지하지 못할까..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한다. 나는 주님의 가까우신 임재를 경험했다.
그런데 그러한 내가 이렇게 다시 무너질 수 있을까. 나는 주님을 더 깊이 배신하고 상처를 준 것이다. 주님이 나에 대해서 실망하신 것은 아닐까.. 주님은 내게 다시는 임하시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이제 그는 더욱 더 늪에 빠진다. 그런 식으로 시간은 지나고 그는 예전과 똑같아 진다. 다시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강퍅해지고 다시 세상의 즐거움들과 쾌락들을 추구하게되며 잠시 끊었던 죄를 다시 짓기 시작한다. 은혜를 경험하고 그리고 다시 실족하고..
이러한 경험들은 한없이 되풀이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뭘.. 내 주제에.. 무슨..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그는 절망한다. 다른 이들이 은혜를 받고 열심을 내며 감동하고 있을 때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좋을 때지.. 너도 지나가 봐라.. 나도 한때는 너와 같이 뜨거웠었어.. 은혜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더 어렵다. 그리고 그 은혜와 감동을 유지하도록 돕는 이들은 드물지만 그것을 깨뜨리려고 애를 쓰는 이들은 참으로 많다. 우리의 주위에서 그들은 말한다. 은혜 받았다는 애가 왜 그 모양이니? 은혜가 맞니? 마귀에게 속는 것 아니냐?
어디.. 얼마나 가나 보자..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한 이야기들은 아주 효과적으로 우리의 기를 죽인다.
자. 정리해보자. 집회나 어떤 계기를 통해서 주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은총은 현실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은혜의 경험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 이러한 실족의 경험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가? 그것은 정말 마귀의 방해공작인가? 흔히 마귀의 은혜 방해공작이라고 많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들 많이 가르친다. 부흥사들은 겁을 준다. 조심하세요. 지금 이 기도원을 나가자마자 마귀들이 공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성도들은 바짝 쫄아서 기도원을 나서지만 넘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말 그러한 넘어짐은 마귀 역사의 결과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자연 법칙과 같은 것이다. 일단 이 사실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어떤 사람이 은혜의 경험을 했다면 그는 머지 않아서 실족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말이다. 자, 어떤 사람이 주님의 귀한 터치를 받았으며 너무 감격해서 울고 통곡하며 자신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주님께 드렸다고 하자. 그 사람이 간증을 하는 것을 보면서 당신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머지 않아서 넘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괜히 심술이 나서 이런 말을 하는가? 아니다.
나는 그 이유를 자연법칙을 통해서 몇 가지로 설명해보겠다. 나는 다만 은혜 후에 그러한 실족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그리 낙담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당신에게 이해시키고 싶은 것뿐이다. 그렇다고 나는 은혜가 임했는데 왜 아직까지 실족이 오지 않느냐고 괴로워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좋으면 좋은 거지 쓸데없이 고민을 만들 필요는 없다. 왜 은혜 후에 넘어지는가? 자연법칙을 보자. 첫째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다. 하나의 작용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있다.
이것은 마귀의 역사가 아니고 하나의 자연 법칙이다. 기차가 빠르게 달리면 반드시 반대방향에서 공기의 저항이 있다. 공기가 마귀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법칙이다. 어떤 물체를 밀면 그 물체를 지탱하려고 하는 반작용의 힘이 일어나게 된다. 하늘을 향해서 뛰면 땅 아래에서 중력의 작용이 끌어당기려고 한다. 이러한 반작용의 법칙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어떤 이가 다시는 분노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그 순간 속에서 분노의 기운이 올라온다. 평소보다 더 올라온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반작용의 법칙이다. 어떤 이가 당분간 아침 금식을 하기로 작정한다.
그는 평소에 아침에는 밥맛도 없기 때문에 영성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고 생각하고 아침 금식을 결정한다. 그런데 그 날 아침부터 갑자기 밥맛이 너무나 좋아진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반작용의 법칙이다. 어떤 이가 천국을 행해서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면 그를 향해서 지옥의 끌어당김이 시작된다. 이것이 영계의 법칙이다. 천사들은 그를 돕지만 또한 지옥에서는 그를 향한 공격이 시작된다. 특별하게 지옥의 마귀들이 그에게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법칙인 것이다. 어떤 이가 지옥 쪽으로 떨어져가고 있다고 하자.
천국에서는 그를 끌어당기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와 같이 하나의 힘이 있을 때 항상 반대쪽에서는 균형을 위해서 다른 힘이 작용하게 된다. 이 반작용 때문에 사람들은 잘 변화되지가 않는 것이다.
하나의 악한 습관을 버리려고 할 때 반대편에서 그 습관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씨름들이 바로 영적인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넘어짐의 역사가 따라오게 된다. 그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실족에 대비해야 하며 그것을 대수롭게 여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자연법칙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은혜 후의 실족이유는 모든 자연은 항상 반복을 통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파도는 항상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밤과 낮도 반복된다. 해가 뜨고 다시 지면 달이 뜬다. 그리고 달이 지고 나면 해가 돌아온다. 모든 자연은 항상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가 주님을 경험하고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영원토록 그 은혜 안에서만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오해다.
그것은 파도가 한번 오면 계속 한 없이 끝없이 밀려오기만 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파도가 밀려오면 밀려오는 것만큼 뒤돌아간다. 많이 밀려오면 많이 돌아가며 적게 밀려오면 적게 돌아간다. 어떤 이에게 은혜가 임했다면 얼마 후에 그 은혜의 파도는 돌아갈 것이다.
밀려온 파도가 컸다면 돌아가는 파도도 클 것이다. 파도가 조금 밀려왔다면 돌아가는 파도도 적을 것이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는 만큼 얼마 후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한번 갔다고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리 절망할 이유가 없다. 사람도 자연과 같이 주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분노라고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번씩 폭발하는 사람이 있고 삼일에 한번씩 폭발하는 사람이 있다. 일주일에 한번씩 폭발하는 사람은 한번 폭발하고 나면 5,6일은 잘 버틴다.
하지만 6일이 지나면서 그는 서서히 끓어오른다. 7일이 되면 그는 폭발한다. 그 때 옆에 있는 강아지가 그를 화나게 하든지 TV의 뉴스가 화나게 하든지 가족들이 화나게 하든지 아무튼 그는 참을 수 없다. 그에게 이제 파도가 돌아오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일주일이라고 정해진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다 그런 주기를 가지고 있다. 우울해지는 것도 대체로 주기적이다.
은혜를 받는 것도 주기적이며 은혜를 쏟는 것도 주기적이다. 정이 많아지는 주기가 있고 냉정해지는 주기가 있다. 모든 것들은 파도와 같으며 주기를 따라서 되풀이된다. 그것이 자연이다. 사람도 자연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중독자가 항상 중독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다.
도박을 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상태가 있고 그거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있다. 그러한 상태들은 주기에 따라 반복된다. 그러므로 자연이 그런 식으로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를 반복하면서 움직인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영적 감동이 시작되었다고 죽을 때까지 그 방향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낮이 오고 밤이 오듯이 지금이 은혜와 영혼의 시간이라면 조금 후에 실족과 육체의 시간이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은 다시 은혜의 시간은 돌아온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변덕이 죽 끓듯이 살게 된다는 것일까?
마음이 이리 갔다가 저리 가고 은혜가 왔다가 다시 열을 받고. 이 비극적인 되풀이를 끝없이 계속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인가? 우리가 큰 줄기에서 주님을 선택했다면 그 큰 줄기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달의 궤도를 보자.
그것은 지구의 주위를 돌면서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구를 도는 것은 같다. 지구를 돌다가 갑자기 궤도를 바꾸어서 화성을 돌았다가 다시 기분이 나빠지면 토성을 돌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거리는 차이와 변화가 생기지만 지구를 계속 도는 근본적인 궤도는 변하지 않는다. 파도도 그와 같다.
지금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도 우리의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동해에서 움직이던 파도가 갑자기 대서양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주님을 향할 때, 주님을 바라보고 구할 때 그 근본 궤도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주님과의 거리와 감동과 영적 상태는 계속적으로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변화에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뜨거움에 대해서 너무 감격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냉담함에 대해서 너무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향하고 있다면 그는 어떻든 전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령이 아주 뜨거울 때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일까?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심령이 아주 메마르고 황폐하고 냉담한 상태에 있을 때 실제로 성장하는 것일까? 그 답은 성장에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파도는 밀려가는 것과 밀려오는 것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파도이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슬픔이 다 필요하다. 감격의 경험과 메마름의 경험이 둘 다 필요하다. 하얀 눈에 쌓이는 경험과 그 눈이 녹아져내려 누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경험이 동시에 필요하다. 우리는 주를 알기 위하여 주님의 살과 피가 필요하다. 주님의 살은 떡이며 주님의 피는 포도주이다. 주님의 살과 떡은 주님의 풍성함과 누림을 의미하는 것이며 주님의 피와 잔은 주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장을 위해서 우리는 행복한 경험과 고통의 경험이 동시에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환희의 경험과 실족의 경험이 동시에 필요하다. 밀물과 썰물이 하나를 이루고 남자와 여성이 하나가 될 때 생명이 탄생되듯이 우리가 주를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환희와 좌절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은혜와 감동만을 경험하고 실족과 좌절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우 불완전한 성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로, 자연법칙을 하나만 더 보기로 하자. 자연은 항상 반대되는 리듬을 계속 반복하지만 그러한 반복을 통하여 조금씩 변화되어 나아간다는 것이다. 날마다 낮이 오고 밤이 온다.
그것은 항상 되풀이되는 것 같다. 똑같이 반복하는 것같이 보인다. 파도도 항상 밀려오고 밀려간다. 그것은 항상 똑같은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르다. 그것은 점점 더 달라진다. 낮은 똑같은 낮이 아니다.
점점 더 길어지기도 하고 점점 더 짧아지기도 한다. 파도도 반복되지만 점점 더 물이 많이 들어오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반복 같지만 나중에 보면 상당히 많은 변화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은혜와 실족도 이와 같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항상 똑같은 것 같다. 감동하고 울고 다시 화를 낸다.
감동하고 울고 다시 화를 낸다. 담대함을 얻고 현실에 나가면 다시 두려움에 잡힌다. 다시 힘을 얻고 현실에서 다시 두려워한다.
도무지 변화되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다르다. 분명히 다르다. 한꺼번에는 아니지만 그렇게 하루 하루 한 달 한 달 지나면서 나중에 생각해보면 분명히 전보다 무엇인가가 다르다. 자신이 보면 똑같다.
왜 나는 변화되지 않는 거야? 도대체 언제 까지 다람쥐 쳇바퀴를 돌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 달라지신 것 같아요. 전과는 달라요. 뭔가 달라지셨어요. 우리는 그렇게 자라는 것이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해서 봄은 아니라는 속담이 있다. 개구리 한 마리가 땅에서 튀어나왔다고 해서 봄이 된 것은 아니다. 봄은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개구리가 여기서도 튀어나오고 저기서도 튀어나오며 어디서나 개구리가 뛰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이제는 봄이 온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은 봄을 갑자기 가져다 주지 않는다.
추운 겨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몸도 마음도 얼어붙는다.
날은 춥고 바람은 거세다. 우리의 입은 얼었으며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한다. 주님.. 봄을 주세요. 하지만 그 다음날에도 여전히 날은 춥다. 바람소리는 흉흉하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일까? 하루, 하루 시간은 지나고 우리는 꿈을 잃어버린다.
봄은 오지 않아. 내 인생에 봄은 없어. 나는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건가봐.. 어느 날 당신은 눈을 뜬다. 그리고 바람소리가 부드러워진 것을 느낀다. 당신은 일어나서 바람을 만진다. 그리고 말한다. 아.. 따뜻해졌네.. 이제 봄이 왔구나. 그런데 언제 봄이 온 거지? 바로 그것이다.
봄은 당신을 버린 것이 아니다. 봄은 당신을 향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고 있었다. 그것이 자연의 방식이다. 그들은 날마다 똑같지만, 똑같은 것 같지만 날마다 조금씩 가까이 온다. 당신이 봄을 구했을 때 찬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당신은 절망했다. 역시 봄은 오지 않아.. 라고. 나는 틀렸어. 라고.. 하지만 그 겨울의 찬바람도 당신에게 봄이 다가오고 있는 순간이었다. 과정이었다. 당신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은혜를 받고 실족한 후에 아, 또 넘어졌어. 나는 가증스러워. 아직도 찬바람이 불고 있어. 언제나 봄은 오려나. 내 인생에 봄은 없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지금 봄이 오고 있는 중이다. 다만 아주 천천히 오기 때문에 당신이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은 같은 것을 되풀이하면서 점점 변화된다.
조금씩 나아간다. 당신도 은혜와 실족을 되풀이하면서 변화된다. 당신도 믿음의 뜨거움과 식음을 반복하면서 더 앞으로 나아간다. 언젠가는 봄이 올 것이다. 근본 중심을 잡고 있으면 당신은 나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 은혜 가운데 있는가?
너무 좋아하지 말라. 방심하지 말라. 당신은 얼마 가지 않아 넘어질지 모른다. 지금 실족한 가운데 있는가? 은혜를 쏟았는가? 너무 낙심하지 말라. 당신에게 봄이 가까워지고 있다. 당신은 좀 더 깊은 은혜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스케이트를 금방 배운다.
하지만 어른들은 잘 배우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어른들은 넘어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넘어지게 되면 깔깔 거리고 웃는다. 그래서 그들은 빨리 스케이트를 배운다. 넘어져 있다고 낙심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음에는 좀 더 나아질 것이다. 지금 넘어졌으니 다음에는 은혜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라.
지금 잘 못하더라도 내일은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오직 중심궤도만을 굳건하게 잡으라. 그것이면 충분하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붙들라. 그분만이 당신의 삶의 목적이며 의미며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라. 그 정도면 궤도가 잘 잡힌 것이다. 그 후에는 넘어져도 신경 쓰지 말라. 곧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건 봄은 오고 있다.
영원한 곳에 이르러 당신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이 항상 당신의 손을 붙들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이르러 당신은 다시는 그 분의 손을 놓치지 않고 영원히 영원히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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