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위로가 되는 영적 만남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고 이 땅에서 고난도 견디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소망으로만 간직하는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망 가운데 천국을 그려봅니다. 간혹 우리들 가운데 천국을 경험했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영안이 열릴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천상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물론 영안이 열려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와 존재들을 목격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완전했던 믿음이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실존을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도 확실해집니다.
저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의 직임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88년 여름에 집중적으로 영안이 열려 천사들과 악령들을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장관의 방문을 받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파송되어온 메신저인 천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이 나라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제게 들려주셨으며, 주님의 마음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에 관한 말씀을 천사들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고, 그 모든 말씀을 주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마음에 품어두어야 한다는 조건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열 여덟 해가 지나는 동안 겪게 되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시험의 고비에서 천사들이 찾아와 위로해주었습니다.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영적 존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큰 위로를 받은 것은 바울도 경험한 바입니다.
바울이 낙망해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힘을 더해주었고, 이런 경험을 얻은 바울은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광풍 속에서 좌초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죄수인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생명이 위험하게 되는 그날 밤에 주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를 위로했습니다. 이런 영적 경험은 바울로 하여금 고난을 이길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선교 사명을 더욱 더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비롯해서 사도들이 경험한 영적 만남은 그들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더욱 더 강하게 하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복음전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으며, 시련과 역경이라는 중대한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전파의 길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의 수단으로 영적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사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영적 만남은 그들로 하여금 확신에 찬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 머무는 지루한 세월 동안에 경험한 천국 방문 역시 긴 세월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그의 현실적인 지루함에 대한 주님의 위로일 것입니다. 14년이나 긴 세월동안 잊혀져 살아가야만 했던 바울은 그 기간이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얻는 세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르심에 대한 깊은 갈등에 휘말리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도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사역은 지리멸멸하고 처음 받았던 비전과는 동떨어진 현실만 전개되는 지루함 속에 갇혀 있다면 아마도 소명에 대해서 회의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의 위로나 설명은 설득력이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해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통제처럼 복용했을 때는 산듯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지긋지긋한 고통이 찾아오는 것처럼 일상이 다시 지루하고 답답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고통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영적 존재와의 만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를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다시금 힘을 얻어 전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근원적인 회의를 느낄 때 그를 찾아와 위로한 것도 영적 존재인 천사였습니다. 갈멜산에서의 위풍당당한 승리 후에 바로 찾아온 낙망은 이세벨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내용이지만 선지자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정치세력인 이세벨의 위협은 그로서는 스스로의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역을 하다보면 스스로 느끼는 한계선이 있습니다. 영적 사역 가운데 치유사역이나 축사 사역을 하다보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분명한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병을 고치셨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치유이지만 결코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귀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리 명령해도 꿈쩍하지 않고 있는 귀신을 대할 때 도대체 예수의 이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의문에 휘말립니다.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높은 담과 같이 느껴지는 어떤 한계선을 마주칠 때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찾아온 천사의 방문은 엘리야로 하여금 새로운 힘을 얻게 해 주었으며,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갈멜산의 성공만으로 도취될 수도 있었던 엘리야에게 호렙이라는 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존재가 천사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고비를 만나게 되고, 전환점을 지나게 될 때 천사의 방문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영적 여정에서 고비 때마다 천사를 만났습니다. 여러 차례의 천사의 등장은 고지성(告知性)이 있었습니다. 전환점에 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통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새로운 일을 행하실 때 우선 그 종인 선지자에게 통고하게 됩니다. 오늘날은 이런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선지자를 비롯한 오중 사역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은 천사의 등장이 과거보다 더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선지자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성도들이 천사의 방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복음전파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증대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아시아의 복음 전파를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방법이 전통적인 서구식이 아니라 새로운 동양식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고스 중심의 전도 방식에서 벗어나 푸뉴마 중심을 더해야 합니다. 이것은 과거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며 프로그램되고 예측이 가능한 방식이 아니며, 돌발적이고 상황적인 것입니다.
천사의 등장은 극적인 상황의 반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안이 열려 천상의 존재를 만나는 것은 분명히 특별한 상황임에 분명합니다. 일반적인 성도들이 이런 경험을 거의 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의 삶이 극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높은 차원의 믿음의 도전을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전개를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려고 하지만 당사자는 그것을 거부하고 주저앉으려고만 합니다.
저에게 상담을 해 오는 사람들 가운데 무언가 삶의 변환을 가져와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피하고 싶어만 하며, 적당히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추천하는 방식을 따를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일반 목회자들은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는 방식을 추천합니다. 전적으로 생업을 포기하라든가, 죽을 각오로 기도에 전념하라든가 등의 결단을 촉구하기 보다는 적당한 수준으로 약화시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바람직해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준으로는 영적 만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극단적인 결단을 해야 할 고비를 몇 차례 만나게 됩니다. 이때가 인생의 전환점이며, 새로운 차원으로 상승하는 기회입니다. 이때는 극단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결단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몰렉과 같은 이방신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신공양(人身供養)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은 기독교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방법을 선택했고 결단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여호와 이레”라는 놀라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큰 위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만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믿음으로 결단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결단을 할 때 하나님은 피할 길을 제공하시며, 감당할 수 있는 위로를 주십니다. 그 내용 가운데 천사의 방문을 비롯한 영적 위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이런 유형의 극적인 경험을 가지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삶이 전형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틀에 박힌 전형을 좇아가는 것은 무의미하고 지루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역전’이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 수단으로 로또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요행수를 선택해서 인생역전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거는 유일한 수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생역전이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 시작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갈멜과 호렙으로 이어지는 영적 변환을 경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