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높은 차원의 영적 단계로 들어가기2024-07-23 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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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차원의 영적 단계로 들어가기 우리는 영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다양한 영적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환상이 있습니다. 영안이 열려서 영적 존재들을 볼 수 있게 되거나 어떤 영상을 보게 됩니다. 이미 꿈과 환상에서 다양한 내용들에 대해서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그것은 피하고 이런 영적 경험들이 지속 되는 것이냐 아니면 일시적인 것이냐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환상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체험을 하고 영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에 힘쓰면 힘쓸수록 신비한 경험들을 수시로 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적어도 2~3년은 지속됩니다.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 병자들을 치유하기도 하고, 귀신을 쫓기도 합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미해지고 마침내는 있는 듯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며, 혹시 자신이 하나님에게 범죄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회개도 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경험과 능력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보다 더 나은 단계로 들어가기 위한 시험의 기간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아주 드물고 대부분은 후자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눈을 떠서 신비한 것을 경험하게 하는 목적은 우리의 영성이 성숙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고 영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집중적으로 영적 경험을 하게 합니다. 이 기간이 대체로 2~3년간입니다. 이 기간이면 다양한 영적 현상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 경험을 오감을 통해서 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감각기관이며, 하나님은 이 기관을 사용하십니다. ?치만 니와 같은 분들처럼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해서 육체의 감각과 혼의 감각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육체의 것과 영의 것이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적 감성으로 느끼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저는 이런 주장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에게 그 모든 것을 전하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육체입니다. 육체의 감각기관이 없이는 우리는 영의 일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육과 혼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이론에 지니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 영에 전달하고 우리 영은 육체의 기관을 사용해서 우리가 깨닫도록 합니다. 오감을 통해서 영의 다양한 증상들을 느끼게 되며, 이런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육체 본연의 작용으로 느껴지는 것과 혼동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경험들을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면 다음 단계는 감각이 아닌 이미지로 그것을 파악하는 수준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을 워치만 니는 영적인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혼의 감각을 넘어서 영의 감각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영적 감각으로 이해하는 단계와 단순히 오감을 통해서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단계를 구분하여 설명하지만 저는 이 두 단계 모두를 영의 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이후에 계속 이 두 가지 요소들을 다 가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오감을 통해서 느끼는 단계를 혼의 단계라고 보고, 이미지를 가지고 느끼는 단계를 영의 단계라고 설명한다면 높은 단계에 이른 사람은 낮은 단계의 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낮은 단계의 것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 낮은 단계로 내려갈 필요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두 단계를 수시로 오르락내리락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단계에서 오는 기능들이 보다 성숙한 단계에서도 자주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저는 근본주의 신학의 교리를 옹호하는 입장이 아니라 제가 경험한 결과 굳이 구분해서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분설의 입장을 따르는 것입니다.
영의 경험이 전무한 사람은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이며, 이런 사람의 생각은 육체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영적 경험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영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성숙한가 미성숙한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보다 성숙한 자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인식하는 수준입니다. 한 번도 영적 현상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보지 않고 보는 것처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보아야 하고 들어야 합니다. 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고 난 후에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본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신 분입니다. 보지 않고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말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어야 합니다. 오감을 통해서 다양한 모습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수준은 초보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2~3년 후면 서서히 사라지는 영적 현상들입니다. 이제는 오감으로 경험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을 영으로 살아가는 단계라고 설명하며, 영에 속한 사람이 된 증거라고 말하지만 저는 성숙한 단계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계는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이는” 단계입니다. 즉 “네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그 단계입니다.
보다 수준 높은 신뢰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 안에 거하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 말이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성숙한 영적 단계에 이르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보지 않아도 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바로 이미지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훈련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감을 통해서 얻어지던 영적 경험들이 이제 서서히 영으로만 감지해야 하는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과정으로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은 무척 혼란스러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영적 능력들을 거두어 가신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도 하고 영적 경험이나 능력을 잠시 경험하게 한 것은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단정합니다. 이 경우에 남성인 경우 목회자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데 신학교에서 공부에 열중하다보면 어느덧 능력이나 영적 현상들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면 그것은 한 때 자신을 목회자로 이끌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여기고 더 이상 갈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되는 일과 영적 경험을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경험들은 영의 성숙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단계를 ‘혼적인 단계’라고 설명하지만 저는 낮은 차원의 영적 단계로 봅니다. 성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이미지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형상’(image)입니다. 이 형상을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영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며,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면 그 증거들이 여러 모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낌이라는 감각의 수단을 통해서 알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감각의 수준이 아니라 이미지의 수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미지란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 것처럼 들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높은 수준의 영적 단계이며,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렇게 되기를 주님은 소망합니다. 그러려면 먼저는 보고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선입니다. 이 과정이 없다면 그 믿음은 예수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창피만 당합니다. 서서히 보이던 것도 들려지던 것도 줄어들기 시작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이미 보고 들은 것을 발판으로 보고 들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미 얻은 영적 경험을 바탕으로 믿음을 만들어내고 그 믿음의 바탕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며 그것을 담대하게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경우 듣고 보는 것으로 예언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성숙하게 되면 자신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 됩니다. 믿고 선포할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하면 더 많은 책임이 따르고 위험 부담이 더욱 커집니다. 미숙할 경우에는 들려지는 대로 보이는 대로 따라서 하면 됩니다. 그러던 것이 서서히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언의 능력이 사라지거나 축소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환상도 보여주시고 말씀도 들려주십니다. 그래서 예언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영으로 어떤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 같고 들은 것 같은 믿음이 솟구칩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것 같지만 영으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압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 이 과정을 경험하게 되면 알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보도 들을 수 있고 그리고 보도 듣지 않아도 같은 수준으로 영의 일을 합니다. 영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단계가 높은 수준의 영적 단계입니다. 이 과정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하나님은 자주 보이던 환상도 서서히 거두어들입니다. 자신의 영의 능력으로 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미지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도들이 경험하고 소유하는 단계에 대해서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높은 차원의 영적 경험들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익혀야 하는 과정이며, 삭막하고 고독한 영적 고립의 단계를 지내야 합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이 단계의 과정을 치렀고 그는 이 과정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생각할까 염려해서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표현을 쓰면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지로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은 정말로 모호하고 자칫하면 신인합일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자신이 예수가 되었다고 헛소리하게도 됩니다. 말이 능력이 되는 단계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이 과정은 힘든 광야를 거쳐야만 합니다.
서서히 영적 경험들이 줄어들 때 우리는 몸부림칩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지만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자신의 내면에서는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먼저 내 안에 거하는 경험을 했다면 이제 우리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할 때는 겉모습이 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내가 거하면 겉모습은 주님 모습입니다. 즉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주님의 말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칫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오랜 시련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불같은 시험을 통해서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을 한없이 낮출 줄 알게 됩니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다시금 환상이 보이고 주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역시 마찬가지로 주의 일을 잘 해냅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며, 자신이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