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있는 ‘바리새인의 영’ Pharisaical Spirit in the Church
사단이 교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은 ‘바리새인의 영’입니다. ‘바리새인의 영’은 극심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바리새인의 영’이 아벨을 죽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게 하였고, 사도 바울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바리새인의 영’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소멸하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는 성도들을 멸하려 하고 있습니다.
본래 ‘바리새인의 영’은 하나님의 은혜는 경멸하면서 율법주의는 사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거부하고 거절했습니다. 예수님 그분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모퉁잇돌이 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구약 성경을 해석했고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따라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했으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보다는 그들 스스로 세운 전통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죄인들에게는 관대하셨지만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친절한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으셨으며 그 어떤 축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태복음 23:27)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한복음 8:44)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마태복음 27:17-18)
오늘날 교회 안에 ‘종교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 높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높은 직분을 가지는 것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또한 그들은 전통과 율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셨던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단지 그들의 거짓된 의로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에 만족합니다. 이런 ‘종교의 영’은 지금까지 교회에 침투해 왔던 어떤 악한 것보다도 더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만이 진정한 부흥을 일으키는 생수의 강을 이 땅으로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세상의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을 대항하는 영적 전쟁이자 혁명입니다. ‘종교의 영’은 이런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사단이 사용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겉으로는 마치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고 지키려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철저히 위장하고 나타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고 수세기에 거쳐 성경 말씀을 필사하고 또 필사했습니다. 물론 성경을 필사한 그들의 성실함으로 인해서 현재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이 오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순수하게 해석하기보다, 열심을 다해서 지켜낸 자신들의 전통을 근거로 삼아 성경을 해석하였습니다. 전통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은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예수님을 거절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이 ‘종교의 영’은 살아 있는 계시의 말씀보다 기록된 형태 그대로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 그분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그 성경책 그 자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있었던 ‘종교의 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사람이 만든 교리를 잣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열심을 가지고서 복잡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복잡한 성경 해석 방법이 곧 사람들이 만든 교리를 통합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애썼지만, 진정한 부흥이 왔을 때 성령님의 운행하심은 놓치고 맙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들의 교리적인 이해를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모두 ‘온전한 교리(Sound Doctrine)’ 역시 갈망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교리’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교회가 어떤 교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분열되고 형제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전한 교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 자체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교리를 높이려는 ‘종교의 영’이 놓은 또 다른 덫에 걸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가 얼마나 정확한가?’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그리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삶을 통한 예배를 기준으로 심판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숨은 동기와 우리의 태도가 그 심판 기준이 될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암송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성경 말씀을 다 외우고도 여전히 진리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인격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계신 하나님보다 성경 자체를 더 사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빠진 채로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자체를 하나님보다 높이 두는, 즉 성경 말씀을 우리의 우상으로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경책으로 대신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된 가장 소중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율법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줍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가장 큰 비극은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로부터 배운 교리나 전통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