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자기 몫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앞의 글에서 부정적인 생각은 귀신을 불러들이고 그 생각이 무리를 만들어 공동체를 지배하게 되면 강력한 귀신의 진영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무리가 되며 무리는 강한 힘을 지니게 되며, 그 힘은 일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 예로 공산주의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갈등을 만들어냈고, 결국은 그 생각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사단의 도구가 되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경험했고 앞으로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히틀러의 나치주의, 레닌의 공산주의, 폴 포트의 킬링필드, 사인방의 문화대혁명 등은 모두 부정적 생각이 집단화했을 때 인류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처음에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지만 그것이 점차로 확대되고 군집을 이룰 때 주님이 지적하는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낼 것을 요구하십니다.
세상은 표면적으로는 긍정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능동적이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수동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긍정적인 생각은 행동을 필요로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행동을 배제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쉽게 부정적인 생각에 휘말립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집단화하기 쉬운 이유가 수동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행동은 하지 않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세상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는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려고 하지 않고 먼저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안 되는 쪽으로 생각이 먼저 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는 출석하지만 능력이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까닭은 그 생각 속에 이미 부정적인 생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소 긍정적인 것 같이 보이는 소극적인 태도는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표현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가능하겠지만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능력을 받거나 재주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나 같이 재주도 없고 능력도 받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소극적인 생각부터 앞서는 것입니다.
일이 되기도 전에 먼저 부정적인 생각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는 마귀의 세력이 강해지게 됩니다. 사람이란 영의 지배를 받는 존재입니다. 천사의 도움을 받느냐, 마귀의 지배를 받느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의적 판단이 허락되어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명령할 때에만 행동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의 명령 체계에 저항하는 무리이므로 독단적으로 행동하게 되지만 여기에도 질서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승인에 의해서 작용하게 됩니다.
이미 마귀가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이 되는 ‘승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마귀의 승인인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빌 4:13)라고 선포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능력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돕는 천사’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이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워넣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미 할 수 있는 능력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는 ‘소명’이며, 교리적으로는 ‘은사’ 즉 ‘직임’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야 할 의무이자 분깃(portion)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분깃을 제대로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은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스스로를 약화시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잠재적 능력’(potential capabilities)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수단들이 교육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라는 유명한 에디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야 네게 능력을 주었으니까 그것을 개발해서 많은 열매를 맺어보렴” 이렇게 자상하게 개별적으로 지시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개별적으로 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별도로 그런 말씀을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성경에 기록해 둔 것입니다. 그것이 유명한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런 부분에 관해서는 ‘계시’가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주어진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찾아내어 개발하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경험이 부족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직임과 능력이 주어졌는지를 찾도록 도움을 줄 사람들을 세워줍니다. 세상에서는 교사가 그 역할을 하지만 교회에서는 목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목사가 그 역할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목사의 역할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 중심주제가 바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게 해 주는 일입니다. 경험이 생기면 그 다음에 더해지는 능력과 직임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어 홀로서기가 되지만 처음에는 쉽지 않기 때문에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이미 주어진 능력을 발견하였다면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 다음입니다.
실제로 이 부분이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의 현실은 너무도 일방적이고 편협한 체계 속에 놓여있기 때문에 다양한 능력과 직임을 적용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목회자 일인에게만 집중되어 있고, 설교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고정시키고 있는 현재의 교단교회에서는 다양한 하나님의 나라의 직임들을 적용하기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적용해야 할 신령한 은사로서의 직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직무는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대부분입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능력을 주시고 아울러 충만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를 오해해서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거친 일을 포기하고 목회자가 되어 편한 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세상에서 섬기는 직무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이미 주어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활용하는데 서툽니다. 성경공부를 하더라도 포괄적인 원론적인 내용에만 머물면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까지 대체로 원론적인 교육만 했습니다. 대학으로 예를 들자면 늘 교양과목만 했습니다. 전공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지요. 항상 예과에만 머뭅니다. 본과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사람들은 대부분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툴기 짝이 없고 몇 번 적용하다가 곧 포기하고 익숙한 세상 방법을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가득한 이 나라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희귀합니다. 들추어 내지 않아서 없는 것 같지만 조사하면 다 나옵니다. 집단적이고 암묵적인 비행과 범죄 행위가 가득합니다. 이런 범죄 행위를 고발하는 소수의 내부 고발자들을 다수가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배제시키기 때문에 용기 있게 그런 죄악을 고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수의 침묵 때문에 비행은 더욱 늘어납니다.
방관자로 가득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을 개발하는 일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역시 안일한 무리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에서 안일한 자들에게 화가 있다”(암 6:1)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표현한 ‘안일하다’라는 내용을 영어로는 ‘at ease’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손을 놓고 편안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허리띠를 띠고 등을 켜고 서 있으라”(눅 12:35)고 주문하십니다. 결코 손을 놓고 편안하게 쉬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주님이 이 일을 하라고 자신을 불러냈고, 그 때문에 능력을 주셨고, 그래서 그 능력으로 반대하는 자들을 이기고 힘들지만 그 일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이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갈수록 강한 믿음이 생기고 역사가 나타나 확신하게 되었습니까? 그 일로 인해서 수많은 갈등도 생기고 때로는 회의도 일어나 그만 두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까? 그리고 더욱 더 많은 새로운 일이 그 일로 인해서 일어났습니까? 그 일로 인해서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고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이런 질문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십시오. 영국 울위치 교구의 감독인 존 로빈슨은 그의 유명한 책 『신에게 솔직히』에서 세속적인 거룩함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에게 솔직합니까? 우리는 늘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을 달고 다니지 않습니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대해서 살펴보지도 않았습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사람의 이야기는 잘 알면서 혹시 그 사람이 자신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우리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며, 나 자신을 향한 경고입니다. 구체적인 가르침을 제공해야 할 지도자들이 날마다 교양과목 수준으로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의 심각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