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있는 기도 영적 현상은 그 자체로만 가지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다고 단정하는 일은 무척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영적 현상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의 현상만을 가지고 분별하기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국어를 언어학상으로 분류하면 ‘고립어’(孤立語)라고 합니다. 라틴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유럽어를 ‘굴절어’(屈折語)라고 부르며, 우리말과 같은 일본어와 터키어를 ‘교착어’(膠着語)라고 하고 에스키모어를 ‘포함어’(包含語)라고 합니다.
고립어란 글자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사용되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즉 단어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려면 반드시 전후 낱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我愛你’에서 각각의 낱말은 그 순서와 곁에 있는 낱말에 의해서 성분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세 낱말을 바꾸어서 발음하면 즉 ‘你愛我’라고 발음하면 뜻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영어와 다소 다릅니다. 영어는 ‘I love you’라고 발음하는 것을 바꾸면 ‘You love me’가 되는 것입니다. ‘I’가 ‘me’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어는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독립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반드시 낱말의 전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렇듯이 단어 하나하나가 지닌 발음이 다른 발음과 관계될 때 의미가 확정되기 때문에 단순하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영적 현상은 독립적으로 사용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 역시 그러하지 않습니까? 하나의 말씀을 독립적으로 이해하면 오류에 빠집니다. 말씀과 연관된 여러 가지 관련 구절을 살펴보고 난 후에 의미를 확정해야 합니다. 단순히 절이나 단어만을 떼어내어 해석하게 되면 오류에 빠집니다. 성경을 통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로지 한 장절과 책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강해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오로지 계시록과 다니엘서만을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에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영적 현상들은 기도를 주관하는 영적 주체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체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 안에서 기도할 것을 권고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하는 기도가 아닌 영의 이끌림이나 도움에 의해서 기도하는 것을 통칭해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기도를 할 때는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조선왕조실록이 있습니다. 세종실록은 세종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세종 임금의 이름으로 기록합니다. 세종실록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작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인정합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역사들이 있는데, 그 실제적인 주체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는 알 수 없고, 상황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점검하여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능력 있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 존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까지 방해되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자신의 죄의 문제입니다. 죄가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방해를 받습니다. 성경은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훼방자처럼 인격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렘 5:25) 실제로 방해하는 인격이 아니라 사단이 방해하는 것입니다(계 2:9). 사단의 방해는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즉 사단의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들고 나와 문제제기를 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응답은 지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단이 때로는 까닭 없이 기도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단의 방해가 있다면 반드시 영적으로 어떤 신호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의 기도는 힘을 잃게 되고 답답하고 지루해서 포기하게 됩니다. 사단의 방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면 즉시로 사단을 물리치는 명령기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들에게는 다양한 신호와 느낌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신호에 의해서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기도에서 나타나는 영적 현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경험하면서 깨달아야 하는 숙제입니다.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서 서로 경험을 나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공동체가 함께 기도한 후에 기도 중에 경험한 것들을 서로 나누는 ‘코이노니아’(koinonia)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발전이 있습니다. 경험이 많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기도학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능력 있는 기도를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기도 중에 경험한 것에 대해서 성령에게 묻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령께 묻는다는 것은 그 현상을 깊이 묵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루 종일 그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생각을 집중해서 하다보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혜가 들어와 그 현상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후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경험은 경험으로 끝날 뿐이며 영적 현상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언어에서 하나의 단어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 하나로는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의사전달의 매체인 단어는 문장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진의를 알 수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의사표현의 수단인 이미지들은 상황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이 형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에 대한 지식이 많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비유로 하지 않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사소통의 수단인 이미지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자신이 경험한 이미지와 그 해석을 서로 나누는 모임이 필요합니다.
성경공부 모임 못지않게 기도모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는 단순히 기도하기 위해서만 모일 뿐 기도를 서로 나누는 공부를 위한 모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기도를 공부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공과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주관적인 영적 신호는 실제로 다른 사람들도 같이 경험하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저의 글을 읽는 성도들 가운데 제가 설명한 내용들의 글을 읽으면서 실제로 경험하기 시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것이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 간직하고만 있으면 개별적이고 주관적입니다. 그러나 함께 나눌 때는 공동체적이고 객관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영적 공명현상’이라는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서로 나누면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경험한 현상들에 대해서 저에게 개별적으로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바는 영적 경험은 결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사람마다 다른 상황에서 경험하기 때문에 내용이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말사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가’자는 명사로 쓰인 경우만 해도 1 경계에 가까운 바깥쪽 부분. 2 어떤 중심 되는 곳에서 가까운 부분. 3 그릇 따위의 아가리의 주변. 4 {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주변’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정확한 적용을 위해서는 주변 단어들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하듯이 기도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영적 신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서로 기도를 나눌 때 이런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배우고 실행해야 하는 기술입니다. 무턱대고 하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도는 “향방 없이 휘두르는 몸짓”(고전 9:26)과 같고, 중언부언하는 의미 없는 기도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