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회복하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의 시작은 항상 성령 충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수 없이 듣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상태가 이루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외로 많다고 봅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체험을 할 때 성령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으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황홀한 분위기에 휘말려 날마다 즐거움의 연속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속된 감격으로 인해서 날마다 눈물을 흘리는 감격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세상이 아름답고,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해도 전혀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은 황홀함으로 인해서 딴 세상을 사는 것 같습니다. 환경적으로는 바뀐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모든 것이 사랑스럽습니다. 이것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고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을 것 같은 황홀경에 휘말려 사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달콤한 신혼과 같은 이런 분위기는 서서히 사라지면서 현실로 되돌아오며 그 황홀했던 경험은 기억 속에서 점차 아련해져가게 됩니다.
간혹 주변에서 방금 거듭남을 경험하여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새내기 신자를 만나게 되면 한 편으로는 그 때가 그리워지고 한 편으로는 당신도 그 꿈이 깨고 나면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될 거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놓기로 작정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는 초보자들을 바라보면서 절제하라고 선배로서 충고도 보탭니다. 이런 황홀했던 경험들이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현실이 정답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의 황홀함을 사모하지만 결코 유년으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그런 경험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한 집회에 참석해서 간혹 황홀한 성령충만을 경험하지만 결코 거듭날 때 경험했던 그런 극적인 경험은 아닙니다. 어딘가 모르게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남의 경험은 일생에 단 한 번 거치는 독특한 영적 경험일 것입니다. 거듭남의 경험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후에 간헐적으로 또는 수시로 겪게 되는 영적 경험들은 그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매일이 같은 것 같지만 결코 같을 수 없듯이 우리의 영적 경험들 역시 비슷하기는 하지만 결코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경험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경험 속에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만나고 경험하는 것들은 날마다 새로운 것입니다. 그 차이로 인해서 우리는 항상 새로운 기대를 하게 되지요.
성령충만은 우리가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가장 절대적인 요인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결코 진정한 영적 세계로 들어갈 수 없으며, 주님과의 친밀함을 맛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감정이 고무되는 것과 성령충만해지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자극을 받게 되면 감정이 고조됩니다. 즐거운 일이 생긴다든가, 바라지 않던 것을 얻게 되면 감정이 고무되지요. 세상에서 오는 즐거운 일들로 인해서 우리는 흥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외적 자극에 의해서 형성되는 심리적 흥분과 성령충만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을 구분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을 이루고 보다 깊은 영적 교제와 경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성령충만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교회에서 많이 배웠을 것입니다. 주로 들었던 내용들을 되짚어보면, 기도에 전념하는 일,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 성령충만한 집회에 참석하는 일, 경건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무리의 법칙이라고 부름), 성령충만한 사역자로부터 안수를 받는 일, 세속적인 일에서 떠나 일정기간동안 경건에 몰두하는 일, 금식이나 작정기도와 같은 구별된 행위를 하는 일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별한 행위를 통해서 성령충만을 받는 계기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령충만은 무작위로 주어지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앞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우선적인 행동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충만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내면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주님과의 관계를 살펴 그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외적 장애들을 제거하는 일을 해야 하지요. 그 대표적이 것이 죄의 회개이며, 그 다음이 악한 영을 추방하는 일입니다.
죄의 회개와 축사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특히 그릇된 영적 유대(sole-tie)를 끊고 관계를 새롭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악한 영의 세계에 접촉했던 일들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는 일이 중요한데 이 인식과정이 또한 쉽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의 인식은 우리의 의식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며, 죄의 인식이 일어나기까지의 인내하고 기다리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성령께서 죄를 생각나게 해 주시는 과정에서 영적 변화가 일어나며, 이것을 계기로 성령충만을 받게 되지요. 우리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성령을 경험하게 되며,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독특한 영적 접촉을 세밀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서 작용을 시작할 무렵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분위기가 변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을 영적 자각이라고 부르는데, 이 분위기의 변화에 관한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이후에 주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일뿐만 아니라 영적 능력들을 행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주체와의 만남의 신호를 알아차리는 일은 예민한 감각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근심과 걱정거리와 같은 내면의 스트레스가 있다든가 상처나 증오와 같은 처리되지 않은 쓴뿌리가 있을 경우에는 느낌에 장애를 받을 수 있으며, 감정이 격하다든가 심리상태가 안정이 되지 않은 경우 역시 장애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 나오는 사람은 먼저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한 후에 나오라는 말씀의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감정 상태를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정결의 예”라고 부르는데, 성령충만을 구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의 심리상태와 정서적 안정을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안정된 상태를 갖추기 위해서 찬양이 매우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우선 찬양을 통해서 자신의 정서적 안정을 찾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찬양 또는 신령한 노래로 심령을 안정시키고 외적 자극을 차단하는 일은 필수입니다. 그런 다음 살펴야 할 부분은 악령의 방해입니다. 영적 방해를 차단하는 일 역시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악령의 접근을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까닭은 영적 접촉에 따른 변화에 신경을 쓰고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가장 기초적인 경험이 소름이 끼치는 것으로부터 기분이 가라앉는 침체(deflation)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용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산뜻한 기분으로 기도를 시작하려고 작정하고 비교적 안정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기도할 기분이 생기지 않고 기분이 무거워지면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분주했던 낮의 일이 떠오르며 걱정꺼리가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 기도하고자 했던 마음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악한 영의 교묘한 방해를 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기도를 계속하게 되면 영적 감흥이 일어나지 않게 되며 지루하고 건조한 기도만 하게 됩니다. 이것을 계속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삭막함에 익숙해져 버리게 되며,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게 되면 결국 율법적인 기도 즉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빠져들게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사로잡힌 상태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싶고 주님도 그러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장애를 만나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첫 단추가 어긋나면 모든 단추가 어긋나듯이 우리의 영적 발전의 첫 관문에서 무언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이후에 모든 과정에서 항상 어긋나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충만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원초적 경험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한 가지를 제공하면 그 다음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키워나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숙으로 나가는 기본 원리인데, 그 첫 경험에서 얻어야 하는 열쇄를 얻지 못한다면 그 이후의 진보에 장애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는 주님이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주문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계 2:4~5).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거듭남의 경험을 기억하고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회개하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그 느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경험은 원석과 같아서 이후에 우리가 영의 임재를 발견하고 응답해야 하는 신호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