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때와 현대 교회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 때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존경심이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왜 자기 목숨까지 불사하는 초대교회의 뜨거운 신앙이 없을까? 초대교회 때의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의 DNA가 달라서일까요? 아니면 태어난 시대가 달라서입니까? 아닙니다...초대교회 때는 회개를 많이 했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회개가 거의 사라졌고, 거듭난 신자들도 거의 없다는 것 그 차이만 존재합니다.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시대적 환경만 다를 뿐, 그때 사람들의 DNA가 지금 우리에게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즉, 주님께서 창조한 모두 같은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그 시대 초대교회 사람들은 믿음이 좋도록 DNA가 특별히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지금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은 현재와 비교했을 때 너무 차이가 납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믿음에 대하여 인식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시대는 예수님께서 직접 성육신하여 활동하시다가 부활 후 승천하셨으므로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확인한 이들이 많았기에 현실적으로 느낀 그들과 이천 년이 흐른 지금 성경을 통하여 느끼는 우리들의 인식 차이는 좀 있습니다. 하여, 긴가민가 하면서 믿노라 하는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초대교회 때의 신앙인들의 거룩한 믿음 생활이 평화의 시대를 사는 지금의 우리 생각으로 쉽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있는 그대로를 주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주님의 말씀이고, 현실이고,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인간 편의에 의하여 만들어진 수많은 교리의 난립으로 인하여 주님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성경을 이론화 시켰기에 믿음의 본질을 많이 왜곡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의 믿음의 본질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거듭남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고, 점점 교회가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악한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대별로 나뉘어 주님의 역사도 다르다면서 이미 이천 년 전에 은사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는 교리... 이것은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 시대의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같은 하나님입니다. 역사하는 방법도 똑같습니다. 시대가 다르다고 시대에 맞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때의 영성이 거룩하고 귀하다면 우리도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그대로 따라가는 게 옳은 믿음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때의 영성은 그시대에 맞는 영성이고, 우리는 또 이 시대의 영성에 맞게 구별되는 게 전혀 아닙니다. 그건 사람의 생각과 이론에서 나온 기준일 뿐, 주님은 똑같은 기준으로 역사하십니다. 이천 년 전 그 시대 사람들이 접한 성경을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우리는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나 지금 시대나 믿음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회개하여 성령으로 거듭나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믿음의 거룩한 모습으로 살다가 호흡이 멈춘 후, 그토록 사랑하던 주님과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초대교회 시절처럼 자기를 부인하며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대로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관념적인 차원의 십자가가 아니라, 내 마음 판에 분명히 새기고 실상의 삶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 사람들의 영성을 바라보면서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만 인식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들의 영성이, 우리의 현실적 영성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영적 삶은 과거 완료형이 절대 아닙니다. 이는 현재 진행이며, 천국에 가서야 완료되는 역사입니다. 우리가 진정 거듭나 옛사람을 벗었다면 그 당시의 희열과 기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거듭난 새사람으로서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은 계속 성령으로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라디아서 5장 25절) 이것이 진정 내가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기에 그 모습 그대로 나오는 실상적인 모습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런데... 현재 많은 교회들이 아무 부담 없이 단지 입으로 주님을 시인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미 구원받은 것이고, 보혈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처럼 가르치고 배웁니다. 십자가를 과거의 추억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고 깔아주셨으니 우리는 그저, 누리는 데만 집중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내가 죄를 지어도 십자가 보혈 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도말 되었다고 하면서 아무 부담 없이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 하고, 또 자유함이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은혜이고 거짓 자유함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겠습니까... 그것은 실제 성령님의 온전한 인도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고,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 회개한 적도 성령으로 거듭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성령의 법, 사랑의 법)으로 살수밖에 없기에 결코, 죄를 은혜로 덮으며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늘 십자가를 품고,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서 회개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실상의 삶에서도 성령의 거룩하신 인도대로 살게 되며 또한, 성령으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자의 필연적인 열매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도됨을 생각할 때 흔히 어떤 기적이나 남들에게 없는 징조나 표적이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절대 그리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의 성령님은 그런 것보다 우리를 매일 매일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것에 관심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의 사람은 한시라도 십자가와 떨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순간 죄 된 육의 모습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모습이 십자가에 죽었다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들고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닌, 내 안의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기에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아닌 그리스도로 사는 거룩한 자가 됩니다. 그런 모습이 또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십자가에 죽고 온전히 거듭난 자라면, 주님께서 날마다 나를 십자가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십자가에 죽는 것은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은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 31절) 십자가의 삶은... 날마다 죽는 삶입니다. 당연히 현실적 진행형이며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마귀도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계속 십자가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과 은혜와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나를 부인하고 죄로부터 돌이켜 성령으로 거듭나면 당연히 초대교회의 영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거듭남과 거듭나지 않은 것 그 차이만 존재할 뿐입니다. 반드시 거듭나 그들과 같이 되어야만 합니다. 어서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들어가길 구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