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기 어려운 성령의 역사를 볼 때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집회에서 우리는 자주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들을 목격합니다. 홍 준표 목사의 집회 동영상에서 보듯이 그런 현상들은 일반적인 집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예외적인 현상들인데 캐나다의 공항교회의 아? 목사가 이끄는 집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 특히 ‘거룩한 웃음’이라는 설명을 하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나오면서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은 일반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제가 이미 게시판 글에서 ‘열광주의’라는 제목으로 다룬 내용이며, 일반적인 예배와 구분해서 어떤 영적 특권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오인했던 고린도 교회의 일부 엘리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우월주의에 대해서도 다루었습니다.
누가는 초대 교회의 열광주의를 소개하면서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본질로 보았지만, 바울은 이런 일들은 반드시 분별이 필요하며, 공예배에서 나타난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영적 성향이 다르고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에 누가와 같은 경우 이런 열광주의적인 현상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이었고 따라서 무제한적으로 수용한 반면에 바울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신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누가의 눈에는 고린도 교회는 아주 다이나믹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으로 비추어진 반면에 바울의 눈에는 위험도가 높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열광주의를 설명하면서 이미 소개한 것처럼 누가는 영적인 일에 매우 관심이 많았고 그런 현상들을 ‘큰’ 또는 ‘희한한’이라는 서술적 수식을 덧붙임으로써 긍정적으로 소개합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누가는 복음의 확장에는 기사와 이적이라는 놀라운 역사가 그 바탕에 있음을 증거하려고 노력했으며, 교리적인 면 보다는 이적에 더 관심을 많이 두었습니다. 누가가 목격한 수많은 이적들은 기독교 선교에서 뿐만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구원의 현장에는 빠짐없이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음을 증명합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일들은 우리가 동영상에서 보듯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우리의 상식을 초월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며, 성령께서 인격을 넘어서 오히려 비인격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나타나게 하심에 따라서 여러 가지 오해를 하게 됩니다. 제가 이미 게시판에서 “성령은 인격이라기보다는 형상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했는데, 우리가 성령의 나타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격이신 하나님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인격이라고 말할 때 자주 우리의 인격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 수준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만들어내는 말이 “하나님은 인격이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 속에 포함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속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인격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며, 하나님의 인격(persona)를 제대로 이해하여 우리의 생각을 그 인격에 맞출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인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상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나타나는 영적 증거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는 열광주의 기독교에 대해서 매우 개방적이었으며, 이 사실을 데오빌로 로마 총독에게 이해시키려고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이방신을 섬기고 로마의 정치 관료이며, 군인인 그에게 누가가 복음의 핵심을 설명하는 재료로 선택한 것이 ‘열광주의 기독교’입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군인이며 정치가인 데오빌로 총독에게 이성적이며, 지성인인 의사 누가가 선택한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열광주의에 대해서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는 다수의 근본주의에 젖어 있는 분들은 성령의 역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여기지요. 그러나 그들이 의아해하는 열광주의도 복음의 핵심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광주의는 다양한 영적 현상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수준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을 통해서 주 예수의 복음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누가의 복음서 이해와 사도들의 행전을 따라잡은 그의 태도는 영적 황홀경을 이교적인 것으로 보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날까지 꾸준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을 왜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은 이성과 과학과 합리가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지며, 기사와 이적과 같은 황홀경은 신비주의로 취급되는 것이 일반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현상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까닭은 우리의 고정 관념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세인들을 책망한 바로 그 유전과 전통인데, 이스라엘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다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 없기 위해서 뼈를 깎는 아픔으로 이루어낸 회개 운동(하시딤 운동)의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은 이 가르침의 순수함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신앙의 전통을 지켜서 조상들이 만들어낸 경건의 산물인 제도와 교리를 지키고 유지하는 일이 무척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칼빈, 웨슬레 등과 같은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이 만들어낸 훌륭한 지침들을 우리가 계속 유지하여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소중한 일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도에서 만들어진 교리와 제도는 그 자체로서는 비난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유전이 되어 우리를 옥죄는 어리석은 초등 학문이 된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칼빈과 웨슬레의 정신은 사라지고 아무런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습관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고정관념에 휘말려 의미도 모르는 채로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심각한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아무런 반성 없이 그냥 해 옵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면 좌측통행이 그렇습니다. 일정시대 때 일본인들이 좌측통행을 실시했습니다. 그 당시까지 조선은 통행에 대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영국의 보행규칙을 따라 모든 것이 좌측으로 통행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사람은 물론 우마차와 자동차 등 모든 것이 좌측입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미국인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우측으로 통행하도록 규정한 우측통행 국가입니다. 일본이 물러가고 미국이 들어오면서 자동차가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우측을 통행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좌측으로 그냥 두고 자동차는 미국식으로 우측을 통행하도록 정했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 된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된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왜 그렇게 구분해서 통행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모순을 그대로 두고 지냅니다. 이것이 무지한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보행뿐만 아니라 많은 영역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생각이 고이면 부패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부패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기사와 이적이라는 새로운 일을 통해서 자극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어디서 어긋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할 목적으로 우리의 상식에 벗어나는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같이 충격이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었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철저한 율법의 반동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으며, 다른 판단을 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행동을 계속하는 예수였습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 가자들보다 더 열광주의에 치중했으며, 그의 눈에는 오로지 기사와 이적만이 들어왔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정통이라는 시각에서는 벗어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이런 증거들을 우리는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내는 작용으로 이해함은 물론이거니와 복음의 핵심으로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영적 우월주의자들과 누가는 분명히 다른 길을 갔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열광주의와 신비주의의 눈으로 그것을 기록한 누가의 서술을 교회가 성경으로 채택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며, 그러도록 누가의 시선을 기사와 이적에 고정시킨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하나님은 바울이라는 합리적 영성을 지닌 독특한 인격을 준비시켜 고린도 우월주의의 위험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성의 샘터 1, 2번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자빠지고 뒹굴고 달려가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런 집회를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굳어버린 고정 관념을 발견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다양성과 하나님의 이중성과 성자의 포괄성을 우리는 이런 기회를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를 향해서 들어내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를 이깁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현상들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 관원이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알았다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우리가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훨씬 자유로울 것이며, 분파와 교단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거대한 종교의 틀은 우리의 고집 때문입니다. 어리석으면서도 어리석은 줄 몰랐던 바리세인들처럼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고집 때문에 풍요한 영적 삶을 살지 못하고 억눌리고 무거운 부담 속에서 눈치를 보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지금도 희한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