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듣기
요즈음 하나님의 음성듣기에 대한 세미나와 컨퍼런스가 자주 열려 이 주제가 우리들에게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반면에 걱정하는 소리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이것에서 오는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에 우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완벽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일이므로 반드시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지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를 함께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는 분들이 있어야 우리는 경계를 삼게 되고 조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면을 너무 강조하면 우리는 두려움에 싸여 그것 자체를 부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양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면만 부각시키면 위험합니다. 두 가지 면을 다 제대로 알고 부정적인 요인들을 억제하고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한 쪽에만 치우치면 오해가 생겨 하나님이 주신 귀한 기능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주로 문제 삼는 부분이 대체로 이런 것들입니다.
1)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나 들어야 하는가? 모든 일에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한계의 문제가 있습니다.
2)하나님의 음성듣기에만 의존하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필요 없는 것이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3)하나님의 음성듣기는 우리의 행동을 위축시키고 음성듣기에 매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4)하나님의 음성듣기는 주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훈련해서 얻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입니다.
5)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해서 신앙생활에 어떤 지장을 받는 것이 아니므로 굳이 들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6)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오히려 교만해지고 말씀에 바탕을 둔 신앙에서 벗어날 위험이 많지 않은가 하는 문제 등입니다.
이 밖에도 많은 우려가 있지만 대체로 위에 열거한 것들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의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변호가 아니라 사실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 문제는 음성듣기의 범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본받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정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모두에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이르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육으로 계시는 마지막 순간에 드린 기도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우리의 뜻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과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권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것은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의 뜻에 따라서 행동했다고 해서 누가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하시고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길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대는 허무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음성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들리고 그 듣는 길이 열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오로지 아버지의 뜻만을 따랐던 것처럼 모든 일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는 매우 다양하고 기술적으로도 복잡합니다. 성경공부로부터 시작해서 꿈과 환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이런 다양한 기능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의 다양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맞는 몇 가지 기능을 발견하고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고 깨는 것까지 모든 일에서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살핀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존재를 드려 주님을 섬기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요. 이처럼 우리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그 소망을 보다 더 많이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삶 전체에서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처럼 100%가 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둘째 문제는 자유의지와 연관된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기 이전에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우리가 삶을 통해서 서서히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며, 점차로 영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필수적으로 육체의 이끄는 대로 살아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성령의 지시하심을 직관으로 느끼는 기능이 부족한 상태에 있을 때 절대로 필요한 기능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즉 영적 기능이 아직 온전하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자유의지를 주관하여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음성듣기에 익숙해질수록 제한 받게 되며.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는 일 등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합니다. 이런 일들을 하나님에게 여쭈어보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자기의 뜻으로 하지 않고 여쭈어보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혼 부부는 서로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아내가 남편에게 일일이 무슨 옷을 입을까를 물어봅니다. 이런 부부를 보면 나이든 분들은 “한 때 그렇게 하지”하면서 넘기고, 미혼들은 “닭살 커플”이라면서 놀립니다. 이들 부부가 이렇게 입는 옷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사랑 때문이지요. 상대방에게 이쁘게 보여주고 싶고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주 사소한 것조차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혼부부처럼 사랑한다면 모든 것에 대해서 여쭈어보고 싶고 그 반응을 듣고 싶어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싶고 그 분을 즐겁게 해 드리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감정이 시들어지면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신선함이 사라진 것이지요. 그만큼 무디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가면 갈수록 줄어들고 주님과의 친밀함으로 이루어진 순종이 더욱 깊이 우리를 사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문제는 우리가 음성듣기에 매이게 된다는 우려입니다. 음성을 듣지 못하면 안절부절하고 아무런 행동도 못하는 그런 상태를 염려하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속박되어서는 안됩니다. 깊이 들어가는 것과 메이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은혜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매이는 것은 두려움과 강박감을 일으킵니다. 음성을 듣지 못하면 초조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마귀에게 속박 당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하고 초조해 하는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즐거움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듣기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수단이 본질을 대체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음성듣기와 마귀의 올무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넷째는 훈련의 문제입니다. 이 부분이 우리들이 혼동하는 중대한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것은 무조건 은혜라는 일방적인 그릇된 고정 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은사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저의 글에서 누누히 강조하는 부분인데 하나님은 기본적인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야말로 공짜로 줍니다. 우리의 몸도 공짜로 얻었지요. 그런데 우리 몸이 그냥 자랍니까? 시작은 공짜로 출발했지만 그 다음부터 우리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서 지금 우리 몸이 된 것입니다. 우리 말은 공짜로 얻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지성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은 우리의 노력입니다. 학교에서 국어를 배우고 품위 있는 말을 배우고 익히며, 어휘를 늘리는 노력을 한 결과 지금과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이지요.
재능이라는 말을 영어로는 talent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성경의 달란트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은사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 재능은 천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재능만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지요. 천부적인 재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오르기까지 쏟은 피나는 노력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그 유명한 말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을 우리는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걷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정숙한 걸음걸이가 있고 조폭의 걸음걸이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기본적인 것은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 받은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부분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에 거친 사역자가 생기고 문제를 일으키는 어설픈 사역자가 나와서 교회에 문제를 많이 만들어냈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기본적인 것으로는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런 부분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았으면 훈련을 통해서 그 기능을 효율적으로 그리스도 공동체에 유익이 되도록 증대시키고 다듬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유능한 지도자를 통해서 교정되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도 들려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동역자는 운전하는 가운데 갑자기 “서라”라는 음성이 들여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골목에서 갑자기 대형 덤프트럭이 일단정지도 하지 않고 대로로 내달려 나왔습니다. 이때 서지 않았다면 그는 대형 사고를 당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처럼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들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예외입니다. 예외적인 일을 가지고 통상적인 수준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깊은 오류에 빠집니다.
다섯째는 음성듣기의 필요성의 문제입니다.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해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지장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가 없어도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함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은 사실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컴퓨터를 모르는 세대는 컴이 없어도 사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이것이 없으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육적으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데 별로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삶은 지옥과 같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육의 일을 하며, 영에 속한 사람들은 영의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도 어린 아이이며,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만들어놓은 수준의 봉사와 충성으로 신앙생활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을 하기 위해서는 주의 음성듣기가 필수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에게만 원하는 헌신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섯째로 음성듣기와 성숙의 문제입니다. 모든 과정에는 반드시 성숙해야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동네에서 축구를 하려고 하면 아무런 기술도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선수가 되려면 지켜야 하는 규칙도 배워야 하고 남다른 기술도 익혀야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아마추어와 전문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지만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영적인 일에도 아마추어가 있고 전문가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전문가가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아마추어 수준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골프 선수 박세리는 골프를 배우기 위해서 하루에 천번이 넘는 타격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추어 골프 애호가들은 치고 싶지 않으면 그만 두지만 선수는 그런 것을 초월합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정상을 차지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의 군대입니다. 정상을 향해서 달려가는 프로 선수와 같습니다. 아마추어처럼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기도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명예만 차지하려고 하고 그에 따르는 노력이나 수고는 전혀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는 게으르고 악한 종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갈 곳은 별도로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자신을 변명하면서 피하지만 언젠가는 전혀 피하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선수가 시합에 나갈 때는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출전하지요. 영적인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을 받았다고 해서 그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훈련을 통해서 익숙해지고 그 기능의 장단점이나 위혐요소들을 제대로 알고 난 후에 조심스럽게 실전에 나서야 합니다.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게 됩니다(히 5:14, 단 12:10, 벧전 1:17). 연단이란 교육을 의미합니다. 받기 싫은 교육이지만 피할 길이 없어서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훌륭한 스승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경험한 덕망있는 지도자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도 어려운 부분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주변에 어설픈 사람들만 있으면 우리는 도전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약하고 게으른 상태로 지냅니다. 모두 그런 수준이니까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목회자마저도 영적으로 수준이 낮다면 더욱 자극을 받지 못합니다. 강한 지도자 아래서 강한 제자가 나오는 법입니다. 히딩크 때문에 우리는 사강이라는 놀라운 일을 이루었지 않습니까? 도전 받고 자극 받지 못하면 우리는 한 없이 게을러지고 나약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강력한 지도자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주저 앉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는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어려운 공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우리는 쉽게 얻을 수 없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