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하여 무어라고 대답해야 하나?
A. 자력종교의 기도와 타력종교의 기도
기도는 자력수도에 초점을 맞추느냐 아니면 타력수도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그 방법이 달라진다.
자력수도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죄성에서 비롯되는 세속적 욕구 일체를 떨쳐버려야 하기 때문에 초인적인 노력과 정신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육체적인 욕구의 표본인 식욕 성욕 졸림 등을 이겨내기 위하여 금식, 금욕, 철야 등 육체의요구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런 시도는 세속의 삶을 사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며, 하루의 일과는 특별한 수도로 채워야 한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이런 자력수도의 종교에서는 여러 가지 특별한 기도법이 개발되었다.
요가나 좌선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도에서는 좌선과 같은 어떤 특별한 자세, 단전호흡법과 같은 호흡을 이용하는 방법 등이 개발되었고, 심오한 심신수련과 명상을 통하여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추구한다.
인간의 타고난 심성(心性)속에 불성(佛性) 또는 신성(神性)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성찰과 정신집중의 여러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신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한 정신집중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삶 속에서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관계 맺기 및 관계회복을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기도법을 강조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향한 정신 집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가 기도이기 때문이다.
대화에는 어떤 특별한 자세, 호흡법 등이 요구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하여 은둔과 금욕, 고행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끊어내기 위한 시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육체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리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기도다. 무념무상을 추구하는 어떤 정신집중의 훈련과 기독교의 기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근래에 요가나 참선의 수련법과 정신집중 방법들을 비롯하여 심리학적인 방법들을 기독교의 기도수련에 사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기독교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혼란이다.
B. 깊은 기도로 가는 길
1) 충실한 삶
기도가 깊어지려면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삶이어야 한다.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서 기도가 깊어진다는 것은 기독교의 기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흐트러진 삶은 기도시간에 철저하게 회개해야 할 대상이다.
기도가 깊어지기 위한 무슨 비상한 방법을 추구해야할 것이 아니라 매순간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깊은 기도로 들어 가는 지름길이다. 삶을 배제하는 기도수련은 기독교의 기도수련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심신수련이나 명상수련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기도시간에 잡념에 시달리는 가장 큰 이유는 하루를 무덤덤하게 별 의미없이 무료(無聊)하게 보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기도시간에는 온갖 생각들이 몰려오며 기도하기 위하여 앉아있는 그 자체가 힘들어진다.
잡념에서 벗어나려면 무미건조한 일과를 바꾸어야 한다. 하루의 삶과 그날의 기도는 직결되어 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없이 깊은 기도를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불가능하다.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 만큼 기도가 깊어진다.
2) 성찰과 회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충실한 삶을 살면 기도시간에 하루의 삶이 ‘성찰’과 ‘회개’로 이루어진다.
하루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깊이 성찰되어져야 한다.
이 성찰은 대부분 회개로 이어진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느껴지고 찔려져서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져야 한다. 이런 성찰의 기도가 깊어지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휴지조각 하나를 소홀히 한 것 등을 비롯하여 어리석고 , 헛된 생각과 마음에 시간을 빼앗긴 것 등 지극히 사소한 문제들도 크게 와 닿는다.
성찰은 곧 회개라고 할 수있다. 이런 성찰의 기도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진다.
인격의 변화는 먼저 기도에서 변화되어져야 한다. 기도가 변해지고 깊어진 만큼 그 인격과 행위가 변화되어진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고칠 수 없는 악습들을 기도시간에 철저히 회개하고 뉘우치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마음과 힘을 주셔서 그것을 극복하게 하신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죄성의 정화가 진행된다. 기독교에서의 정화는 성찰과 회개,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일어난다. 자력종교에서 추구하는 것과 같은 초탈로 정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죄성이 정화된 만큼 기도가 깊어지며 죄성의 정화와 기도의 깊이는 비례한다. 죄성의 정화없이 기도는 깊어지지 않는다.
이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뒤의 “비움의 길, 어떻게 진행되는가”에서 다루게 된다.
3) 말씀 묵상
죄성의 정화와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성경읽기와 묵상이다.
정화와 기도가 깊어진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 만큼 기록된 성경의 말씀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초기에는 성경의 말씀들이 은혜롭게 느껴지다가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내가 성경에 기록된 그 현장에 참여하는 것처럼 되어진다. 예언자나 사도들처럼 그 현장에서 내가 직접 말씀을 듣고 또 선포하는 자처럼 성경이 경험되어진다.
기도시간에도 그날 읽은말씀들이 깊이 다가오고 묵상이 되며 그 말씀에 사로잡혀진다.
부록에 실은3년의 기도 기간 중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특히 복음서에 대한 깊은 묵상과 체험이 이 기간동안 있었다. 예수님을 곁에서 따르는 것처럼 예수님의 활동과 말씀들이 직접 경험되었다.
3년동안 복음서의 말씀 속에서 살았다. 이런 경험이 복음서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에서도 비슷했다. 이런 과정을 겪고 난 후 성경과 그 역사에 대한 이해의 지평선이 전혀 다르게 와 닿았다.
「하비루의 길과 죄인의 길은 이렇게 해서 정리되었다.
앞에서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수도원 운동이 희랍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은둔수도로 나아간 것은 시행착오였다. 은둔수도를 받아들인 수도사들은 은둔자들이 시도하는 수련법들을 수용했고, 잡념을 몰아내기 위한 여러 가지 정신집중훈련들이 개발되었다. 이 역시 순수한 기독교의 기도의 방법이 아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은둔수도에서 추구하는 이상의 깊은 기도에 도달하게 된다.
기독교의 기도는 자력종교에서 추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깊은 상태에 도달한다.
필요에 따라 일정기간 동안 철야나 금식 또는 집중적인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것 들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과 마치는 시간을 기도와 성경말씀 묵상 등으로 보내며 하루의 일과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내는 것이다.
뒤에서 다루는 기도의 과정을 겪는 동안 단 한번의 금식, 철야, 금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아침저녁의 평범한 기도생활과 하루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