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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믿기만 하면 구원이란 말은 마귀의 듣기 좋은 자장가다'2024-11-16 23:37
작성자 Level 10

'믿기만 하면 구원이란 말은 마귀의 듣기 좋은 자장가다'

쉽지 않은 구원 신앙

구원 신앙을 갖기가 어렵다는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곳에서, 심지어 정통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조차 구원이 매우 쉽고 간단한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면 그것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물질 또는 아내나 남편을 의지하듯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의 대상을 의지하는 것 외에 죄인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논리입니다.

오늘날 이런 구원관이 만연한 탓에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뭔가 특이하거나 잘못된 믿음을 가졌다는 오해를 받기가 십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의 이러한 쉬운 구원관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마귀의 거짓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신뢰하는 데에는 자연 신앙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려면 초자연 신앙이 필요합니다.

본질을 놓친 복음 전도

오늘날 목회자들이나 복음 전도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관찰해보면 성령께서 그들의 생각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은혜라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성령님의 사역을 경시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타락한 세대에서는 구원 신앙이 은혜의 기적으로 말미암는다는 가르침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고 대신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만연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언제든 구원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죄인에게 인간의 타락과 믿음에 대한 말씀 몇 구절을 인용한 뒤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권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의식하는 사람조차 아주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수많은 심령을 거짓 평안으로 잠재우는 마귀의 자장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한낱 피상적인 논리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분을 대적한 죄를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복음을 전합니다. 우선 전도 대상자를 신속하게 설득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할 요량으로 신약 성경을 꺼내들고 그에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는 말씀을 읽어줍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이 그 말에 동의하면 이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말씀을 읽어줍니다. 그리고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누가 포함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물음은 상대방이 “당신과 나, 그리고 모든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으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만일 “네, 믿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즉시 그에게 구원받았다는 확언을 들려줍니다.

여러분도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단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고전 2:4), 곧 “사람의 지혜”(5절)로 이루어진 거짓 신앙에 불과합니다.

죄인의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이 손을 씻는 것처럼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룩한 진리의 빛이 인간의 심령을 비춰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일이 마치 커튼을 걷기만 하면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큼 쉽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은 우상과 세상과 죄를 버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돌아와 거룩하게 사는 것이 키를 조종하여 배를 올바른 항로로 움직이는 것만큼 쉽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마귀를 물리치고 매일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며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을 유지하고 믿음과 순종과 인내와 충실을 실천하고 올바르고도 친절하고 자비롭게 살아가는 것,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에 내재된 힘만으로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매우 간단해 보이는 이유는 이 세대가 구원 신앙의 참된 본질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 신앙의 속성에 관한 성경의 증언을 옳게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어 거짓 구원 신앙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시대의 통속적인 ‘복음’을 이토록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데 있습니다. 구원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자신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시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구원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이 법적 차원뿐 아니라 경험의 차원까지 지니며 칭의는 물론 중생과 성화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러한 구원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옥에서뿐 아니라 죄와 자기 고집과 자기 만족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이야기에 선뜻 구원을 원할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좁은 구원의 문

예수님은 구원 신앙이 쉽고 단순하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구원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시기는커녕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는 말씀대로 그 길을 걸으려면 온 힘을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젊은 관원이 슬퍼하며 돌아가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4-25)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신학교는 목회자나 전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가 이루신 속죄 사역을 믿기만 하면’ 백만장자이든 빈털터리이든 누구나 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칠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먹여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는 말씀대로 이 세상 부귀와 명예와 행복과 형통과 성공에 젖은 이들은 대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막 10:26)라며 궁금해 했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이나 전도자들이 제자들의 말을 들었다면 즉시 그들의 두려움을 달래주며 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확신을 심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분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죄인이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 신앙으로 그분 앞에 나오는 일은 오직 창조의 능력을 지닌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라는 말씀은 인간의 의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의 기적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이 구원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젊은 관원을 살펴보면 곧 그 대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재물이 많은 고로”(마 10:22)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소유에 집착했습니다. 많은 재산이 그의 우상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세상 것에 단단히 묶여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요구는 너무 가혹했고 혈과 육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젊은 관원에게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세상의 찌꺼기가 가득 차 있으면 하늘의 빛이 임할 여지가 없습니다. 세상의 부에 만족하는 사람은 영혼의 부를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큰 잔치의 비유’도 이와 동일한 진리를 전합니다. 은혜의 잔치가 배설되었고 복음을 통해 모두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눅 14:18) 여러 가지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땅이나 소, 안락한 가정생활 등 다른 일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8-20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더 사랑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26-27절), 모든 우상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테두리 안에서 그분을 영접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망대(방금 말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상징하는 표현)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 14:28)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도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라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영광”은 인정이나 칭찬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인기와 칭찬을 중시하고 하나님의 인정은 도외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약 4:4)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와 참 마음으로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칭찬을 멀리하고, 멸시와 배척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주권에 복종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 6: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영생을 얻는 것이 단순한 문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영생을 얻기 위해 다른 관심사를 모두 포기하고 열심히 노력을 기울여 온갖 힘겨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것일까요? 대답은 “아니요”와 “예” 둘 다입니다. 먼저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답은 “아니요”입니다. 영생은 값없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전심으로 구원을 추구하고 부지런히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예”입니다. 순종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사람에게 약속이 성취된 사례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구원 신앙을 갖기 어려운 이유들

이번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씀은 언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인간의 의지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거짓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육신을 기쁘게 하고 피조물을 영화롭게 하는 생각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의 종으로(요 8:34) 여러 가지 정욕을 좇고(딛 3:5) 또한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혀 있기(딤후 2:26)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 나올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죄의 사슬을 끊어 주셔야만 비로소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습니다.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는 사람이 과연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손발이 곪거나 독에 중독된 사람이 자기 의지로 그것을 치료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스인(흑인의 조상)이 피부색을 바꾸거나, 표범이 그 몸에 있는 무늬를 없앨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악에 익숙한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 4:18)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주석을 쓴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의인은 영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극복해야 할 고난과 어려움과 유혹도 많고 소멸해야 할 죄도 많다. 구원의 문은 너무 좁고 구원의 길은 협착하다. 의인은 구원받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처음에는 온갖 힘든 난관을 각오하라.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와 도움을 베풀어 주신다. 믿음의 경주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계 2:10).

존 릴리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구원의 길이 열렸다. 의인을 구원하는 사역이 완성되기까지는 극심한 어려움이 뒤따른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싸움과 두려움, 세상의 유혹과 박해, 육신의 무력함과 실패, 사탄의 불화살 등 많은 시련을 거쳐야 한다.”

구원 신앙이 어려운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은 본질상 구원 신앙의 진정한 속성에 무지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탄이 제시하는 그럴듯한 모조 구원 신앙에 쉽게 현혹됩니다. 심지어 성경을 통해 올바른 구원 신앙을 깨닫더라도, 제자의 조건을 듣고 슬퍼하며 등을 돌린 젊은 관원처럼 그리스도를 포기하거나 소유하지도 않은 구원신앙을 소유했다고 거짓을 고백합니다.

둘째, 자기애가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 자기 부정은 너무나도 힘든 요구입니다.

셋째,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넷째, 자연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는 성경의 요구를 반기지 않습니다.

다섯째, 인간의 혈과 육은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수치를 짊어지거나 의를 위해 고난 받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섯째, 애통하지 않는 마음의 소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춰 자기 고집을 뉘우치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일곱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딤전 6:12) 마귀를 물리치는 일(요일 2:13)은 일신의 안위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서는 구원받고자 하면서도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삶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분을 단지 구원자로 영접하고 안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자신의 길’을 버려야 합니다(사 55:7).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온갖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높인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오해하도록 만드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희생을 감당하신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속된 육신의 정욕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대속의 죽음을 믿고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삶과 행실이 불신자와 도덕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더라도 어디서나 참 신자로 버젓이 행세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이 들립니다. 마귀는 그런 속임수로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해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주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고 물으시면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배우는 것보다 배웠던 것을 고쳐 배우는 것을 더 힘들어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도 사탄의 달콤한 독주에 깊이 취한 탓에 자신이 구축한 체계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독주에 취해 자신의 총명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들은 내가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속죄 사역에 인간의 노력이 더해져야 함을 주장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마치 그리스도가 이루신 속죄 사역의 완전성을 공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는 그 무엇도 죄인에게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주지 못합니다. 저는 단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실 때가 언제인가?”를 물을 뿐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동안에는 그런 역사가 분명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에서 거룩한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어떤 목적을 위해 계획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분의 사역을 올바로 받아들이거나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주님은 세상에 여전히 마음을 두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곳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천국 가는 길을 열어주시고, 그 길을 걸으라고 부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친히 본을 보이시며 그리스도의 정신과 계명과 약속으로 그들의 영혼을 영광에 합당한 상태로 빚어 그들이 구원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이끄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또 그분이 세상에서 살다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승천하신 이유는 죽은 죄인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새 생명을 주시고,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천국 가기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새 생명을 얻은 죄인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세상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회개와 믿음, 성결한 삶,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복종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혹은 그런 것이 없어도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자기 자신에게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구원인가?”라고 정직하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존 번연은 「The Jerusalem Sinner Saved 구원받은 예루살렘의 죄인」(국내 미출간-편집자 주)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구원받기 원하는가? 철저한 구원을 원하는가? 죄책감은 물론 죄의 실제 영향력과 오염에서 구원받고 싶은가? 구세주의 종이 되기 원하는가? 옛 주인인 마귀와 죄와 세상을 섬기는 일에 지쳤는가? 그대의 영혼 안에서 진정한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가?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 생명을 얻고 싶은가? 그런 소원을 진심으로 갖고 있다면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또한 찰스 스펄전은 마태복음 9장 12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관한 설교를 들을 때, 그 구원이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구원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구원의 본질은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거룩하게 만드시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음을 뜻한다.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 가운데 살고 있는데 어떻게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면서 구조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동상에 걸린 사람이 혹독한 겨울바람에 얼어가면서 추위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즉 우리가 치명적인 질병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려고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질병에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그 손으로 우리를 만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그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원하면서도 거룩한 마음과 의로운 삶을 열망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을 무마시킬 정도의 신앙만 유지한 채 안일한 마음으로 세속의 삶을 고집하며 자기 만족을 채우기 위한 구원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동일합니다. 과거에는 돈 몇 푼만 기부하면 가톨릭 사제로부터 지난 죄를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애통하거나 회개하는 마음이 없어도 단지 의지로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지난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 영생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다는 거짓된 가르침이 새로운 면죄부가 되어 대중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외에 아무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합니다.

구원 신앙을 지닌 죄인은 갈급한 영혼으로 그리스도께 나와 생명수, 곧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받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악의와 이기심으로 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께서 제자 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분도 친히 그렇게 사심으로써 우리에게 따라야 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재의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그분의 거룩하고 고귀한 기준을 좇아 살겠다는 굳센 결심입니다. 또한 이는 자신의 전적 무능력을 의식하고 의를 간절히 갈망하면서 날마다 그분을 바라보며 필요한 은혜와 힘을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더 핑크, <아더 핑크의 구원 신앙>(생명의말씀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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