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구원론 vs 복음적인 구원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이 끝나고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믿음인지, 헛 믿음, 거짓 믿음, 사탄이 준 믿음인지를 강력하게 주장하겠습니다.
모쪼록 구원론에 대해 헷갈리시는 분들은 이 글을 보시고 온전히 두렵고 떨림으로 성령님과 함께 당신의 구원을 이뤄 가시기를 간곡히 당부해봅니다.
우선 구원론에 대해 제 글을 반박하는 분들이 주장하는 성경구절을 나열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요한일서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대략 이정도가 반론하시는 분들이 “입으로만 시인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하면서 제시한 성경구절입니다. 이분들은 이런 구절들과 몇몇의 구절을 더해 한 번에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특히 그 [한 번 구원 = 영원 구원]의 주장에는 칼빈의 예정설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일전 칼빈의 예정론 비판을 썼지만 기회가 되면 <칼빈의 예정론 비판 Ⅱ>도 다시 한 번 다뤄보겠습니다.
귀한 시간 거두절미하고요.
자! 그럼 왜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구원이 끝나는 것이 잘못된 가르침인지 정말 확실하게, 화끈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의 내용은 바울이 절대로 행함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글을 쓰기 전에 로마서 6장 17절에서 “본래 죄의 종이었던 우리들이 복음의 교훈을 마음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순복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행함으로 교훈의 도를 따르겠다는 결심입니다. 그것을 이룬 후 주어진 말씀이 바로 로마서 10장에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교훈한 것입니다”
바울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록한 서신들을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디모데전서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전서 4: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이 외에도 바울이 얼마나 많이 행함을 강조하는지 이루 셀 수가 없어 지면상 모두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바울이 로마서에서만 행함 없는 믿음을 강조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는 것 아시죠.
참고로 어떤 분이 킹제임스 성경에서 빌립보서를 언급하시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한글성경의 해석이 잘못됐다고 반론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가 킹제임스 영어를 읽어보니 빌립보서 2장 12절이 [Wherefore, my beloved, as ye have always obeyed, not as in my presence only,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써있더군요. 여기서 볼 것은 [work out]입니다.
의미는 이뤄가다. 해방되다. 산출하다, 진행하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글개역의 해석인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해석이 옳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한글판에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며 다소 애매하게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잘 묵상해보시면 아시겠지만 킹제임스 한글판에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는 말도 실은 구원을 이뤄가라는 뜻입니다.
왜냐면 보세요. [일하여]를 빼시고 연결해보세요. [구원을 드러내라]입니다. 여기서 [일하여]는 구원을 드러내는 것의 보조방법이지 주가 아닙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한글판에서의 빌립보서 2장 12절의 해석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가 옳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주장처럼 구원이 완성됐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이 땅에서는 완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너무나 명확하게 증명해주고, 알려주고 있는데 계속 오역된 해석과 비스무리한 해석으로 이 땅에서 구원이 완성됐다고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니 제가 마음이 너무나 답답합니다.
둘째 행함에 대한 그릇된 믿음
대개 사람들이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석했습니다.
행함과 율법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롯해 바울,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성령에 감동된 이들이 말한 행함은 율법이 아닙니다.
너무나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말씀하신 행함은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남으로 인해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열매를 행함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구약시대처럼 예수 없이 이렇게 행하고, 저렇게 행하고 하는 십자가 없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자력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서 3장 5절에 뭐라고 써놨는지 보십시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스스로의 노력이 아닌 인간 스스로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거듭난 사람들이 성령께서 그 사람들을 새롭게 해주는 능력으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반드시 중생한 사람은, 거듭난 사람은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수많은 성경기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행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해서 율법과 행함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결과 구원론이 행함 없이도 오직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코미디 중의 코미디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정확한 표현은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육체가 없다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즉, 성령에 의한 말씀 해석이 아니라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지식으로만 성경을 푸니까 이렇게 사탄에게 쓰임 받는 구원론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아시듯이 성도들을 우수수 지옥으로... 지옥으로...입니다.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목회자들이, 신학자들이 이런 썩어버린 거듭남의 열매 없는 구원론인 사탄의 구원론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옥으로 떨어져서 그 모진 고문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 책임을 어떻게 지려고 하는지요. 너무나 두렵고 떨립니다.... 그곳이 어떤 고문을 주는 곳인데...
세 번째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영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다 그러므로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요한일서 4장 2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선 이 내용을 풀기에 앞서 얼마나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비뚤어졌는지를 꼬집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요. 듣고 싶은 부분만 듣습니다. 아멘하고 싶은 부분만 아멘 하는 고질병이 있습니다. 복과 축복, 물질, 거부, 형통, 평안 등 이 땅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성경구절이 나오면 전후 문맥 따지지 않고 무조건 아멘하고 봅니다.
그것은 큰 병입니다. 성경의 어떤 구절도 그냥 단독적으로 턱하고 나오는 구절은 없습니다. 마치 사람의 몸의 모든 세포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성경도 앞에 나오는 구절은 반드시 뒤에 구절과 연결해야 옳게 해석됩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구절까지 연결해서 해석하면 자신이 원하는 해석이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성경은 절대로 이 땅을 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세상과 짝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사랑하는 거듭나지 않은 크리스천들은 의도적으로 마음에 드는 구절만 뽑아서 믿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합니다.
위의 구절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영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다] 는 한 구절만 뽑아서 “김 전도사 자 봐라! 시인하면 구원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냐?” 라며 주장하는 것도 위에서 꼬집은 고질병의 한 병폐입니다.
요한일서의 내용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보십시오.
1장 6절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
2장 3,4,5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를 아는 자요.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하는 자고 예수가 없는 자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 하는 자이므로 이로써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자임을 증명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6절에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반드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그도 하게 된다”고 까지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 자연적으로 나타날 행함의 열매들을 이야기하면서 2장 23절에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냥 무작정 아들을 시인하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아들을 시인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는 자 그가 바로 아들을 시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좀 더 부연하면요. 그의 계명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직접 경험하는 불쌍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3장 4절 볼까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니 죄는 불법이라”
예수님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한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책망하셨습니까.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라고 호통 치셨지요.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구원이 끝나버리고 완성된다면 왜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귀신까지 쫓아낸 사람에게 “불법을 행한 나쁜 놈아 너는 구원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불법을 행하는 중에 있는 것이고 그러면 아무리 귀신 아니라 귀신 할애비를쫓아내는 엄청난 능력의 종이라고 해도 구원 못 받는다는 단적인 말씀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퍼렇게 살아서.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무슨 복음을 들었기에 구원이 입으로 시인해버리면 끝난다고 알고 있는 겁니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이 끝났다고 알고 있는 분들은 그래서 회개도 거룩함의 열매에 대한 관심도 없는 분들은요. 십중팔구 지옥입니다. 100% 지옥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못 받습니다.
제가 100%, 1000%, 10000% 확신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입으로 시인했기 때문에 천국 갔다면 제가 저의 심장을 꺼내 그에게 주겠습니다.
제가 지옥에서, 가장 깊은 지옥에서 세세토록 불 속에서 고난에 고난을 갑절이라도 받겠습니다.
이 땅에서 회개하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로 죄를 씻은 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도 똑같습니다. 그 구절 하나만 달랑 떼어서 보면 해석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의 등을 만지고서는 “아 코끼리가 이렇게 생겼구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요한일서 5장 13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5장 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리라
요한일서 5장 2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일서 5장 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지금 읽은 구절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답이 있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만 풀어야 되는데요.
위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풀어주고 있습니다. 위의 요한일서에 드러난 대로 결론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는 열쇠는 그분의 계명의 준수여부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천국 가는 자고 그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입으로 아무리 믿는다고 믿는다고 해도 실상은 예수를 안 믿는 자! 라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이해하셨습니까. 믿음 = 행함입니다. 믿음이 행함이고 행함이 곧 믿음입니다. 처음부터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믿은 자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분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내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고 우리는 그분이 지시는 가벼운 짐을 바꿔서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십자가로 우리가 도저히 질 수 없는 무거운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시고 자유케하는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기에 그 분을 믿기만 하면 진심으로 그분을 믿으면 그분께서 우리가 육체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친히 주십니다. 그 힘으로 날마다 죄와 싸워 죄를 다스리며, 죄를 회개하며, 하루하루 영적 전쟁을 이겨나가는 삶. 그 삶을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입니다.
주께서 다시 올 때까지 그런 믿음의 삶의 경주를 끝까지 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래서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면류관을 받는 순간 우리의 구원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 구원은 그때 받는 것입니다. 저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서 그분이 당신의 머리에 인내의 면류관, 의에 면류관을 씌워주실 때 그때 END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한 번 구원받았기에 구원이 이미 이뤄졌다는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목사님들로부터 배운 것들은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사탄이 당신에게 준 사탄의 구원론입니다. 그 구원론을 믿고 안심하면서 회개도 없이 죄와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도 없이 그저 이 땅에서 복을 누리며 화평을 누리며 편하게 편하게 즐겁게만 살아가면 당신은 지옥행 0순위입니다.
이제 이 글을 보셨으면 이 글을 당신의 담임목회자에게 가져다주십시오. 그리고 제 글을 반박해달라고 하십시오. 무엇이 틀렸는지 조목조목 반박해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알려달라고 하십시오.
만약 당신의 담임 목회자께서 본인도 왜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인지를 성경적으로 모른 채 그동안 성도들에게 구원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회개하시라고 알려주십시오.
성경에는 더하거나 빼면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론은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보다도 이것은 더욱 성경 그대로 가르쳐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봐도 [한 번 구원 = 영원한 구원] 은 없습니다. [예수 믿음 =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 = 회개]입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의 보혈로 당신의 죄를 씻으십시오. 그리고 지금 즐기던 모든 죄를 이 시간 성령께서 주신 능력으로 끊어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지옥입니다. 100% 지옥입니다.
부디 이 글이 당신의 가슴을 때리기를 그래서 죽음에서 다시 사는 길로 돌이키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