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됩니다.
한국교회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이루어진 기독교역사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새벽기도가 가장 왕성한 바가 있었고 매주 수요일마다 수요기도회가 실시되고 있으며 매주 금요일을 정해서 철야기도가 있으며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식기도까지 기도에 관해서 아주 적극적이다.
교회마다 설교시간이나 교역자들이 성도들에게 독려하기를 '기도하라.’고 한다. 설교시간이나 기도시간에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기도는 만사를 형통케 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는다.’ ‘조지 물러는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라고 하면서 역설을 외치며 기도를 종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도에 대하여 우리는 이런 유의 내용으로 가르침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염원하는 것을 기도하면서 두드리면 뭐든 다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식의 기도신화에 매료되어 있다. 그래서 이러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을 불러다가 간증집회를 열어 교인들에게 자극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주 심각한 기도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함정에 빠진 사람들은 기도를 단지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험을 한 자들은 기도만이 모든 문제를 열 수 있는 만능열쇠로 알고 강조하며 하루에 8시간 이상 기도하는 신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기도가 무엇인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생각하지 않고 '기도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으로만 강조하며 신앙생활을 유도 하고 있다. 하나님께 자기 정성만 보이면 만사 해결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샤머니즘이나 기타 종교와 무속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모든 신앙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소위 기도 응답 받았다는 사람들의 간증이라는 것도 ‘열심’ ‘매달림’이 강조하며 자신만의 기도체험을 자랑하고 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기도의 경지에 올라서면 만사형통의 사람으로 인식하게 하려고 안간 힘을 쓴다. 또한 자신의 기도만이 하나님께서 응답하며 경청해주시는 방향으로 유도한다.
또한 기도를 잘해서 응답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기도해서 즉각 응답받은 간증이나 성경 속에 있는 인물 중에 기도하여 생명이 연장된 히스기야나 기타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도 간절히 기도해서 죽을 생명이 연장된 신화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떻게 기도해서 응답받았는가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열심을 보이기 위해 금식하고 철야하며 두 시간, 세 시간 했던 말을 반복하고, 간절함을 보이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손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온 몸을 흔들면서 기도에 심취한다. 기도의 본질과 원형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할 필요성이 있을까? 기도를 하지 말자는 취지도 아니면 기도의 목적을 훼손하자는 뜻이 아니다.
기도의 시간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께 응답받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위한 고행이나 고통을 감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기도의 목적과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기도의 정신에서 벗어나 잘못된 기도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뜻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주일을 철저히 지키며 기도시간을 엄중히 준수하며 십일조 생활에도 열심이다. 교회 조직 생활을 열심히 해야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역시 교회가 그렇게 가르쳐 온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맞는 말이기에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기도의 목적들이 내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고, 내 남편이 승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승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 공부 잘하는 자식이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고 순리이다. 실력 있는 사람이 승진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실력도 없는 사람이 승진한다면 그것은 뭔가 비리가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내 자식이 공부도 못하는데 열심히 기도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겠다면 그것은 도둑놈 심보다. 그런데 소위 기도한다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도둑놈 심보가 보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도둑놈의 심보를 갖고 기도한다는 그 자체가 바로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기도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제 정신을 차리고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원형과 본질에 의한 기도의 목적과 정신을 깨달아야 한다. 기도를 인간의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이것을 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기도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을 나에게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며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 뜻이 꺾이며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이 진정한 기도다. 그런데도 내 뜻이 반드시 관철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고 무엇이고 간에 응답만 받으면 된다는 식의 기도의 함정에 빠져 있다.
기도의 응답을 기도한 내용대로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것만이 응답이 아니다. 전혀 실현되지 않는 것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응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 응답은 내가 기도하는 정성이나 공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간 작정기도나 금식기도로 하나님을 옥죄이는 기도를 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가실지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인도를 내가 원한 쪽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되든지 온전히 하나님께 복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복종이란 차원에서 결단과 다짐과 맹세와 충성이 포함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과 원형의 핵심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단과 다짐, 맹세와 충성을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뜻만 관철시키는 기도로 하나님을 윽박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도 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 교회에서 올바르게 기도를 가르쳐야 하는 의무와 목적이 있다.
그런데 기도를 만사형통을 위한 수단으로 가르치는 교회나 목회자들은 분명히 말하건대 예수를 빙자한 사기꾼들에 가깝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어떤 자인가를 생각해 보라. 어떤 말이 나오겠는가?‘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겠는가? 이것이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이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응답하신다.
초대교회 신앙인들이나 교부들의 기도의 가장 핵심은 어떤 내용으로 간구하는 기도도 있지만 자신의 심장에다 손을 대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긍휼의 기도를 생활화해왔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기도를 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과 수단에 의한 기도로 가득 차 기도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기도는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기도는 내 뜻을 꺾으며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이 기도다. 나의 소원을 강렬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차라리 예수님께 두고 나와야 한다. 나의 편한 길로 가는 것보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게 해달라는 소원을 두고 나와야 한다.
기도하는 자의 올바른 마음과 자세를 다시 재론하지 않더라도 이 시대의 기도에 대한 정신을 세워야 하며 본질과 원형에 따른 기도로 거듭나야 하겠다. 지금까지 기도해 왔던 방식을 고수하지 말고 주님께서 가장 원하는 기도로 바꿔야 한다. 말씀에 입각한 기도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자칫 잘못된 기도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새로운 정립으로 기도를 바르게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하겠다. 기도에 대한 단어들이 구약과 신약에서 30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에 초점을 맞춰야 하겠다. 문자적인 해석에만 치중하지 마시고 본래의 뜻에 초점을 맞춰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