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없는 거듭남은 없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용서는 사람의 변화를 일으키는 조건으로 주어진다. 도덕적인 변화가 있을 때까지는 영적 거듭남은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진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빗나가고 있는가를 증명해 준다. 현재 인기 있는 신학을 보면 용서는 믿음에만 달려 있다. 종교개혁의 후손들 사이에서 개혁이란 낱말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종종 “나는 행위의 변화가 아닌 거듭남을 전한다”는 말을 듣곤 한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교리에 대한 칭찬할 만한 표현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 선언은 행위의 변화와 거듭남이 서로 상반되는 엄청난 오류를 담고 있다. 실제로 건전한 성경 신학에서는 이 둘이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변화 없는 거듭남의 교리는 변화를 택하든지 거듭남을 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 문제에서 우리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를 다 취해야 한다. 회심한 사람은 변화도 되고 거듭남도 된 사람이다. 그리고 죄인이 자기 생활 방식을 기꺼이 뜯어고치려고 하지 않는 한 그는 거듭남의 내적 체험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잃어버린 지극히 중요한 진리다. 반항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반역자에게 하나님이 용서를 베푸신다는 개념은 성경은 물론 상식에도 배치된다. 용서를 받았지만 아직도 죄를 사랑하고 의로운 길을 미워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뿐 아니라 회개하지도 않고 생활 방식에 아무 변화도 없는 죄인들로 채워진 천국을 상상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인가? 이것은 이런 이야기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관리가 비밀리에 형무소를 찾아갔다. 그는 풍채 좋은 한 젊은 죄수와 대화하게 됐는데 속으로 그를 사면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만일 석방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 죄수는 이야기하고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만일 여기서 나가기만 한다면 제일 먼저 나를 이곳에 오게 한 판사의 목을 비틀어 버릴 것이라고 흥분해서 말했다. 관리는 대화를 중단하고 감방에서 나와 버렸다. 그리고 그 죄수는 계속 감옥에 있게 됐다. 개과천선하지 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사회에 또 하나의 살인극을 연출하는 일이다. 이러한 용서는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것이다. 성경에는 용서와 죄를 깨끗케 하겠다는 약속이 언제나 회개하라는 말과 함께 연결되어 나온다. 널리 알려진 이사야서는“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라는 말씀이 그 앞 구절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6-17)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어떠한 용서를 기대하려면 먼저 생활의 근본적인 개혁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말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성경을 어기는 것이요, 진리를 거짓되게 취급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회개 없는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도덕적 표준을 저하시키는 것이며, 여전히 쓰디쓴 쓸개 속에 있고 죄악의 속박 아래 있으면서 구원받았다고 잘못 믿고 있는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런 사람에게서 더 깊은 생활을 추구하는지를 찾아보면 환멸을 느끼게 될 뿐이다. A.W 토저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