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습과 고정관념
고정관념(idee fixe)이란 생각이 오랫동안 또는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짐으로써 그 진정성과는 상관없이 진실처럼 굳어져 어떤 비판이나 검증도 거부하는 사람들의 굳어진 생각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비전을 열어보이시고 그 뜻을 이 땅에서 이루도록 허락하십니다. 이 선택 받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중심의 뜻을 계시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이 일을 그 다음 사람이 계승하여 계속 하게 되지요. 이렇게 해서 여러 세대를 거치면 처음 부르심을 받아서 일을 행한 일 세대와는 인간적으로 전혀 접촉이 없는 후세대는 그 일을 일로서 받아들일 뿐이며, 따라서 자연적으로 일 세대의 정신과는 다소 다른 자신들의 생각과 기술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허락하실 때의 사회적 요구와 하나님의 뜻이 지금 여러 세대를 거친 사회적 상황과는 달라졌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뜻 역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선배들이 해온 아름다운 일이므로 지금 자신들에게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들어 아무런 생각없이 하게 됩니다.
고정관념은 인습(tradition)을 만들어내고 이것은 자연적으로 사람들에게 퍼져 아무런 비판이나 검증없이 올바르고 유익한 것으로 모두 인정하고 그 인습을 공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과 인습은 전통을 유지하려는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에 수구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들 공동체를 유지하는 강력한 버팀목이 되지요. 그래서 더욱 인습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태도도 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화를 거부합니다. 저는 콩나물국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하는 콩나물국이라고 해도 매일 먹으면 질립니다. 제가 결혼 초기에 처가에 갔습니다. 아내가 제가 좋아하는 것이 콩나물국이라고 장모님에게 말씀하였나 봅니다. 장모님은 매일 콩나물국을 끓여 주었습니다. 저는 장모님의 깊은 뜻에 손상이 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콩나물국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은 제가 정말로 콩나물국을 너무도 좋아한다고 여기고 그 후에도 저는 처가에 가기만 하면 콩나물국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제 아내도 그 당시 신혼 초기이어서 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때라 장모님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모님은 그 후에는 다시는 콩나물국을 끓이지 않았습니다.
변화해야 할 시기에 변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고통이 됩니다. 과거에는 유익한 것이었다 해도 지금의 상황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변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이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고정관념과 인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게시판 1~4번의 글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는데 이스라엘은 서기관들이 율법서를 이해하기 쉽게 재해석하여 가르쳤지요. 이것이 탈무드인데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석서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랍비들이 그들 상황에 맞게 해석하여 적용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오류가 인본적인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환영 받을 내용을 다루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거북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입에 쓰다고 약을 먹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지요. 단맛만 골라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은 단 것만 좋아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다수의 대중은 단것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병이 생기지요.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수가 영적으로 어립니다. 물론 여기에는 목회자도 포함됩니다.
성숙하지 못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항상 단 것을 좋아하고 부드러운 것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요리를 하다보면 편식이 되고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쓰고 거친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런 쓰고 거친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는 일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지요. 이들은 변화를 요구했고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인습의 해악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세우시고 계십니다. 변화와 새로운 비전을 여는 선지자들을 우리 가운데 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일을 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숙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비난과 오해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담대함이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영적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독특한 권위를 주셨는데 이는 바리세인들의 권위와 같지 않았습니다. 바리세인들은 인습적 권위였으며 수평적 권위였고 사람들에게서 난 권위였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의 권위는 이와 같아서 사람들이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선지자를 세우며 이들을 통해서 사회와 교회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높은 차원의 영적 권위는 기적과 이사를 나타냄으로써 그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합니다. 바울 일행이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였을 때 사람들이 놀라면서 그들을 주목하였습니다. 그 때 바울은 사람들에게 “왜 놀라느냐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다. 지금 이 일을 하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무어라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뿐입니다. 영성 훈련은 이런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습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흘러간 과거뿐입니다. 새로운 비전을 보기 위해서는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게하시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는 수많은 천군들이 들어왔습니다. 이 개명(open eyes)은 일시적인 것이 된다면 게하시처럼 다시 타락합니다. 이 비전이 진정 우리 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항상 열려진 눈과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친 훈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