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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 이해2024-08-03 01:24
작성자 Level 10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 이해

 

현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성주의가 온 세계를 지배할 때에 사람들은 머지않아 종교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과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그런 사고는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과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그런 사고는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인 현재에 이르러 오히려 성령의 불길이 세계 도처에서 번져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20세기의 이성주의 시데를 지나 21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초이성주의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21세기를 대비하기 위해서 성령에 대해서 가르치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성령세례에 대해서 수 많은 책들이 저술되어 왔고 성령론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게 펼쳐져 왔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는 성령론에 관한 저서로서, 절대적 표준으로서의 성경말씀과 오순절적 경험 사이에서 균형이 잘 잡혀져 있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20세기 영국 교회의 영적인 거성이며, 철두철미한 개혁주의자이고, 대교회의 목회자입니다. 그의 성령론은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오순절적인 성령운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소화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4단원으로 나누어 성령세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과 성령의 경험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항상 논란이 되어 왔던 문제는 성경이 우선인가 인간의 주관적 체험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전통적으로 세 가지 경향을 띠어 왔습니다. 첫째로 종교적인 체험을 성경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재했던 가장 큰 위험 중의 하나였습니다. 2세기 중반의 몬타누스는 성령께서 새예루살렘의 임박한 강림을 계시하였다고 말하면서 자신들만의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초대교회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15세기의 토마스 뮌처는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새예루살렘 건설을 위해 농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내적 광명(inner light)에 지나친 강조 점을 둔 나머지 ‘성경과는 상관없이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주관적 체험을 성경 위에 놓는 것은 과거나 오늘이나 기독교에 상존하는 최대의 위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관주의의 위험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반대의 경향 즉, 객관주의적 경향이나 전통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객관주의나 전통주의는 씌여진 계시 즉, 성경말씀만을 인정하고 성령의 체험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런 전통주의적 교회가 빠지기 쉬운 위험은 형식주의입니다. 예배가 힘을 잃고 영적인 감동이 없으며 교회가 병들어 갑니다. 성령의 활동을 제한하기 때문에 교회는 유기체로서의 역동성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형식주의는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광신주의를 두려워 한 나머지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성령의 역사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과 종교적 체험의 가장 바른 관계는 성경으로 체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은 교회를 교회로서 살아있게 합니다. 셋째로 무질서와 혼란의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으로서 성령체험이 건전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교회는 말씀과 성령이 공존하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II. 성령세례와 중생

성령의 세례와 중생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문제입니다. 저자인 로이드 존스는 철저하게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는 성령세례와 중생이 모두 동일한 성령의 역사이지만, 그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성령께서 내주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르게 번역하면 “성령이 주어지지 아니하더라”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언제나 계셨습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하셨던 영입니다. 그러나 아직 오순절 날과 같은 성령세례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은 이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던 신자들이고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 즉, 성령세례를 오순절에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12절 이하에서도 중생과 성령세례가 구분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은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게 됩니다. 믿는 것과 성령 세례에는 경계선이 있습니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가 필연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은 무의식적이며 비체험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체험적입니다.


III. 성령세례와 성화

그리스도인의 삶은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창조의 모습처럼 된다는 것 즉, 성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례세례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지금까지 많은 오해가 있어 왔는데 이 두 가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세례와 성화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와 성화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을 증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우선적으로 능력세례입니다. 성령세례를 통해 우리는 담대한 확신과 다양한 은사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세례가 성화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는 어떤 성도들은 자신들의 은사에 대해 자랑했습니다. 교회는 그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은사들로 인해서 매우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은사를 사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있었던 반면 영적인 상태나 도덕적 상태는 저급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죄가 교회 내에서 용인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애찬에 참석하기 전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은사를 볼 때 능력의 증거는 있었지만 그들의 영성은 천박하여 성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와 성화의 바른 관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세례는 성화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그 자체로 만족하게 되는 완결점이 아니라 보다 높은 성화를 향해 달려 나가야 하는 출발점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사도들의 체험적이고 초자연적인 성령세례는 삶의 성화로 연결됩니다.

방언과 기사와 표적 뒤에는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등 성화의 증거들이 뒤따라 왔습니다. 바울도 성령세례를 성화로 연결시킬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조했습니다. 성령세례를 통해 받은 방언, 가르침, 예언, 신유의 은사 등은 사랑이라는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은사장인 고린도전서 12장 다음에 그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공동체적 사랑, 공동체적 성화로 반드시 연결되어야 합니다.


IV.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성령세례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고 우리는 받기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세례는 황홀경의 체험, 방언, 신유 등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를 유일한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른 동기

성령세례에 있어 중요한 것은 초자연적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경험이 아니라 경험의 의미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능력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도 바른 동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명의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매주일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설교자에게는 베드로의 능력이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각종 은사를 위해서 성령세례를 구하는 것도 잘못된 동기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경험이나 능력이나 은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의 기독교가 사랑과 열정, 생명과 활력이 있었던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에 경험과 능력과 은사가 부어졌던 것입니다. 진실한 종들의 은사에만 집중하여 위험에 빠진 예를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성령세례의 가장 중요한 동기입니다.

순종

성령세례를 위해서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고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시기도 하고, 성경을 읽을 것을 원하기도 하십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합리화 시키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주님 앞에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임재하려고 할 때에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겨드려야 합니다. 또한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많은 위대한 종들은 성령의 세례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올더 스케이트의경험이 있기까지 몇 개월 혹은 그 이상의 영적 투쟁을 했고, 무디 역시 6개월 동안이나 기도하고 간구하고 갈망하여 성령의 체험을 했습니다. 토레이 신부 역시 같은 경험을 했고, 역사상 그런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세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주관적인 종교적 체험들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 판단되어져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세례,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갖는 것이 비체험적이라면 성령세례는 체험적입니다. 성령세례는 성화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세례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동기가 순수해야 하고 순종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같은 영적인 원칙들을 잘 활용하셔서 성령께서 역사하고 활동하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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